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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09화 (209/424)

209화

제39장 충격(4)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저 멀리 우뚝 솟은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밤에 와서 야경을 즐겼으면 좋았으련만…….

준후는 아쉬움을 삼켰다.

저녁에는 저녁 스케줄이 따로 있었다.

“나 화장실 갔다가 자물쇠 사 올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아영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준후는 전망대로 시선을 돌렸다.

전망대 울타리에 수없이 많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처럼 곳곳에서 보였다.

저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는 걸까.

……라고 준후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 자물쇠는 한때 사랑했던, 또는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인연들이 남긴 사랑의 증거였다.

자물쇠들은 한 커플의 사랑과 역사와 추억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 사연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자신과 아영의 사랑은 어떻게 끝날까.

우리는 죽음으로서 헤어지게 될까.

이별을 한다면 누가 먼저 떠나고 누가 뒤에 남게 될까.

자물쇠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준후는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졌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그런지.

본인의 감수성이 예민해졌다고 느끼면서.

지이이잉-

때마침 휴대폰 진동이 불청객으로 찾아왔다.

준후는 와락 미간을 구겼다.

설마 응급 환자가 생겼다고 복귀하라는 전화는 아니겠지?

응급실 사건으로 아영이한테 벌써 찍혔잖아.

호출받으면 곤란한데.

불쾌함과 불길함을 느끼면서 준후는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번호를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010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 광고 전화도 아니었다.

방심하기는 일렀기에 준후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서준후입니다.”

-신경외과 서준후 선생님. 맞죠?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난 수부외과 교수 성규식이라고 합니다.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전화했어요.

규식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전에 있던 검진에서 준후가 자신의 친동생을 심폐소생술로 살려내고, 또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를 밝혀줘서 고맙다고 했다.

준후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여러모로 운이 좋기도 했고요.”

-겸손하네요. 서 선생.

규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수면 내시경이 끝난 환자가 누워 있으면 회복 중이라고 생각하지. 누가 심정지라고 의심하겠어요.

“…….”

-어디 그뿐이에요? 희귀한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까지 진단하고. 서 선생, 나중에 명의 되겠어요.

“별말씀을…… 동생분은 무사히 귀가하셨죠?”

-덕분에요. 맨입으로 넘어가기도 뭐한데 내가 언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규식과의 대화는 대략 5분 가까이 이어졌다.

규식은 준후를 거듭 칭찬하고 준후에게 감사해 하며 오늘의 활약을 신경외과 과장에게 말해두겠다고도 했다.

통화를 끊고 준후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도 인연인가 싶었다.

수부외과는 팔과 다리를 전문적으로 진료하며 잘린 손이나 팔까지 접합하는 수술을 했는데.

신경외과 또는 정형외과 전문의 자격증이 있어야만 수련을 받을 수 있었다.

뇌종양 및 뇌혈관 파트.

경추, 흉추, 요추, 파트.

정위신경 파트.

외상외과 파트.

수부외과 파트.

준후의 목표는 신경외과와 관련된 다섯 개의 진료과목을 통달하는 것이었다.

해석에 따라서는 펜타보드 서전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규태를 살리면서.

준후는 벌써 수부외과 쪽 인맥을 얻게 되었다.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을 돕는 일은 선한 업을 쌓는 일이고, 선한 업은 언젠가 반드시 자네를 구원할걸세.

언젠가 소림 방장 혜원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준후의 삶은 혜원을 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살신성인으로 행동하면 늘 좋은 결과가 뒤따랐다.

딱히 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안, 늦었지?”

아영이 준후 곁에 서서 한 손에 든 자물쇠를 흔들었다.

다른 손은 허리에 얹고 있었다.

“아니, 눈 깜짝할 새에 왔는데? 허리 또 아파?”

“아주 조금?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아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디스크는 없었지만 아영은 허리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레지던트를 하면서 통증이 심해졌다고 했다.

“가자, 우리도 자물쇠 달아야지.”

“그래.”

준후는 아영과 전망대로 이동했다.

두 사람이 멈춰선 한 인조 나무 앞에는 벌써 수많은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다.

색깔과 모양이 가지각색이었고 어떤 것은 새것이었으며 어떤 것은 녹이 슬어 있었다.

개 중에는 한 사람이 여러 개를 단 것도 있을 것이다.

딸칵!

준후와 아영은 서로의 손을 포개 하트 모양의 자물쇠를 나무에 걸었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둘만의 자물쇠였다.

* * *

그 날 저녁.

준후는 강남에 위치한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아영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20만 원에 달하는 양식 디너 코스 요리가 나오는 곳이었다.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는 음식 가격만큼이나 세련되었다.

조명은 은은하고 우아했다.

식탁과 의자, 식기들이 세련되었으며 직원들은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오늘은 더치페이야. 혼자 다 내겠다고 하지 마.”

아영이 선언하듯 말했다.

“내가 살게. 그러려고 일부러 여기 데려온 건데…… 나 60만 뉴튜버 인 거 잊었어?”

“준후 너 혼자 무리하는 거 싫어. 그리고 나도 돈 벌 거든요?”

“내가 알아보고, 내가 가자고 했으니까 내가 사야지.”

“안 돼.”

아영이 고집을 부리자 준후는 곤란해졌다.

레지던트 봉급으로 한 끼에 20만 원을 태우는 건 지나친 과소비였다.

당직 여부와 병원에 따라서 급여가 달라지지만, 보통 레지던트 1년 차의 급여는 300-400만 원이었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의대에 쏟아부은 돈.

의사라는 직업에 기대하는 급여에 비하면 낮은 편이었다.

심지어 아영은 집안에 생활비도 대고 있는데…….

“그럼 공평하게 가위바위보 어때? 3판 2선승으로 결정하자. 아영이 네가 이기면 더치페이고 내가 이기면 내가 내는 거야.”

“꼭 그렇게 해야겠어?”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휴. 알았어.”

와인값을 포함한 50만 원의 식비가 걸린 세기의 가위바위보가 시작되었다.

결과는 승·패·승으로 승리는 준후에게 돌아갔다.

“한 판 더 해!”

“삼세판 했으면 됐지 뭘 또 더 해? 이미 끝난 게임이라고.”

준후는 빙긋 웃었다.

아영은 죽어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아영은 결코 가위바위보로 준후를 이길 수 없었다.

준후는 아영이 낸 가위바위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이기는 수를 냈다.

보통 그런 꼼수를 쓰면 늦게 낸다는 지적을 받기 마련이지만.

준후는 아니었다.

무림을 경험한 준후의 반사 속도는 인간을 초월했다.

상대의 패를 확인하고 내도 행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즉, 준후는 그 누구와 가위바위보를 한다고 해도, 설령 만 번을 한다고 해도, 단 한 번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계속 이기면 의심을 사긴 하겠지만 말이다.

“칫, 얄미워 죽겠어.”

“이게 다 하늘의 뜻 아니겠어? 받아들여.”

“근데 준후야 넌 의사가 안 됐으면 지금쯤 뭘 했을 것 같아?”

아영이 화제를 돌렸다.

흥미로운 화제이긴 했다.

“할 일은 많았을 것 같아. 운동선수가 됐을 수도 있고. 마사지 샵을 운영했을 수도 있고. 미용사가 됐을 수도 있고.”

“미용사는 왜?”

“삭두(뇌 수술 시 오염을 막기 위해 환자의 머리를 미는 일) 잘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거든. 아영이 너는?”

“나는…… 빵집 운영했을 것 같아. 빵을 워낙 좋아하니까.”

“안 돼. 그러면 무조건 망해. 손님보다 아영이 네가 빵을 더 먹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아영이 피식 웃었다.

“나중에 우리 둘 다 은퇴하면 빵집이나 차려볼까? 내가 힘이 좋으니까 반죽 같은 건 잘할 것 같은데.”

“상상만 해도 좋다. 벌써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야.”

“그러게.”

준후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영과 교제하면서 준후는 새로운 행복에 눈을 떴다.

바로 일상의 행복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뿌듯함만큼이나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도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오늘 되게 뿌듯한 거 알아? 나랑 있으니까 준후 네가 긴장을 안 하더라고.”

“긴장? 내가?”

“응. 너, 예전부터 항상 주변을 예의주시하면서 몸이 굳어 있었거든. 근데 오늘은 그런 모습이 안 보였어.”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무림의 기억으로 각종 기습과 암습, 살수의 존재를 의심하며 살다 보니 준후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든 위협 요소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수면 내시경 검사실에서 환자의 심정지를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아영이 곁에 있을 때만큼은 준후도 긴장을 풀었다.

오로지 아영에게만 집중했다.

이 또한 새로운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영은 준후의 구원자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와인을 곁들인 식사는 1시간 만에 끝났다.

아영은 준후와 함께 레스토랑을 나와 지하철에 몸을 실어 집으로 향했다.

역 바깥으로 나가자 선선한 바람이 반갑게 얼굴을 스쳤다.

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고 어디선가 밤벌레 울음소리도 들렸다.

실로 행복으로 가득 찬 하루였다고 아영은 생각했다.

준후와 손을 맞잡은 채.

아영은 역 뒤편을 걷었다.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모텔촌인 역 뒤편은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놓여 있어서 어둠이 짙었다.

“우리 잠깐 여기서 쉬었다가 갈까?”

모텔을 가리키는 준후의 폭탄선언에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췄다.

성인인 아영이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순간 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첫 데이트에 모텔이라니…….

진도가 빨라도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물론 알고 지낸 지는 7년이 넘었지만 사귄 지는 1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쉬…… 쉴 거면 집에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15분만 걸으면 되는데. 그리고 우리 집 통금 있어.”

“몇 시까지인데?”

“여…… 열두 시.”

“열두 시면 충분하네. 두 시간이나 남았잖아.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지 않아?”

준후는 쉽게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어…… 어쩐다?

아영은 준후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물론 아영도 준후와 일찍 헤어지는 게 아쉽긴 했다. 하지만 쉬자는 장소가 모텔이라서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영은 준후 대신 준후가 가리킨 모텔을 응시했다.

모텔에서 준후와 그렇고 저런(?) 일을 치를 것을 생각하니 세상 쑥스러웠다.

꿀꺽-

아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 둘 다 성인이고, 서로를 사랑하고, 언젠가는 치러야 할 일이야.

차라리 잘 된 걸 수도 있어.

속옷도 잘 챙겨 입었으니까 문제없고.

아영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시간 낸 거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준후의 야릇한 발언에 아영은 귓불까지 빨개졌다.

모텔로 들어가자 접수대에 이미 한 커플이 먼저 와 있었다.

방을 배정받고 있었다.

아영은 문득 커플들과 눈을 마주치게 되었는데.

‘너희도 그거 하러 왔니?’라고 커플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아영은 어느새 준후와 모텔방에 입장하게 되었다.

딸칵!

준후가 카드키를 꼽자 전등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속전속결로 끝내볼까? 아영아, 빨리 침대에 누워 봐.”

준후의 짐승 같은 멘트에 아영은 기겁했다.

나…… 난 오늘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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