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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16화 (216/424)

216화

제41장 선택의 기로(1)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용재는 준후에게 돌려받은 휴대폰을 넋 나간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꾹! 꾹! 꾹! 꾹!

통화 버튼을 하염없이 엄지로 눌렀지만 도사는 받지 않았다.

나중에는 스팸 차단이 됐는지.

신호음이 딱 한 번 울리고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들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도사라면 저렴한 비용으로 찰떡같이 재은이를 치료해 줄 거라 믿었는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보호자분. 이제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잘 생기고 젊은 의사가 용재를 쳐다보며 말했다.

의사의 명찰에 서준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 선생님이 무례하게 구니까 도사님이 화가 나신 것 아닙니까? 저는 인정 못 해요.”

“하아…… 답답하시네. 통화, 기억 안 나세요? 병원에도 못 오겠다고 하고 제가 내려간다고 해도 치료를 못 한다는데. 그 도사의 대체 어느 면에 믿을 구석이 있죠?”

“…….”

“그…… 그건.”

용재가 말을 더듬었다.

준후가 말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도사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오늘 오전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철부지처럼 굴지 말고 현실을 보세요. 보호자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재은이도 건강을 되찾고 평범하게 살 것 아닙니까?”

용재를 향한 준후의 눈동자가 푸른 호수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파란 눈빛을 마주한 순간.

용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 밀물처럼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난 정말 등신이야.

한심한 놈이야.

생활비와 치료비가 모자라면 땀 흘려 벌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아낄 생각을 해버렸어.

도사 따위를 찾아갈 게 아니라 공사장 인부 일이라도 하는 게 옳았겠지.

재은이하고 아내한테도 미안하네.

나 때문에 고생만 하고 있잖아?

이제 정신 좀 차리자.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내 역할을 다하는 거야.

백지처럼 하얘졌던 머릿속에 또렷하고 올바른 생각들이 새겨졌다.

용재는 단숨에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생각이 짧아서…… 헛짓거리를 했네요. 여보, 미안해.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용재는 준후와 아내에게 차례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아내가 나섰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당연히 진심이지. 앞으로 할 일이 있으면 당신하고 의논부터 할게.”

“이상하네? 이렇게 쉽게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닌데?”

아내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세 가족이 단란하게 살려면 내 고집, 아니다 내 멍청한 점부터 고쳐야지. 앞으로 내가 잘할게.”

“알았어. 일단 지켜는 볼게.”

아내의 표정이 희미하게나마 풀렸다.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용재는 도사의 휴대폰 번호를 지워 버렸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뒤늦게나마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근데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시죠.”

“아까 눈이 잠깐 파랗게 변하셨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잘못 보셨겠죠. 제 눈동자는 검은색입니다.”

“하하하. 그러네요. 그놈의 도사 때문에 제 눈이 이상하게 됐나 봅니다.”

“재은이 치료를 위해 저도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준후는 두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소아 병동을 떠났다.

신경외과 병동으로 복귀했다.

남편 보호자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이유.

그것은 정안(正眼) 덕분이었다.

정안은 눈동자에 내공과 정념(正念)을 쏘아내는 동술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정신 상태 이상을 제거해 주는 버프 스킬 혹은 정의로운 세뇌(?) 스킬이랄까.

뇌종양 각성 수술 당시.

피아니스트 명한에게 정안을 성공시킨 이후 여러 방면에서 꾸준히 잘 써먹고 있었다.

오늘도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만약 말로만 남편 보호자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며칠 동안 정신 상담을 했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하여간 사기꾼들이란…….’

준후는 통화를 나눴던 도사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사기꾼은 경제나 부동산뿐만 아니라 의료계에도 만연했다.

의사가 사기꾼인 경우도 있었고.

오늘처럼 사이비 의술로 환자와 보호자들을 기만하고 뒤통수치는 사기꾼도 있었다.

타겟은 보통 말기 암이나 희귀병 환자였다.

모야모야병 환자의 가족을 유혹하는 건 특이 케이스인데 아무래도 용재가 그만큼 만만하게 보인 게 아닐까 싶었다.

병동으로 복귀하는 동안.

준후는 재은이를 생각했다.

재은이의 가족을 물질적으로 돕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했다.

형편이 어려운 세상 모든 환자를 도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맡은 환자의 경제적인 부분까지 책임지자는 게 준후의 목표였다.

무림의 아버지가 적일도에게 목숨을 잃고.

서씨세가가 폭삭 망하면서.

준후도 뼈저린 가난을 겪어 봤다.

가난이 주는 고통과 서러움을 느껴봤다.

그래서 자신이 겪은 아픔을 재은이가 물려받듯이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드르르륵-

상념이 끝날 때쯤, 병동에 도착해서 당직실로 들어갔다.

경수 자리에 민경이 앉아 있었다.

민경은 준후를 무심하게 한 번 쳐다보고 말았다.

평소와는 다른 쌀쌀맞은 분위기.

요새 민경은 준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준후는 식물인간 민태웅 환자의 사망을 시호의 탓으로 돌렸는데 이를 시호가 민경에게 고자질했기 때문이다.

실로 약아빠진 시호의 처세술이었다.

“어딜 그렇게 쏘다녀?”

“소아 병동에서 콜 왔었어요. 제가 어디 농땡이 피울 사람인가요?”

준후는 민경 옆 책상에 앉았다.

“잘났어. 정말. 근데 넌 왜 시호 선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저랑 상극이라서요.”

“이상한 소리 하네. 너랑 제일 잘 맞는 사람이 시호 선배잖아. 착하지, 다른 사람 배려할 줄 알지, 실력도 좋지.”

“글쎄요. 제 생각은 좀 다른데. 그나저나 제가 시호 선배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거 아직 안 풀렸죠?”

준후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 아직 화 많이 났어. 네 환자가 죽은 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걸 시호 선배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니지 않아?”

“제가 잘못했어요. 화 푸세요.”

준후는 순순히 사과했다.

시호를 향한 사과가 아니라 민경을 위한 사과였다.

상황을 돌이켜보면 자신에게 경솔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시호를 몰아붙이려면 증거를 가지고 몰아붙이는 게 옳았다.

유도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고.

그걸 녹음기 앱으로 녹음하려 했던 건 다소 얄팍한 책략이었다.

“뭐야? 이렇게 순순히 굽힌다고?”

“잘못했으면 사과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칫. 이래서 내가 너를 미워할 수 없다니까.”

민경도 화가 풀렸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거짓말 마세요. 선배 저 미워하잖아요.”

“내가 널? 왜?”

“이것 때문에요.”

준후가 신고 있던 크룩스를 벗어 민경을 향해 발을 내밀었다.

다섯 개의 발가락이 선명하게 드러난 준후의 발가락 양말을 확인한 순간.

민경이 진저리를 쳤다.

“어휴. 극혐! 서준후 개극혐!”

놀리는 타격감은 민경이 최고였다.

* * *

그 시각 컨퍼런스 룸.

뇌혈관 파트 조교수 민석과 뇌혈관 파트 펠로우 1년 차 철우가 타원형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늘 입원한 모야모야병 환자의 수술법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번 수술은 민석에게 특히 중요했다.

환자에게 신 수술을 적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모야모야병의 수술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막힌 혈관을 다른 혈관에 문합해 주는 직접문합술.

다른 하나는 막힌 혈관을 대신할 표재 조직을 막힐 혈관 주변에 이식하는 간접문합술이었다.

간접문합술을 사용하면 신생 혈관이 생기면서 막힌 혈관을 대체할 수 있었다.

전자의 경우인 직접문합술은 성인 모야모야병 환자에게 펼쳐진다.

성인의 뇌혈관이 소아의 혈관보다 훨씬 두껍고 튼튼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인 간접문합술은 소아 모야모야병 환자에게 펼쳐진다.

역시 혈관의 안정성 문제였다.

하지만 민석은 환아에게 직접혈관문합술을 펼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까다롭고 어려운 수술이지만 성공만 하면 환자의 경과는 눈부실 것이다.

게다가 성공만 하면 학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부교수 자리를 두고 다투는 뇌종양 파트 신동훈을 멋지게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민석은 벌써 설렜다.

“점찍어둔 세컨드 어시스트가 있으십니까?”

철우의 질문에 민석은 현실로 돌아왔다.

“암. 있지.”

“그게 누구입니까?”

“준후 좀 써보려고.”

“준후면 레지던트 1년 차 아닙니까? 이번 수술을 맡기기에는 깜냥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철우가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봤을 때는 시호가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오래 지켜봤는데 솜씨도 야무지고 집중력도 뛰어납니다.”

“시호도 괜찮은 녀석이지. 하지만 난 준후에게 더 관심이 있어.”

“이유가 있으십니까?”

민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이 준후를 주목하게 된 건 라이벌 신 교수 때문이었다.

최근 신 교수는 준후를 적극적으로 어시스트로 기용했는데 그 후부터 수술 성공률과 경과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준후에게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준후 때문에 수술이 잘 풀린다는 건 비약이 아닐까요?”

민석의 설명을 듣고도 철우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눈치였다.

“나도 알아. 그래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겠지.”

“교수님 말씀은 지당합니다만…… 굳이 신 수술을 시험하는 자리에 준후를 쓸 필요가…….”

“철우야.”

민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철우를 불렀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은근한 힘이 실려 있었다.

“네. 교수님.”

“네가 꼼꼼하고 일 잘하는 건 안다만 네가 하는 생각을 내가 안 하고 있겠니?”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도 모르고 그만.”

“준후가 깜냥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테스트를 해보면 알겠지.”

“테스트라면…….”

“요즘 네가 연습하는 걸 시켜보자꾸나.”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당연히 성공할 거란 기대는 안 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고 중요한 거지.”

“알겠습니다. 그럼 준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 후 철우가 준후를 데리고 왔다.

준후가 민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철우 곁에 앉았다.

녀석, 외모 하나만큼은 끝내주는군. 왜 의사를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야.

준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민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널 왜 호출했는지 잘 모르겠지?”

“네.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입원한 모야모야병 환자 말이야. 그 환자에게 직접혈관문합술을 할 예정이다. 난 너를 세컨드 어시스트로 점찍었고.”

“…….”

“어때? 할 수 있겠어?”

“맡겨만 주시면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준후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확실히 깡다구가 있는 녀석이었다.

보통 1년 차였으면 이렇게 대답 못 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수술 앞에서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게 정상일 테니까.

심지어 노력해 보겠습니다도 아니고 기대에 보답하겠다니…….

신 교수가 준후를 왜 애정하는지 민석은 알 것도 같았다.

나도 갈수록 마음에 드는걸?

속마음을 숨긴 채 민석은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입니까?”

“소아혈관문합술이 어렵다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지. 네 솜씨가 부족하다면 널 어시스트로 쓸 수 없어. 그래서 우선 네 실력을 테스트해 볼 생각이다.”

민석이 철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철우야.”

“네. 교수님.”

“그거 가져와라.”

지시를 받은 철우가 냉장고로 이동해 무언가를 가져와 책상에 내려놓았다.

놀랍게도 그 물건의 정체는…….

해동된 닭 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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