208화
제39장 충격(3)
같은 시각, 신경외과 당직실.
책상 앞에서 오더를 입력하고 있던 경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머리가 찌르르 울리면서 나른함이 다소나마 물러갔다.
오늘은 평소에 비해 여유가 넘치는 날이었다.
수술 스케줄은 널널했고, 응급실 콜 또한 거의 없었으며, 그렇다고 병동에서 문제가 터지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 오늘만 같으면 신경외과 레지던트도 꽤 할 만할 것 같았다.
‘역시 범인은 준후였단 말이지.’
준후를 떠올리며 경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준후가 쉬는 날이 되자 귀신같이 근무가 편해졌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
진짜 환타는 자신이 아니라 준후라는 뜻이었다.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리고 민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민경은 어떤 음료수를 마시면서 경수의 곁에 앉았다.
“뭘 그렇게 맛있게 드세요?”
“아침햇볕.”
“선배…… 그런 거 드세요?”
“아침햇볕이 뭐 어때서? 구수하고 달콤하고 맛만 좋은데?”
민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햇볕은 쌀을 사용한 음료인데 경수는 이 음료수를 설탕이 들어간 쌀뜨물 정도로 여겼다.
“취향 존중하겠습니다.”
“그럼 너는 무슨 음료수 좋아해?”
“콜맥이요.”
콜맥은 경수가 좋아하는 보리 음료였다.
“으엑. 그 이상한 보리 맛 나는 거? 콜맥을 좋아하면서 감히 아침햇볕을 비하해? 우리 경수, 안 되겠네?”
“아침햇볕보다는 콜맥이 백배는 낫죠. 콜맥이 얼마나 유니크한데요.”
“그런 말을 하다니. 백만 아침햇볕 애호가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민경의 농담에 경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경수는 민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근무 도중 시시콜콜하고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너무 자주해서였다.
그래서 되도록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는데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준후에게 마음을 열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른 동료들에게도 마음을 열게 되었고.
자신이 싫어했던 민경의 성격들이 오히려 장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수에게 자주 말을 걸었던 것도 사실은 후배를 아끼는 애정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민경은 누가 뭐래도 신경외과 의국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우리 경수, 웃을 줄도 아네. 근데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안 웃었어?”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준후 녀석 부러워 죽겠어. 쉬는 날에 애인하고 데이트라니! 나는 언제 데이트해 보나…….”
민경이 준후를 부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너는 준후 안 부럽니?”
“딱히 안 부러워요. 전 감정 소모하는 게 싫거든요.”
“얘가 또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네. 연애가 왜 감정 소모야? 오히려 감정을 나누는 거지.”
“저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게 싫어요.”
경수는 딱 잘라 말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서로 간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그렇게 경계가 허물어지면.
상대가 그 경계를 수시로 넘어다니는데, 경수는 그게 싫었다.
평정심이 흔들리니까.
“그 재미로 연애하는 건데. 연애 경험은 별로 없겠다?”
“네. 별로 없어요. 못한다기보다는 안 한다는 쪽이 정확하겠죠. 그러는 선배는 연애 많이 해보셨어요?”
“대뜸 아픈 곳부터 찌르네.”
“먼저 찌른 건 선배입니다.”
“으음…… 난 여기저기 찔러 보는데 실속이 없는 스타일이야.”
민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전적으로 따지면 5전 1승 1무 3패?”
“1무는 뭐예요?”
“아직 고백을 안 했어.”
민경은 자신의 과거와 감정을 드러내는 데 숨김이 없었다.
경수와는 정확히 정반대 성향이었다. 경수는 가끔 이런 민경이 부러웠다.
그렇게 연애와 관련된 잡담을 나누는데 3년 차 시호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시호가 경쾌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선배,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민경이 시호에게 물었다.
“날씨도 좋고 수술도 잘 끝났고. 다 기분 좋은 일이지.”
“전 우울해요.”
“왜?”
“준후가 감히 선배인 저를 제치고 오프 때 데이트를 즐겨서요. 이 정도면 하극상 아닌가요?”
민경이 하소연을 하고 시호는 민경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있었다.
경수는 시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병동 내에서 미소 천사, 구 에이스라 불리는 시호였지만 경수는 시호가 영 달갑지 않았다.
분석하기 좋아하는 경수는 시호에게서 무언가 위험한 냄새를 맡았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음침함과 섬뜩함이랄까.
내가 알고 있으면 준후도 알고 있겠지? 나중에 시호 선배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 봐야겠다.
띠리리링-
병동 전화기가 울리면서 상념이 깨졌다. 전화와 가까이에 있던 경수가 전화를 받았다.
“네. 신경외과입니다.”
-…….
“잠시만요. 확인하고 내려갈게요.”
경수는 응급의학의에게 들은 환자 번호를 전산에 입력한 후 차트와 검사 결과를 훑었다.
모처럼 응급실 콜이 왔다.
* * *
그 시각, 준후는 목동에 위치한 실탄 사격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여기는 왜?”
실탄 사격장 건물을 발견하고 아영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도 데이트 코스니까.”
“총 쏘는 건 왠지 무서운데…….”
“별거 없어. 안전장치도 다 걸려 있고,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그래. 해보지, 뭐.”
두 사람은 건물로 들어가 실탄 사격을 준비했다.
총을 고르고 비용을 지불하고.
직원에게 안전교육을 받고 고글과 방탄복과 귀마개도 착용했다.
1사로 들어선 준후는 안전띠가 채워진 총을 만지작거렸다.
준후가 선택한 총은 357 리볼버 매그넘이었다.
실탄 사격장이 아니었다면 준후가 평생 만져볼 일이 없었을 권총이었다.
실탄 사격장을 찾은 것은 순전히 준후의 욕심이었다.
준후는 확인해 보고 싶은 정보가 있었다.
바로 총 VS 무공의 결과였다.
무림에서 조화경에 이른 자신이 과연 현대 개인 화기의 정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총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점이 궁금했던 것이다.
사격을 하기 전.
준후는 온몸에 내공을 둘렀다.
특히 눈 쪽에 집중적으로 내공을 쏟아부었다.
“준비되셨어요?”
“네.”
“그럼 심호흡하고 표적지에 격발하시면 됩니다. 안전하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요.”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격 자세를 취하고 표적지를 똑바로 응시했다.
탕!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이 발사되었다. 반동이 강력했지만 준후의 몸은 떨림이 없었다.
천근추의 수법으로 무게중심을 잡고 반동을 다 흡수했던 덕분이었다.
동술을 사용하니 총알이 보여.
이만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겠는데?
첫발을 발사한 순간 준후는 깨달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총은 위협적인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일단 총알이 보인다면 피하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다.
쾌속의 보법으로 총알을 회피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말이다.
만약 분쟁지역에 의료봉사를 간다고 하면 게릴라나 정부군의 총격에 목숨을 잃을 일은 없어 보였다.
다만 아쉬운 점 하나는 총탄의 위력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자신에게 총을 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어디 보자.
호신강기는 뚫릴 것 같고…… 검기를 담은 검이라면 총알을 베어낼 수 있을 건 같긴 해.
그래도 이 정도면 내가 사건이나 사고에 휘말려 다치거나 죽을 일은 없겠어.
진료와 치료에 전념하라는 하늘의 계시인 건가.
판단을 마친 준후는 사격에 집중했다. 총 10발의 탄환을 거침없이 뿜어냈다.
사격을 마치자 총열이 뜨거워졌다.
아영의 사격이 끝나지 않아 준후는 총을 내려놓고 안전요원과 대화를 나눴다.
“사격 끝나셨습니다. 자세가 끝내주시는데요? 반동도 완전히 흡수하셨고.”
안전요원이 준후를 치켜세웠다.
“혹시 특전사 출신이세요?”
“아니요. 아직 군대도 안 갔습니다.”
“아…… 저런.”
안전요원이 동정하는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군대를 다녀온 자와 군대에 가야 하는 자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었다.
“표적 확인하겠습니다. 자세가 좋으니까 당연히…….”
사로 쪽으로 밀려온 표적지를 확인한 안전요원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이…… 이게 뭔가요?”
“여자친구한테 선물 좀 주려고 예쁘게 사격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도를 의도하셨다는 거예요?”
“네. 그럼요.”
준후는 웃으며 요원이 건넨 표적지를 받아들었다.
표적지 중심 부근에 무려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엉성한 하트가 아니라 정교하고 반듯한 모양의 하트가.
* * *
데이트는 이어졌다.
실탄 사격을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가까운 안경점을 찾았다.
오전 검진 중 시력 테스트를 받을 때.
안경을 쓰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아영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안경점에서 시력 테스트를 다시 받고서 아영은 착용할 안경을 골랐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안경의 종류는 꽤 많고 다양했다.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분위기도 제법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안경을 선택하는데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둘 중에 뭐가 나은 것 같아?”
아영은 사각 뿔테 안경과 원형의 무테 안경을 두고 저울질을 했다.
“난 원형 무테가 나은 것 같은데?”
“의외네? 뭘 해도 다 잘 어울릴 거라고 말할 줄 알았어.”
“우리 아영이야 당연히 뭘 해도 다 잘 어울리지. 그래도 내 취향은 말해줄 수 있으니까.”
“100점짜리 대답이네.”
아영은 빙긋 웃으며 원형의 무테 안경을 선택했다.
렌즈의 도수가 높지 않았으므로.
안경은 금방 받을 수 있었다.
아영은 새 안경을 착용하고 준후와 거리를 걸었다.
안경을 끼고 나니 세상에는 안경 낀 사람이 참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젊은 층에서 안경 쓴 모습이 많이 보였다.
휴대폰과 컴퓨터 때문에 눈이 나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패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현기증이 오거나 어지럽지는 않아?”
“응. 괜찮아.”
“안경 잘 어울려. 진작 쓸 걸 그랬네.”
준후의 칭찬에 아영은 쑥스럽게 웃었다. 어쩐지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했다.
준후와 함께 하는 사소한 순간 하나하나가 아영은 달콤했다.
이런 날을 얼마나 꿈꿔왔는지 준후는 아마 까맣게 모를 것이다.
“준후, 너는 시력 좋지?”
“좋다마다. 한국, 아니, 전 세계에서 시력 제일 좋은 사람이 나일걸?”
“뭐야, 내 앞이라고 허세 부리는 거?”
“진짜인데? 못 믿겠으면 확인시켜 줄까?”
“됐거든요? 그리고 시력 좋아서 뭐해? 어차피 나만 보면 되는데.”
“그럴수록 시력이 좋아야지. 아영이 너를 자세히 봐야 하니까.”
준후의 너스레에 아영은 꺄르르 웃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도착한 장소를 남산 케이블카의 탑승장이었다.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대기 줄이 늘어난 치즈처럼 길었다.
방학한 학생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탑승한 케이블카.
줄이 길었던 만큼 사람들이 많아 케이블카 내부는 만석이었다. 마치 출근 시간의 지옥철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아영은 오히려 좋았다.
아영은 케이블카 창가 쪽에 붙어 있었고 그런 아영을 보호하듯 준후가 아영과 밀착해 있었다.
등 뒤에 서 있는 준후가 듬직했다.
준후의 두 손은 아영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은 상태였고.
준후의 숨결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심지어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 풍경은 푸르고 아름다웠다.
문득 아영은 생각했다.
달콤한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