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10화 (210/424)

210화

제39장 충격(5)

“으응…….”

아영은 마지못해 발을 떼었다.

신발을 벗어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와 본 모텔방의 풍경이 낯설고 어색했다.

출입구 정면에 침대가 보였고 그 위로 가운 두 벌이 걸려 있었다.

맞은편에는 벽걸이 TV가 있었다.

그 옆으로 다과를 즐길 수 있는 탁자.

스킨과 로션, 드라이기 따위가 놓여 있는 화장대가 일렬로 서 있었다.

방 크기는 아담했지만 인테리어는 나름 세련된 편이었다.

준후가 시켰던 대로 아영은 일단 침대 위에 누웠다.

불안, 긴장, 설렘 등의 감정이 뒤섞였고 한 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멈출 줄 몰랐다.

입안은 어느새 바짝 말랐다.

사지는 통나무처럼 빳빳해져 있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편하게 생각해.”

“긴장 안 했는데? 엄청 편한데?”

“저기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실래요?”

준후가 빙긋 웃으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준후의 그림자가 먼저 아영을 덮쳐왔다.

앞으로 닥칠 일(?) 때문인지 준후가 짐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영은 생각했다.

준후의 또 다른 면모를 오늘 보게 될 것이라고.

준후가 그 유명한 낮져밤이 같다고.

“똑바로 눕지 말고 엎드려 누워 볼래?”

“그…… 그러던가.”

아영은 최대한 새침하게 대답하며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준후가 침대에 올라왔는지.

침대가 살짝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준후가 아영의 허리춤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준후가 뭘 어떻게 하려는지 아영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자, 시작합니다.”

준후가 씩씩하게 혼잣말을 하고 손을 움직였다.

무쇠처럼 단단한 엄지로 아영의 어깨 좌우에 뭉친 근육을 둥글게 문질러댔다.

“으으으으…….”

자신도 모르게 아영은 신음을 내뱉었다.

허리가 찌르르 울려왔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금만 참아. 금방 시원해져.”

준후의 손가락이 차츰 내려갔다.

등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엉치뼈로.

과연 준후의 말대로 처음 느꼈던 통증은 어느새 사르르 녹아버렸다.

온열 찜질을 한 것처럼 허리가 따뜻하고 포근해졌다.

너무나 편안한 나머지 아영은 깜빡 잠들 뻔했다.

그제서야 드는 생각.

지금의 전개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준후의 손짓은 애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준후야.”

“왜?”

“혹시 모텔엔 왜 오자고 했어?”

“너 허리 안 좋잖아. 이번 기회에 완전히 풀어주려고. 오늘 나한테 마사지 받으면 몇 년은 시원해질걸?”

준후가 의기양양하게 말하곤 키득 키득 웃었다.

“뭐야? 혹시 엉큼한 생각하고 있었어?”

“아……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야?!”

아영은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준후의 행동과 말들은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그런데 왜일까.

준후의 의도를 알고 나니 뭐랄까 섭섭하면서도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드는 건…….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아영이 네 허리를 풀어주는 게 최우선이거든.”

“알아. 그러니까 잘 좀 해봐.”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사모님.”

준후의 마사지는 무려 1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준후가 마사지를 잘한다는 건 아영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주 신세를 져 봤으니까.

하지만 오늘 마사지는 평소와 차원이 달랐다.

마사지를 받는 내내 허리가 뜨끈뜨끈했다. 허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무척추동물처럼.

“마무리 들어갈게. 힘 빼고.”

준후가 아영의 어깨에 두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러더니 새우처럼 아영의 허리를 꺾었다.

빠드득. 빠드득.

액션 영화의 효과음 같은 소리가 모텔방에 울려 퍼졌다.

아영은 허리가 두 동강 나는 줄 알고 잔뜩 겁먹었지만.

준후가 허리를 꺾어주고 나니 오히려 편해졌다.

냉수 찜질을 받은 것처럼 허리가 시원했다.

“일어나서 허리 움직여볼래?”

“응.”

아영은 침대를 벗어나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숙였다가 젖히고 좌우로 돌려봤다.

허리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통증이 사라졌고 유연성이 대폭 증가되었다.

별안간 체조선수가 된 듯했다.

원래 아영은 허리를 굽혔을 때 손가락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마사지를 받고 나니 손가락이 바닥에 닿고도 한참이나 남았다.

“와.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새 허리를 얻은 것 같아.”

아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허리에 찾아온 변화가 놀라웠다.

“내가 특별히 공을 들였으니 이 정도 결과는 당연히 나와야지. 마음에 들어?”

“완전! 이젠 어시스트 할 때도 허리 안 아프겠어. 고맙고 고생했어, 준후야.”

“그동안 아영이 네가 마음고생 한 거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준후가 쑥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나가면 아슬아슬하게 통금 시간 맞추겠다. 빨리 가자.”

준후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이 아영은 어쩐지 슬로우 모션이 걸린 것처럼 느리게만 느껴졌다.

동시에 준후와 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욕심도 생겨났다.

아영은 성큼성큼 준후에게 다가가 등을 보인 준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새빨갛게 물든 얼굴과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 통금 없어. 부모님은 나 오늘 쉬는 날인지도 몰라.”

* * *

다음 날 오전.

준후는 아영과 모텔을 빠져나왔다.

출근을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맑고 푸른 하늘에 환한 태양이 걸려 있었다.

선선한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는 화창한 가을 날씨였다.

준후는 졸린 눈을 비비던 아영의 얼굴을 보다가 아영의 허리로 시선을 내렸다.

어제 아영의 허리가 앞으로 쏠려 있던 것에 비해 오늘은 허리가 정상적인 각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준후는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준후가 어제 아영에게 펼친 수법은 벌모세수였다.

벌모세수란 무공을 익히기 좋은 신체를 만드는 수법 중 하나인데.

준후는 벌모세수를 아영의 허리에만 펼쳐주었다.

아직은 전신에 벌모세수를 해줄 만한 내공이 부족해서였다.

내공을 더 축적하고.

자신부터 완전한 벌모세수를 이루고.

그다음 아영에게 완전한 벌모세수를 해주는 것이 준후의 작은 목표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준후의 시선을 느낀 아영이 준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냥 아영이 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좋겠다 싶어서.”

“어휴. 남사스러워. 연애하더니 능구렁이가 다 됐네.”

익살맞은 말투와는 달리 아영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근데 허리 진짜 편한 거 있지. 마사지에 무슨 요령이라도 있어?”

“영업 비밀을 그렇게 쉽게 알려주면 쓰나.”

“알려줘. 그래야 나도 준후 너한테 해주지.”

“됐어. 내 허리는 내가 관리하는 걸로도 충분해.”

잡담을 나누며 도착한 지하철역.

준후는 아영과 역사 토스트 가게에서 끼니를 때우고 지하철에 탑승했다.

“오늘도 파이팅.”

“아영이 너도.”

병원에 도착한 후, 준후는 아영과 헤어져 신경외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고작 딱 하루를 쉬었을 뿐인데.

일주일 만에 병동에 복귀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어제의 데이트가 알찼다는 뜻이리라.

터벅. 터벅.

복도를 걸으면서 준후는 자신의 수련 계획을 복기했다.

천산환을 복용하며 내공을 모으고.

뇌혈관 질환 공부를 좀 더 깊이 하고.

수술 어시스트에 들어가서 교수들의 수술 비법을 초식으로 저장해두고.

마지막으로 준후는 새로운 무공을 익혀볼 계획이었다.

양수 호박 기술.

정안(正眼).

이 두 가지의 뒤를 이을 무공의 이름은 바로 호월십이수였다.

손을 사용하는 절세무공 중 하나로 무림의 10대 수법 중 하나였다.

창시자는 무당파의 괴짜 도사 청진궁.

청진궁은 준후의 스승이었던 은거기인 강백통의 막역지우로 복수에 눈이 멀었던 준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비결을 전수해 준 사람이다.

다만 당시 준후는 검을 무기로 사용했기에.

비결만 알아두고 제대로 수련은 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스테이션을 통과하며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눈 후.

준후는 좌우로 펼쳐진 병실을 쭉 훑으며 걸었다.

그런데 그 순간.

꼬집기 힘든 위화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뭔가가 잘못됐는데.

뭔가가 이상한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불길했다.

불길함을 억누르며 도착한 숙직실.

준후는 복장을 갈아입고 곧장 컨퍼런스 룸을 찾았다.

오전 회의 시작 10분 전.

레지던트들과 인턴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교수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트 잘했냐? 어리바리 타지는 않았고?”

경수 옆자리에 앉자 경수가 안부를 물었다.

“7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인데 어리바리 탈 게 있나? 재밌게 잘 쉬고 왔다.”

“그럼 다행이고.”

“무슨 할 말 있어? 뭔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데?”

“……아니, 됐다. 이따가 말하면 되겠지.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진짜 무슨 일 있어? 있으면 말해.”

“이따가 말할 거라니까. 좀 있다가.”

경수가 미꾸라지처럼 대답을 회피하는 바람에 준후의 의혹만 커졌다.

어제 휴무일에 무슨 사고가 터지긴 터진 모양이었다.

정시에 과장이 도착하면서 컨퍼런스의 막이 올랐다.

그런데 본격적인 컨퍼런스 시작 전.

과장은 준후부터 언급했다.

“어제 서 선생이 우리 병원 검진센터에서 검진을 받던 도중, 내시경 회복실에서 CPR로 사람을 살렸습니다.”

“…….”

“얼마나 의사 정신이 투철해요. 다들 박수!”

과장의 박수 유도에 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준후는 괜히 쑥스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어제 통화를 나눴던 수부외과 교수가 준후의 소식을 과장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서 선생. 자나 깨나 환자 생각만 하더니 이번에도 한 건 했네요?”

“아. 네. 별말씀을…….”

“다들 서 선생을 본받고 서 선생은 컨퍼런스 끝나면 회의실에 남아 있어요. 기자가 와서 인터뷰하기로 했으니까.”

“이게 인터뷰씩이나 해야 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어허.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좋은 일은 널리 널리 알려야죠. 안 그래요?”

과장이 껄껄껄 웃었다.

얼핏 보면 사람 좋은 웃음이었지만 준후는 과장의 새까만 속내를 잘 알았다.

그래서 속이 메스꺼웠다.

과장은 단지 이번 사건을 키워서 본인의 업적을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이렇게 훌륭하고 정의로운 의사가 자기 밑에 있다는 걸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매스컴을 이용하는 건 과장의 특기였다.

피아니스트 명한의 각성 수술 때도 그랬다.

입원 환자 관리, 수술 스케줄 정리, 케이스 발표 등등.

컨퍼런스가 일사천리로 끝나고 다른 스태프들은 회진을 돌았다.

그동안 준후는 오전 일찍 병원을 찾은 기자와 30분 정도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는 무난하게 종료되었다.

당직실로 돌아온 준후는 자신이 맡은 환자들의 차트부터 살폈다.

쉬는 동안 환자들에게 별일이 없었는지 확인해 나갔다.

그런데 민태웅 환자.

즉, 식물인간 환자의 차트를 띄운 순간.

체온이 싸늘하게 식고 몸이 굳어버렸다. 시야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아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이것 때문이었나.

경수가 머뭇거리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충격적이게도 환자의 차트에 사망진단서가 필요하다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민태웅 환자가 어제 사망했던 것이다.

“경수야. 이게 대체…….”

혼란에 빠진 준후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