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14화 (214/424)

214화

제40장 의혹(4)

한 달이 지났다.

어떤 것은 변했고.

어떤 것은 그대로였고.

어떤 것은 발전했다.

식물인간 환자, 아니 민태웅 환자를 잃으며 생긴 마음의 상처를 준후는 슬기롭게 극복해냈다.

슬픔은 떨쳐 냈고.

공허함은 물리쳤으며.

무기력한 감정은 밀쳐냈다.

부정적인 감정이 밀물처럼 파도칠 때마다 준후는 이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당장 자신의 눈앞에 있는 환자들에게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언제까지 아픈 상처에서만 머물 수는 없었다.

준후의 소망인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의.

뇌혈관 파트, 뇌종양 파트, 정위신경 파트, 수부외과 파트, 외상외과 파트를 모두 아우르는 전천후 만능 신경외과의.

목표가 멀고 높고 험했으므로.

괴롭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 제2의, 제3의 민태웅 환자가 생기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비슷한 맥락으로 준후는 어느 날 시설팀을 찾아갔다. 시설 팀장에게 강력하게 추가 CCTV 설치를 요구했다.

“하…… 그게 예산 문제가 있어서 쉽지가 않네요.”

“요즘 렌탈도 많이 하던데 비용 부담이 그렇게 큰가요?”

“병원용 CCTV랑 가정집 CCTV를 같은 수준에서 보시면 안 되죠. 유지·보수비도 만만치 않아요.”

“병동에 딱 2대만 설치해 주시면 되는데 그것도 안 될까요?”

“죄송하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팀장은 점잖게 준후의 청을 거절했다.

다른 병동과의 형평성 문제도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준후는 물러날 수 없었다.

시호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CCTV는 필수였다.

CCTV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얼마면 됩니까?”

“네?”

“CCTV 설치하는데 얼마면 되냐고요.”

“1대에 80만 원 정도 드는데 왜요?”

“경비 제가 대겠습니다.”

준후는 통 크게 질렀다.

대학병원 레지던트의 한 달 월급이 실수령 기준으로 350만 원이고 뉴튜브 수익은 월급에 두 배였다.

집에 생활비 100만 원을 보태고.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종종 돕고 있음에도 준후의 통장은 나날이 불어나고 있었다.

아깝긴 하더라도 못 쓸 돈은 아니었다.

“사비를 쓰시겠다고요?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요.”

놀란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사라는 명망에 비해, 살인적인 노동시간에 비해 대학병원 레지던트는 박봉이었다.

그런데 준후가 한 끗에 160만 원을 태운다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허…… 굳이 그러셔야 합니까?”

“굳이가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경비를 대주신다면 감사하긴 한데 이게 또 서류 준비나 절차가 복잡해서 당장 진행하기는…….”

“200만 원 넣겠습니다. 지금 당장 팀장님 통장으로. 그리고 이번 건은 저랑 팀장님만 아는 걸로 하죠.”

준후는 어른의 방식(?)을 사용했다. 무림맹에서도 종종 써먹었던 방식이었다.

한편 그 의미를 알아챈 팀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 그렇다면야. 성심성의껏 처리해 보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준후는 씽긋 웃으며 현장에서 팀장에게 설치비용을 지불했다.

CCTV는 바로 다음 날 오후에 바로 설치되었다.

‘ㄷ’자 형태인 병동 복도 중앙에 각각 1대씩 설치되었다.

이로써 사각지대는 사라졌다.

만약 병동에서 문제가 터지면.

누가 병동 복도를 지났고 어떤 병실에 입장하는 지까지가 훤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CCTV가 설치가 종료된 저녁.

준후는 시호를 목격했다.

시호는 복도 중앙에 서서 빤히 새로 설치된 CCTV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호는 변화에 민감했다.

대부분의 레지던트들은 CCTV가 설치됐다는 사실을 몰랐다.

설치가 빨리 끝나서.

설치하는 모습을 못 봤기에.

새로운 CCTV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시호는 달랐다.

단번에 CCTV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준후는 알 것도 같았다.

“어? CCTV가 새로 생겼네요?”

준후는 태연하게 오리발을 내밀며 시호 곁으로 이동해 말을 걸었다.

“준후 네 작품이지?”

“제가 무슨 재주로 CCTV를 새로 달아요?”

“이런 일을 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시호가 준후를 마주 보았다.

CCTV가 설치되었음에도 시호는 의외로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안 그래도 다른 과 병동 몇 군데 다녀왔거든? 이 위치에 CCTV가 있는 건 우리 병동밖에 없었어.”

시호의 치밀함에 준후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시호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전 몰라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당연히 그렇게 나오시겠지.”

“근데 CCTV에 왜 그렇게 집착하세요? 무슨 죄라도 저지르셨나요?”

“글쎄다.”

시호가 싱겁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이런 상황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준후 네가 나를 점점 더 의식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이렇게 너도 나한테 물들어가는 거지.”

“닭살에 소름 돋는 말을 잘도 하시네요.”

“넌 분명히 대단한 녀석이야. 하지만 내가 너를 능가하는 부분도 존재하지.”

시호가 준후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말을 이었다.

“기대해. 조만간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까.”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시호가 자리를 벗어났다.

준후는 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시호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털어냈다.

그래. 날뛸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날뛰어 봐.

어차피 넌 내 손바닥 안이니까.

언젠가 내 추악함을 만천하에 드러내 주겠어.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준후는 종종 흉부외과 당직실을 찾았다. 아영도 신경외과 당직실을 방문했다.

둘 만의 데이트를 위해서.

자정이 가까운 어느 날, 두 사람은 신경외과 당직실에 있었다.

손에 얄팍한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서류철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예전에 받았던 건강 검진의 결과표였다.

두 사람은 본인의 결과를 확인하고 결과표를 상대에게 넘겨주었다.

“뭐야? 준후 너 담낭에 용종 있었네?”

아영이 걱정을 담아 한마디 했다.

“별거 아니야. 담낭 용종은 저절로 없어지기도 하잖아.”

“그래도 7mm라니까 신경 쓰여.”

“내년에 검사해서 더 커지면 제거해야지.”

준후는 웃으며 대답했다.

검진표에는 담낭 용종이 있었지만 현재 준후의 담낭에는 용종이 없었다.

건강 검진을 받던 날 현장에서 제거해 버렸으니까.

“그나저나 내 용종보다 아영이 네 역류성 식도염이 더 문제 아니야?”

준후는 손가락으로 검진표를 툭툭 건드렸다.

위내시경 검사 결과지에 역류성 식도염(reflux esophagitis)이 버젓이 적혀 있었다.

“소화 안 되고 속도 쓰리다고 하더니 결국 확진이네.”

“그러게.”

“앞으로 빵 압수, 커피 압수야.”

“너무해. 커피는 참을 테니까 빵은 봐주라.”

“안 돼.”

“빵이 안 되면 케이크라도 달라!”

“네가 무슨 마리 앙투아네트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말 한 적 없다는데? 어쨌거나 빵을 달라!”

아영의 투정이 못내 귀엽고 사랑스러운 준후였다.

하긴 빵순이한테 빵을 완전히 금지하는 건 너무 잔인할 수 있었다.

“그럼 하루에 딱 하나만 먹기로 약속해.”

“으…… 알았어.”

아영과 추억과 사랑을 쌓아가는 한편.

준후는 호월십이수 연마에도 박차를 가했다. 무공 수련은 주로 야밤에 펼쳐졌다.

당직설 때는 당직실에서.

당직이 아닐 때는 컨퍼런스 룸에서 무공을 익혔다.

이미 조화경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일까.

호월십이수의 숙련도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랐다.

준후의 손목과 손가락, 팔의 움직임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빨라지고 정확해졌다.

그렇게 준후는 한 달 만에 호월십이수를 3성까지 달성했다.

대성인 10성까지 7성이 남아 있었다.

* * *

띠리리링~

책상에 놓여 있던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오전 일과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콜이라니.

묘하게 불길한데?

당직실에 혼자 있던 준후가 전화를 받았다.

“신경외과입니다.”

-네 선생님. 여기 응급실인데요. 노티 드릴 환자가 있어서요.

응급실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준후는 살짝 긴장했다. 느슨했던 마음을 다잡았다.

“환자 번호부터 불러주세요.”

-네. 0248732번이고요. 환자가 오늘 아침에 기상하고부터 두통, 구토 증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실어증(언어장애) 소견도 보여요. 말도 제대로 못 하십니다.

노티하는 의사의 말투가 깍듯했다.

아무래도 응급의학과 수련 중인 인턴 같았다.

“네. 그리고요.”

준후는 리액션을 하면서 차트를 살폈다.

환자는 60세 남성.

고혈압과 당뇨가 있으며 기왕력(병력)으로 대동맥 판막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검사는 응급으로 MRA 촬영을 했다.

MRI가 뇌의 형태, 구조적 이상, 기능 이상을 살피는 검사라면.

MRA는 뇌혈관을 집중적으로 살피는 검사였다.

어디 확인해 볼까.

준후는 내공으로 시력을 높인 후 MRA 영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환자의 좌측 MCA(중대뇌동맥) 혈관 중 하나가 50퍼센트 가까이 협착(좁아짐)되어 있었다.

중등도의 협착이었다.

환자의 증상과 검사 결과를 종합했을 때 일과성 뇌허혈 발작(Transient Ischemic Attack: TIA)이 유력했다.

즉 혈관이 좁아지면서 뇌경색이 온 것이다.

“환자분 TIA에요. 당장 시술 들어가야겠어요.”

-아…… 그럼 선생님이 봐주시는 건가요?

“아뇨. 뇌혈관 센터에 연결된 영상진단의학과에 연락하세요. 뇌혈관 조영술 받고 스텐트 시술받아야 하니까.

-뇌혈관 질환이면 당연히 신경외과에서 봐주시는 거 아닌가요?

노티하던 인턴이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뇌혈관 조영술하고 뇌혈관 스텐트 시술은 대부분 영상진단의학과에서 진행해요. 우리 병원은.”

-그게 병원마다 다른가요?

“다르죠. 신경과에서 하는 곳도 있고. 신경외과에서 하는 곳도 있고. 영상진단의학과에서 하는 곳도 있어요.”

정형외과와 신경외과가 공통으로 허리와 목을 진료하듯.

뇌혈관 조영술과 뇌혈관 스텐트 시술은 신경과, 신경외과, 영상진단의학과가 겹쳤다.

신원대 병원은 영상진단의학과에서 주로 이를 맡았다.

영상진단의학과의 과장이 신경외과 과장보다 파워가 셌던 것이다.

영상진단의학과 과장이 인천 분원의 진료부원장으로 승진해서 가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응급의학과에서 교통 정리하는 거 힘들죠?”

-네.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지금 보는 환자도 당연히 신경외과 환자인 줄 알았는데.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요.”

준후는 인턴을 다독였다.

처음부터 일을 잘하는 사람은 없는데 사람들은 그 점을 종종 간과하곤 했다.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면.

못났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곤 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준후 선배 맞으시죠?

“절 알아요?”

-선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의대 전설에 병원 홍보 모델인데. 저 팬입니다. 뉴튜브도 잘 보고 있어요. 그럼 이만.

인턴은 쑥스러웠는지 자기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끊었다.

준후도 괜히 머쓱해졌다.

그나저나 가까운 시일에 피바람이 한 번 불 것 같았다.

뇌혈관 조영술과 스텐트 시술을 두고 신경외과와 영상진단의학과가 크게 맞붙을 것 같았다.

영상진단의학과 과장이 바뀌면.

욕심 많은 과장이 신경외과의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해당 검사와 시술을 신경외과로 가져오려 할 테니까.

지이이잉-

이번에는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콜폰이 울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 종일 바쁠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준후는 바쁜 일과를 선호했다.

더 많은 환자와 더 다양한 환자를 진료할수록 의사로서 레벨업 할 수 있을 테니까.

“네. 선생님.”

-준후 쌤. 소아 병동 스테이션인데요. 잠깐 병동에 와주실 수 있어요?

“무슨 일이죠?”

-그게…….

머뭇거리는 간호사의 말에 준후는 주의를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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