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13화 (213/424)

213화

제40장 의혹(3)

그 날 저녁 컨퍼런스 룸.

시호는 타원형 책상에 마주 앉은 민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은 시호가 많이 하고 민경은 주로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진짜예요? 선배? 준후가 정말 그랬다고요?”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끼는 환자가 죽었다고 해서 나를 살인자로 몰아도 되는 거야?”

“어머. 선 세게 넘었네요. 충격은 자기만 받았나? 당직 근무를 섰던 선배 생각은 못 하고.”

민경이 못 참겠다는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안 되겠어요. 선배로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어요.”

“됐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선배는 너무 착하고 일을 늘 좋게좋게 해결하려고 해서 문제예요. 때로는 언성 높여서 싸울 줄도 알아야죠!”

시호가 항변하려 했지만 민경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드르르륵- 쿵!

민경이 문을 강하게 닫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회의실에 혼자 남겨진 후.

시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이동했다. 고즈넉한 병원 주변의 풍경을 훑어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끈거리는 양 관자놀이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주었다.

두통의 원인은 준후였다.

준후는 시호가 식물인간 환자를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약물을 투약해 교묘하게 살해했다고 믿고 있었다.

퍽 괜찮은 통찰력이었다.

첫째로 시호를 식물인간 환자를 죽일 의도를 분명 가지고 있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치밀어 오르는 살인 충동을 슬슬 해소해 줄 때가 되었다.

게다가 식물인간 환자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환자가 죽었을 때.

고통받을 준후의 모습에도 꽤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말이다.

놀랍게도 시호는 식물인간 환자를 죽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산송장을 죽이는 건 영 재미가 없어서였다.

준후의 통찰력이 날카로웠던 두 번째 이유.

그것은 약물 살인이었다.

치사량 이상의 마취제를 투입해 환자를 죽이는 방법을 시호는 예전부터 선호했다.

특히 중환자에게 효과 만점이었다.

중환자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의심을 덜 받는다.

건강한 사람이 사망하면 의심을 하지만 위독한 사람이 죽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 이치랄까.

이 경우 환자의 가족은 부검을 꿈도 못 꾼다.

피해자가 시호 최고의 변호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준후 녀석, 나를 이렇게까지 꿰뚫어 볼 줄은 몰랐는데.

역시 흥미로운 녀석이란 말이지.

앞으로는 좀 더 교묘하게 사람을 죽여야겠어.

시호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에 머물렀다.

턱 끝까지 차오른 살인 충동을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셈을 해보니 길어봐야 한 달 정도 될 것 같았다.

그때까지 준후의 의심을 사지 않는 완벽한 살인 계획을 짜야 했다.

-민태웅 환자 죽인 사람, 선배잖아요.

골똘히 계획을 짜는데.

낮에 준후와 나눴단 대화의 단편이 머릿속을 스쳤다.

순간 감정을 잘 모르는 시호의 몸이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그 감정의 정체는 바로 억울함이었다.

환자는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진짜 죽였으면 차라리 답답하지는 않지.

쾅!

시호는 분풀이로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 쓰레기통이 쓰러지며 회의실 바닥에 잡다한 쓰레기가 펼쳐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콧김을 씩씩 뿜어냈다.

시호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 * *

같은 시각 당직실.

“준후 너, 시호 선배 성격 좋다고 만만하게 보지 마. 네가 얕잡아 볼 사람 아니니까.”

“…….”

“또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하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각오해.”

민경은 성난 얼굴로 준후를 꾸짖고는 당직실을 떠났다.

쿵!

미닫이문 닫히는 소리가 천둥 같았다.

민경의 심기가 그만큼 불편했다는 증거였다.

“할 말, 안 할 말 따로 있지. 사람을 살인자로 몰아붙여도 되냐? 너답지 않게 왜 그랬어?”

준후 곁에 앉아 있던 경수가 준후에게 한마디 했다.

“다들 속고 있어. 시호 선배, 보통 사람 아니야. 생각처럼 착한 사람도 아니고.”

준후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휴대폰 녹음기 앱을 켜 놓은 채 시호에게 은밀한 살인 자백을 받아내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시호는 완강하게.

또 끝까지 본인의 범행을 부인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하지만 준후는 시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시호는 결코 준후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점찍은 먹잇감을 준후는 놓친 적이 없었다.

무림 아버지의 원수였던 적일도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건 나도 동의해.”

“진짜? 너도 시호 선배를 의심한다고?”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

경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되물었다.

“진짜 착한 사람하고 착한 척하는 사람에겐 미묘한 차이가 있어. 난 그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

“어떻게?”

“딱 꼬집어서 말하긴 힘들어. 일종의 감이랄까. 착한 척하는 사람에겐 일종의 위장된 막 같은 게 있거든.”

경수의 대답이 준후는 든든했다.

의국에서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진 동료가 있을 줄이야.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이 애석하기도 한 준후였다.

경수와 조금 더 빨리 친해졌다면.

경수의 생각을 더 빨리 알았더라면.

함께 시호를 집중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 텐데.

시호가 정말 민태웅 환자를 살해한 범인이라면.

어제의 사건을 미리 예방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그럼 앞으로 나 좀 도와줘라.”

“뭘? 어떻게?”

“대단한 건 아니야. 앞으로 시호 선배를 잘 관찰해 줘.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알려주고. 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

“나 혼자 시호 선배를 감독하는 건 한계가 있어.”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너 너무 멀리 나간 거 아니냐? 위선을 떠는 거랑 사람을 죽이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정황이 몇 가지 있어. 나도 생각 없이 의심하는 거 아니다.”

“일단 알았어.”

경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줘서 고맙다.”

“생명의 은인인데 이 정도야 약과지. 고생하고.”

경수가 떠나면서 당직실에 준후 혼자 남았다.

오늘의 당직 근무자는 준후였다.

준후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호가 민태웅 환자의 살해범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낮에 자신의 멱살을 잡아가며 화를 낸 걸 보면, 아주 어쩌면 시호는 진범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시호는 위험한 인간이었다.

이미 손에 피를 묻혀본 경험이 있으며 앞으로도 손에 피를 묻힐 위인이었다.

일단 경수가 도와준다고 했으니 다행이네.

병동 복도 중앙에 CCTV만 달면 앞으로 벌어질 범죄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겠지.

준후는 시설팀에 부탁해서 CCTV의 추가 설치를 부탁할 작정이었다.

CCTV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시호가 살인을 위해 어느 병실에 언제 출입했는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음과 생각을 정리한 후.

준후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모니터에는 여전히 민태웅 환자의 차트가 떠 있었다. 사망진단서 발급이 필요하다는 알람창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몰라도.

레지던트 1년 차를 9개월 가까이 하는 동안.

준후는 사망진단서를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맡은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사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준후 앞에서 사망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환자의 죽음으로 환자와 이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준후는 무거운 마음을 다잡고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부디 내생에서는 꽃으로 피어나시길.

준후는 짧게 묵념하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멈춰 있던 마음과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 *

그 날 새벽.

준후는 당직실 한구석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피로를 회복하고.

내공을 축적하고.

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운기조식을 펼치고 있었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허물지어다. 만물은 하나로 통할지니 이치의 순환을 가로막는 것은 오로지 그대의 편견과 아집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되고. 비가 오면 비가 되어라. 세상이 그대고 그대가 세상이다.

준후는 마음속으로 심결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해당 심결은 서씨세가의 1대 가주이자 서씨세가에서 유일하게 현경에 경지에 이르렀던 조상이 남긴 심결이었다.

조화경에서 현경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심결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심결은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다.

현학적인 척하는 헛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준후는 그 모든 의혹과 미명을 뿌리치고 심결의 정수에만 집중했다.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중요한 건 열린 마음과 끈기였다.

한참 마음 수련에 집중하던 준후가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얻은 것은 없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수련이란 커다란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과 똑같았다.

항아리에 물을 부어도 당장은 아무 효과나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항아리에 물이 넘치기 마련이었다.

그 넘치는 물을 준후는 깨달음이라고 불렀다.

문득 벽시계를 바라보니 시침이 새벽 2시를 가리켰다.

다음 무공을 수련하기 좋은 시각이었다.

준후는 찬찬히 호월십이수의 초식들을 머리로 훑었다.

호월십이수는 유월, 연월, 월하, 현월, 제월, 언월, 낭월, 범월, 은월, 만월, 호월로 이루어졌고.

총 12개의 이치를 담은 초식을 각각 6개의 세부 초식이 떠받치고 있었다.

총 72개의 초식 동작은 무림에 존재하는 수법을 총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사용하는 장법과 손가락을 사용하는 지법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준후가 호월십이수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봉합술 때문이었다.

무림에서 검을 다뤘기에 메스 사용에는 자신이 있었다.

전 세계에서 난다긴다하는 외과 교수들과 경쟁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봉합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봉합술의 숙련도는 메스의 숙련도보다 현저히 낮았다.

물론 지금 수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긴 했지만 미세 뇌혈관을 문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준후는 그런 자신의 결점이 싫었다.

그 결점으로 인해 환자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돌파하는 것뿐이었다.

호월십이수를 대성한다면.

이 세상에 내가 꿰매지 못할 게 없겠지.

내 손은 더욱 정교하고 빨라질 테니까.

부푼 꿈을 안고서 준후는 호월십이수를 펼치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준후가 곧게 뻗은 손바닥이 허공을 향했다.

그러던 도중 손목이 부드럽게 90도로 꺾여 나갔다.

호월십이수 유월의 제1초식 경화수월이었다.

부드러운 호의 곡선이 일품인 초식으로 상대의 장법을 피하는 동시에 상대의 손목을 타격하는 변칙적인 초식이기도 했다.

이 초식이 대체 봉합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상관이 있었다.

봉합에서 손목을 꺾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다.

운침.

그러니까 바늘을 봉합 부위에 통과시킬 때 손목의 스냅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손목 스냅이 엉성하면 바늘이 봉합 부위에 깊숙하게 파고들지 못한다.

반대로 손목 스냅이 강하면 봉합 부위가 찢어질 염려가 있었다.

즉 준후는 경화수월을 통해 바늘을 사용할 필요 없이.

간편하게, 또 수십 번이나 손목 스냅을 연습할 수 있었다.

손목 스냅에 최적화된 근육과 신경의 움직임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준후의 무공 초식 하나하나가 전부 봉합에 필수적인 요소들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깊어지는 새벽.

준후의 무공 수련도 점차 깊어졌다.

무아지경에 빠진 준후는 어느새 세상을 잊었다.

그렇게 준후는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남들은 쫓아오지 못할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