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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19화 (219/424)

219화

제41장 선택의 기로(4)

컨퍼런스 룸에서 나온 준후는 병동 복도를 가로 지르고 있었다.

민석에게 인정받았다는 것.

고난이도 뇌혈관 수술에 스태프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꺼림칙한 기분은 남아 있었다.

이번 수술의 동기 자체가 불순해서였다.

소아에게 굳이 100퍼센트 직접혈관문합술을 고집하다니…….

이건 실력을 뽐내고 명성을 얻기 위한 수술이잖아.

환자를 살릴 길이 위험한 수술뿐인 경우라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재은이는 경우가 달랐다.

직접혈관문합술과 간접혈관문합술.

이 두 가지를 병행한 하이브리드 수술로 안전하고 좋은 회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민석이 직접혈관문합술만을 고집하니 준후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자신은 저런 탐욕스러운 의사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준후는 당직실로 들어갔다.

당직실에는 경수 혼자 있었다.

바쁘게 오더를 입력 중이었다.

“별일 없었어?”

“네가 없으니까 응급실 콜도 안 오고 좋더라.”

“그놈의 환타(환자를 타는 의사, 환자를 몰고 오는 의사) 취급은…….”

“네가 환타인 건 과학이야. 이제 순순히 받아들이시지?”

경수와 농담 섞인 잡담을 주고받으며 준후는 경수 옆자리에 앉았다.

응급실에서 코드 그레이.

그러니까 위험인물이 경수를 인질로 잡고 소란을 부렸던 사건 이후.

준후는 경수와 부쩍 친해졌다.

진짜 동기 같은 케미를 선보였다.

이제 레지던트 중에서 준후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면 시호가 유일했다.

사실상 시호가 끝판왕이었지만.

“뭘 그렇게 쳐다보냐?”

준후의 시선을 느낀 경수가 물었다.

“턱에 상처, 잘 아물었다 싶어서.”

“아. 그거? 자세히 보는 거 아니면 티도 안 나더라.”

“당연하지. 봉합을 누가 했는데.”

“대단하십니다. 서 선생님. 그나저나 컨퍼런스 룸에서 뭐 이상한 거 하더라?”

경수가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컨퍼런스 룸에 잠깐 들어왔다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나간 모양이었다.

준후는 닭 날개 그래프트 시술과 모야모야병 수술에 세컨드 어시스트로 뽑혔다는 사실을 전했다.

“벌써 시작됐구나.”

“뭐가?”

“서준후 쟁탈전.”

경수는 의자를 준후 쪽으로 돌린 후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앞으로 처신 잘해야 해. 네가 계속 활약하니까 교수님들이 하나둘 눈독을 들이잖아.”

“…….”

“동훈 교수님도 그렇고 민석 교수님도 그렇고.”

“그래서?”

“그럴수록 네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단 말이지. 편 가르기에 휩쓸릴 수도 있고, 단순하게 일회용품처럼 소모될 수도 있으니까.”

경수의 통찰력은 뛰어났다.

준후가 처한 현실과 앞으로 처할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현실감각 하나는 준후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수였다.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

“걱정해야지. 네가 망가지면 피곤해지는 건 나니까.”

“그런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구먼.”

“그래 떫냐?”

“아니? 안 떫은데?”

준후는 피식 웃었다.

감정을 숨기는 경수가 문득 귀여워 보였다.

경수가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준후는 앞날이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무림을 경험한 준후는 알았다.

사파보다 정파가 훨씬 악랄한 곳이라는 진실을.

사파는 무력(武力)이 법이었지만.

정파는 명분이 법이었다.

그래서 권모술수, 계략, 정치, 협잡질이 넘쳐났다.

정파 무림에서도 날고 긴다는 인재들이 모인 무림맹에서 준후는 5년을 넘게 버텼다.

정치질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레지던트 1년 차라서 잠자코 있을 뿐.

치프 정도만 되어도 준후는 의국과 교수들을 휘저어놓을 자신이 있었다.

“경수 넌 다른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왜?”

“내 줄만 꽉 잡고 있으면 되니까. 내가 의국을 씹어먹을 거니까.”

* * *

그 날 오후.

당직실에 홀로 앉아 있던 준후는 호월십이수를 펼치고 있었다.

양 손바닥을 허공에 뻗고.

한 손으로 원을 그리고.

악력으로 공기를 움켜쥐는 등등.

각종 초식을 연마하면서 팔과 손목의 힘과 유연성을 기르고 있었다.

호월십이수는 고난이도 미세 봉합술을 습득하기 위한 필수과제였다.

미세 봉합술의 근본은 손가락과 손목, 팔을 얼마나 섬세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그 이치가 호월십이수에 다 녹아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땐 준후가 헛짓거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준후는 지름길을 걷고 있었다.

모형으로 연습하는 것과는 달리 호월십이수는 언제 어디서라도 수련이 가능했다.

간접적으로 다양한 봉합 케이스를 소화할 수 있는 재능을 키워주었다.

‘슬슬 한계인가?’

수련을 마치고 준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한 달 수련으로 호월십이수를 3성까지 익혔지만 이후로는 좀처럼 경지가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조해할 일은 아니었다.

하나의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공부를 하는 것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아는 게 없어서 경이로운 속도로 지식을 흡수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진도가 더뎌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끈기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렸다.

인턴 윤성이 쭈뼛거리다가 준후에게 다가왔다.

“선배.”

“응. 왜?”

“환자 한 명만 봐주실 수 있나요? 경수 선배 환자이긴 한데 경수 선배가 수술실에 들어가서.”

“환자 번호 불러 봐.”

“10478965입니다.”

타다다닥-

준후는 EMR(전자의무기록)에 환자 번호를 입력했다.

환자의 이름은 오태성.

나이는 55세였고 뇌경색 수술을 받은 후 중환자실에서 회복하다가 오늘 오전에 일반 병실로 전실되었다.

“이 환자, 어디가 문제인데?”

“2시간 전부터 체온이 서서히 오르다가 지금은 38.5도 찍었거든요.”

“진찰은 했어?”

“네. 오한하고 두통이 있으시대요. 옆구리도 살짝 아프다고 하시고요.”

준후는 환자의 간호 기록지를 살피며 턱을 쓸어내렸다.

체온이 올랐다는 것은 감염성 질환에 걸렸다는 증거인데…….

간호 기록지를 읽고.

윤성의 노티를 듣고 나니 짚이는 바가 있었다.

“윤성이 네 생각은 어때?”

“저는 뇌수막염, 의심합니다. 일단 흉부 엑스레이 촬영했는데 폐렴 소견이 없었거든요.”

“…….”

“페렴 말고 생길 수 있는 감염성 질환이라면 뇌수막염밖에 없지 않을까요?”

윤성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했다.

윤성의 접근 자체는 칭찬해 줄 만했지만 디테일이 아쉬웠다.

그래서 준후는 해답을 주기 전 문답을 좀 더 나누기로 했다.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낚시를 가르치는 것이 훨씬 근본적인 교육이었다.

“그럼 환자는 왜 옆구리 통증을 호소했을까?”

“그게…….”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을까.

윤성은 볼을 긁적이다가 한참 만에 대답을 내놓았다.

“옆으로 오래 누워 있다 보면 옆구리가 아플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래 누워서 결린 정도로 환자가 불편함을 호소했을까? 지금까지 그런 환자 봤니?”

“어…….”

준후의 추가 질문에 윤성은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줍지 않은 대답이 간파당하니 당황했던 것이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윤성은 자신이 노티하면 준후가 곧바로 해답을 줄 줄 알았건만 준후는 윤성이 직접 해답을 찾길 바라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제대로 알아봐야겠지? 간호 기록지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펴봐.”

준후가 자리를 비켜주었고.

윤성은 준후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마우스 휠을 내리며 환자의 간호 기록지를 확인해 나갔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눈에 힘을 빡 주고 살폈지만 전부 헛수고였다.

준후가 보고 있는 것을 윤성은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클래스의 차이인가.

“선배 죄송한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힌트 하나 줄까?”

“네!”

“비뇨기 계통이야.”

“아…… 요로 감염이구나. 맞죠?”

윤성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힌트를 듣고 간호 기록지를 다시 보니 환자가 배뇨 곤란을 호소한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배뇨 곤란 자체는 노년 환자에게 자주 발생하는 문제지만.

38.5도의 고열.

옆구리 통증.

이 두 가지 증상과 조합하면 요로감염을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윤성이 너, 신경외과 환자니까 당연히 뇌수막염을 의심한 모양인데. 환자의 병명을 대충 넘겨짚으면 안 돼.”

“…….”

“질병을 판단했으면 제대로 된 근거를 대야지. 배제할 건 배제하고.”

“네. 선배.”

“그리고 너 진찰 좀 받아봐라. 입 냄새 난다.”

뜻밖의 지적에 윤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까 양치를 못 했더니…….”

“양치 문제가 아니야. 위장 질환 있는 것 같으니까 제대로 진료받아보라고.”

“입 냄새랑 위장 질환이 무슨 상관인가요?”

윤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준후의 지적이 알 듯 말 듯 아리송했다.

“입 냄새가 안 나던 사람이 갑자기 입 냄새가 나면 위장 질환을 의심할 수 있어.”

“…….”

“요새 속도 쓰리지 않니?”

“네. 맞긴 한데…… 한 번 진료 받아보겠습니다.”

“그래. 꼭. 오태성 환자 소변 배양 검사하고 유린(urine) 카테터 교체 오더 낼 테니까 처리하고.”

“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

준후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윤성은 당직실을 빠져나왔다.

때마침 동료 인턴 세호가 복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세호야.”

“응. 왜.”

“나 입 냄새 나냐?”

“뜬금없이?”

“미안한데 확인 좀 해주라.”

세호와 워낙 친한 사이었기에.

윤성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세호를 향해 ‘하아’하고 입김을 뿜어냈다.

“입 냄새 안 나는데?”

“진짜? 준후 선배는 난다고 했는데?”

“입김 한 번 더 불어 봐.”

“후우우우.”

“안 나. 준후 선배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네 코가 맹탕인 건 아니고?”

“나도 나름 개 코거든?”

“알았어. 고맙다.”

자칭 개 코인 세호도 못 맡은 냄새를 준후는 어떻게 맡았을까.

혹시 다른 냄새와 자신의 입 냄새를 착각한 건 아닐까.

윤성은 의문을 접어두고 오태성 환자의 처치부터 준비했다.

일주일 후의 일이지만.

준후의 말은 전부 사실로 드러났다.

오태성 환자는 요로감염이 확인되어 항생제 치료를 받았다.

윤성은 쉬는 날 동네 의원에서 역류성 식도염을 진단받았다.

전부 준후가 말하는 대로 되었다.

* * *

후각이 좋은 것도 쓸모가 있단 말이지.

당직실을 떠나는 윤성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준후는 피식 웃었다.

드물긴 하지만 후각으로도 환자를 진단할 수 있는 케이스가 존재했다.

입에서 하수구 냄새가 나면 편도결석.

달걀 썩는 냄새가 나면 간 질환.

암모니아 냄새가 나면 신장 질환 등등.

준후는 평소 입 냄새가 나지 않는 윤성에게서 희미한 입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 입 냄새는 양치질을 하지 않아서 나는 입 냄새와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산이 역류해서 느껴지는 신 기운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윤성의 역류성 식도염을 의심해 볼 만했다.

준후의 후각이 남달리 뛰어난 이유는 당연하게도 무림의 영향이 컸다.

지명 수배자나 사파인을 추적하기 후각 추적술을 따로 익힌 덕분이었다.

내공으로 후각을 증폭시킬 경우.

준후는 165자(尺), 대략 50미터, 반경 내에 모든 냄새를 구분할 수도 있었다.

띠리리링-

잠깐 한숨을 돌리려는데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귀찮기도 하고.

보는 눈도 없어서.

준후는 격공섭물의 이치를 사용했다.

수화기에 손을 뻗은 후.

손바닥으로 발산한 내공을 다시 흡(吸)자 결로 당겨왔다.

그러자 펼쳐진 놀라운 기적.

염력을 사용한 것처럼 수화기가 두둥실 떠올라 준후의 손아귀로 날아들었다.

턱!

“네. 신경외과입니다.”

-…….

“산부인과 병동이시라고요? 신경외과는 왜…….”

준후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물었다.

산부인과 병동에서 신경외과에 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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