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제42장 떡상(1)
오후 6시.
본관 1층에 위치한 외래 진료실은 휑했다.
외래 진료가 끝나면서 환자와 보호자의 발길이 끊겼다.
외래 간호사들은 다 퇴근했으며 진료 순서를 알려주는 전광판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적막이 감도는 외래 진료실에 한 교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뇌혈관 파트 조 교수인 민석이었다.
진료실에 있던 민석은 손에 턱을 괸 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참 나, 임산부에게 뇌동맥류라니
이게 얼마 만이지?
민석은 뇌 MRI 검사 결과를 살피며 헛웃음을 지었다.
오늘 오후. 치프 찬영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산부인과 병동에서 컨설팅을 요청한 환자가 있었다.
평범한 두통을 호소했는데 MRI를 촬영하고 보니 비파열성 뇌동맥류를 발견했다고 한다.
찬영의 말에 따르면.
뇌 MRI를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준후라고 했다.
준후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두통 환자에게 MRI 촬영을 밀어붙였을까.
만약 준후가 MRI를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환자는 어떻게 됐을까.
출산 중 뇌동맥류 파열로 뇌출혈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민석은 준후의 활약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
그것은 준후 덕분에 신경외과의 체면이 살았다는 것이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단 말이야.
비록 닭 날개였지만 혈관 그래프트에 성공하고.
임산부의 뇌동맥류를 진단하고.
레지던트 1년 차에 이 정도면 천재라고 봐야겠지.
민석은 준후의 매력에 조금씩 젖어가고 있었다.
준후를 잘 키우면.
아니, 준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 준후는 분명 천군만마가 될 것 같았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산부인과 교수 성은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성은은 민석의 의대 동기로.
동갑내기고 친분이 있어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낮에 그 이야기는 들었지?”
성은이 민석 곁에 앉아 운을 뗐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퇴근도 못 하고 있다.”
“고생이 많네. 칼퇴근의 신이 칼퇴도 못하고.”
“위로해 주는 거야? 먹이는 거야?”
“둘 다.”
성은이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환자는 어떻게 할래? 출산 전에 수술? 아니면 출산 후에 수술?”
“출산 전에 수술해야지.”
민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머리를 싸매고 충분히 고민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보통 임산부 뇌수술은 출산 직후나 출산 후에 하지 않나? 좀 더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어?”
성은이 차분하게 반대 의견을 전했다.
“환자가 임신중독증인 게 마음에 걸려. 그리고 뇌동맥류가 파열된 것도 아니잖아? 굳이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있어?”
“너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 근데 내가 보기에는 상태가 훨씬 심각해.”
“어떤 면에서?”
“비파열성 뇌동맥류는 보통 증상이 없기 마련인데 환자는 두통을 호소하고 있어. 증상이 있는 비파열성 뇌동맥류는 최대한 빨리 수술하는 게 좋지.”
민석은 수술이 필요한 이유를 네 가지나 더 댔다.
뇌동맥류의 위치와 크기.
꽈리 모양으로 부푼 형태.
일반인보다 특히 임산부에게 뇌동맥류가 파열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언급했다.
“수술을 미뤄도 괜찮으면 진작 미뤘지. 나도 되도록 임산부는 수술하고 싶지 않아. 태아까지 잘못되면…….”
민석이 말끝을 흐렸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 것만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임산부한테 뇌동맥류 수술한 적은 있어?”
“당연히 있지. 근데 다 출산 직후나 출산 후였어.”
“출산 전 수술은 처음이라는 소리네.”
“그렇지. 아주 드문 케이스니까.”
“무섭진 않아?”
“무섭다고? 내가?”
민석이 코웃음을 쳤다.
외과의마다 집도하는 스타일은 천차만별인데.
민석은 공격적인 수술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환자 경과가 좋고 난이도가 어려운 수술을 좋아했다.
모야모야병을 앓는 소아 환자에게 직접혈관문합술을 계획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리고 이는 딱히 환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석이 주목받는 걸 원해서였다.
민석은 스타 서전이 되고 싶었다.
전 국민이 이름을 알고 있는 외상외과 이국정 교수처럼.
“자신만만한 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어쨌든 네가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면 해야지. 날짜는 언제로 할래?”
“이틀 뒤. 바이탈 관리 빡세게 해놔. 스케줄 밀리지 않게.”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너도 수술방 들어 와. 임산부 바이탈 케어는 네 전문이잖아.”
“말 안 해도 들어갈 생각이었거든?”
성은이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근데 수술 방식은 결정했어? 코일 색전술? 아니면 클립 결찰술?”
“내 생각에는…….”
민석은 성은에게 자세한 수술 계획을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 * *
당직실 창틈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재 시각은 오전 4시.
당직 근무자인 민경은 졸린 닭처럼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준후는 그런 민경 곁에서 오늘 뇌동맥류 수술을 받는 임산부의 간호 기록지를 보고 있었다.
당직이 아닌데도 밤을 새우는 일은 준후에게 자연스러웠다.
산부인과 쪽도 신경 많이 썼나 보네. 환자 바이탈이 계속 정상수치잖아?
준후는 내심 감탄했다.
임신중독증으로 입원한 환자의 혈압을 정상인의 혈압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산부인과가 해냈다.
이번 수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환자의 상태가 양호하므로.
오늘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되리라.
세컨드 어시스트로 간택 당한 준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 수술 과정을 떠올려 보았다.
비파열성 뇌동맥류 수술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코일색전술이었다.
카테터를 이용해 백금 철사를 뇌동맥류에 채워 넣는 시술이었다.
철사가 부풀어 오른 혈관에 삽입되면서 혈액이 고인 자리를 철사가 밀어낸다.
철사는 혈관이 파열되지 않도록 단단하게 형태를 잡아주는 역할도 했다.
둘째는 클립 결찰술이었다.
꽈리처럼 부푼 혈관을 의료용 클립으로 붙잡아 주는 것이었다.
혈류를 차단함으로써 혈관의 파열을 막는 원리였다.
임산부 환자에게 펼쳐질 수술은 후자였다.
클립 결찰술이었다.
머리를 열고 수술 부위에 접근해야 하는 대수술이지만 준후는 교수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했다.
준후가 민석이라도 클립 결찰술을 선택했을 것이다.
뇌동맥류의 위치와 크기와 형태가 코일 색전술로는 감당하기 벅찬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긴 하네.
출산 전인 임신중독증 환자의 머리를 열어야 한다니.
오늘 오전에 있을 수술을 생각하니 벌써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번 케이스는 스승 재현의 비급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날고 긴다는 스승조차 해보지 못한 수술이란 것이다.
출산 전 임산부에게 뇌수술을 한 케이스는 열 개밖에 되지 않았다.
비파열성 거대 뇌동맥류.
임신중독증이란 세부 키워드에 적합한 케이스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말이다.
긴장과 두려움을 떨치며.
준후는 눈 감은 채 상상 수련을 시작했다.
무림에서부터 준후가 즐겼던 수련으로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눈을 감아 까만 어둠 속에.
수술대가 나타나고.
배가 볼록한 환자가 나타나고.
오늘 수술에 함께 들어갈 스태프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환한 무영등 불빛 아래 수술이 진행되었다.
비록 가상이었지만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이 생생했다.
환자의 머리가 열리고, 호두 같은 뇌가 노출되고, 꽈리처럼 부푼 혈관이 등장하고 등등.
상상 속에서 준후는 다양한 케이스도 체험했다.
뇌동맥류가 갑자기 파열하는 케이스.
환자의 뇌압이 상승하는 케이스.
심정지 상황이 펼쳐지는 케이스.
현실이 된 상상 속에서 준후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한 시간 가까운 수련이 끝나자.
온몸이 식은땀에 젖을 지경이었다.
준후는 그만큼 가상훈련에 몰입했고 자신이 가진 지식과 스킬들을 실전처럼 시험해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
환자도 살리고 태아도 살린다.
나라면 가능해.
자신감을 되찾은 준후는 팔을 풀 겸 호월십이수도 수련했다.
제비처럼 날렵한 손놀림.
비단처럼 부드러운 손놀림.
벼락처럼 강맹한 손놀림.
호월십이수의 초식을 따라 하면서 준후의 손가락과 손가락 마디, 팔꿈치와 어깨 등등.
팔에 관련된 다양한 부위가 유연해졌다.
관절의 운동 범위가 증가하고 힘 조절은 섬세해졌으며 움직임은 정확해졌다.
“준후야, 너 뭐 해?”
불쑥 들려오는 민경의 목소리에 준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호월십이수에 집중하느라 민경이 깨어난 기척을 깜빡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민경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민경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이상해진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그냥…… 달밤에 체조랄까? 스트레칭을 했다고 할까요?”
준후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 * *
오전 7시 30분.
신경외과 오전 컨퍼런스가 시작되었다.
그때쯤 준후의 컨디션은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한의원에서 꾸준히 배달되는 천산환과 피로 회복 영양제를 복용하고 30분간 화장실에서 운기조식을 한 덕분이었다.
잠을 거의 안 자다시피 해도 된다는 것.
그 시간을 의학지식을 쌓고.
무공을 익히는데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영양제와 운기조식 조합은 여전히 사기였다.
컨퍼런스의 가장 큰 화두는 오늘 있을 임산부 환자의 뇌동맥류 수술이었다.
“곽 교수.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 아니지?”
과장이 민석을 응시하며 걱정을 드러냈다.
“비파열성 뇌동맥류면 경과를 지켜보는 게 낫지 않나? 굳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수술을 해야겠어?”
“거대 뇌동맥류라서 파열됐을 때 환자의 경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선제적으로 치료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에서 막 머릿속의 시한폭탄이다, 뭐다 겁을 줘서 그렇지. 뇌동맥류 생각만큼 파열이 잘되지는 않잖아?”
과장이 반박했다.
과장도 민석처럼 뇌혈관 파트 전공자라서 하는 말이었다.
“임산부가 아니었다면 저도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지켜봤을 겁니다. 하지만 임산부의 경우 출산 전후로 혈역학적으로 위험요소가 많은지라…….”
“뭐, 곽 교수 의견 존중해요.”
과장은 의외로 금방 발을 뺐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더 무서웠다.
“뇌사 환자를 수술하든, 식물인간 환자를 수술하든 난 상관 안 합니다. 결과만 좋다면. 결과만.”
과장이 결과에 힘을 주어 말했다.
무조건 수술을 성공시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말에 부담을 느꼈는지 민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여간 사람이 참 못됐다니까.
우리 과장 얼굴은 언제쯤 안 보게 될까.
제대로 된 과장이 왔으면 좋겠는데.
준후의 희망 사항과 함께 컨퍼런스에 이어 회진도 종료되었다.
준후는 수술 동의서를 출력해 산부인과 병동으로 이동해 오늘 수술이 있는 임산부 환자의 병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준후가 침상에 다가가 인사하자 환자와 보호자도 화답했다.
수술이 코앞인 탓일까.
두 사람 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이 부자연스럽고 행동도 뻣뻣했다.
그 마음을 준후도 알 것 같았다.
만약 환자가 아영이고 남편이 자신이라고 대입하면 그 불안감은 말도 못 했을 것이다.
“많이 긴장되시죠?”
“네. 그냥 두통인 줄 알았는데, 약만 먹으면 나을 줄 알았는데. 머리를 열어야 하는 수술을 받을 줄은 몰랐어요.”
환자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도 참 안타깝습니다. 안 그래도 임신중독증으로 고생하시는데 짐이 더 생기실 줄은…….”
“저 무사히 수술받을 수 있겠죠? 아이도 무사하겠죠?”
“혹시 수술 성공률은 어떻게 되나요?”
환자가 묻고 보호자가 또 물었다.
이 어려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준후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