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제43장 괴력(1)
지이이잉.
3번 수술방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이 쏟아졌다.
대열 가장 뒤에 있던 준후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전신이 시원하게 찌르르 울렸다.
[임산부에게 실시한 뇌동맥류 클립 결찰술]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비록 수술 시간은 예정보다 40분 길어졌지만 성과는 탁월했다.
뇌출혈이 발생하거나, 뇌압이 올라가거나, 혈압이 치솟거나 등등.
산모나 태아가 위험했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뇌동맥류로 유입되는 혈류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준후가 맨손으로 클립을 재창조(?)한 순간부터.
수술은 일사천리에 파죽지세로 엔딩을 향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걸.
준후는 오늘 수술을 통해 되새겼다.
사실 뇌동맥류를 결찰할 클립을 찾지 못했을 당시 준후는 크게 당황했다.
스승의 비급에서도 이런 케이스는 없었다.
환자 뇌동맥류의 위치와 크기, 형태는 그만큼 희귀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무기, 즉, 무공과 내공으로 준후는 다시 한번 돌파구를 찾았다.
용조수(龍爪手).
준후가 클립을 구부리며 사용한 무공이었다.
용조수는 손가락에 내공을 불어넣어 철근처럼 단단해진 손가락으로 적의 육체를 꿰뚫는 지공(指攻)이었다.
준후는 용조수를 응용해 클립을 손쉽게 구부렸다.
클립이 써지컬 스틸, 특수 스테인리스강 소재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공은 치트키와 같은 존재였다.
치료는 물론이오 육체 강화에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서준후, 언제 차력이라도 배웠어?”
수술방 앞에 마련된 의료용 폐기물 정리대에서 시호가 물었다.
시호는 수술 가운과 수술모, 장갑들을 벗어 던지고 있었다.
다른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준후도 복장을 벗으며 대답했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어렸을 때부터 힘이 남달랐다고 하네요. 통뼈 소리도 많이 들었고.”
“아무리 통뼈라도 그렇지. 써지컬스틸을 맨손으로 구부려?”
“맞아요. 전 제 눈을 의심했다니까요?”
“나도 믿기지 않더구나.”
스태프들이 일제히 준후를 쳐다보며 놀라움과 의아함을 드러냈다.
“뭐,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냥 되는 거라서.”
준후는 오히려 뻔뻔하게 나갔다.
어차피 무공과 내공을 설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비슷한 경우가 자주 생길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난 원래 이런 놈이야’ 작전을 사용하는 게 유용해 보였다.
그럼 어줍잖은 이유나 핑계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을 테고.
“혹시 응급한 상황이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건 아닐까?”
잠자코 있던 성은이 말을 이었다.
“외국에서 어떤 엄마가 차에 깔린 아이를 구하던 도중 자동차를 혼자 한 번에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잖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난 다른 생각이 들었어. 준후, 너 혹시 최배달을 아니?”
민석이 최배달로 화제를 돌렸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네 세대면 모를 수도 있겠구나. 최배달은 극진 공수도의 창시자인 유명한 무도가지.”
민석의 설명에 따르면.
최배달은 전설의 무인(武人)으로 다양한 전설을 보유했다고 한다.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고 황소의 뿔도 부러뜨렸다는 소문이 있고.
마침 오늘 준후와 비슷한 케이스도 존재한다고 했다.
바로 동전 에피소드였다.
최배달은 맨손으로 동전을 구부렸다는 것이었다.
“와. 정말 저랑 비슷한 분이 계셨네요. 신기합니다.”
준후는 자못 놀란 척 대답했다.
자신의 활약을 다들 알아서 해석해 주니 이보다 더 고마울 때가 없었다.
준후가 과거 읽은 뇌 과학책에서.
뇌는 알아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했는데.
다들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듯했다.
준후의 활약을 두고 설왕설래하면서 스태프들은 수술실을 나왔다.
복도 좌우로 수많은 보호자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초조하고 날이 선 모습이었다.
준후도 저 끔찍한 기분을 알았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어머니가 지주막하 출혈로 수술할 때, 대기해 봤으니까.
1초가 10분 같고 희망과 절망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감정의 고저(高低)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보호자분.”
민석이 임산부 환자의 보호자인 남편에게 다가갔다.
민석을 알아본 보호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미래는 어떻게 됐습니까?”
“안심하세요. 아내분도 아이도 무사합니다. 수술은 잘 끝났어요.”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보호자가 민석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내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감격했는지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순간 준후는 보호자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과거의 준후도 어머니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왈칵 눈물을 쏟았었다.
동시에 신경외과의가 되어야겠다는 굳은 다짐도 했었다.
나는 잘하고 있는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스스로를 향한 질문에 준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 길은 멀고 험난했지만.
뇌종양 파트, 뇌혈관 파트, 정위신경 파트, 수부외과 파트, 외상외과 파트, 소아 신경외과 파트 등등.
정복해야 할 파트가 아직 많았지만 내공과 무공, 그리고 환자·보호자를 향한 진심만 있다면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준후는 수술 때문에 잠시 벗어두었던 성호의 팔찌를 다시 손목에 찼다.
형도 믿지?
나라면 할 수 있다는 거?
* * *
지하 1층 식당가.
민석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에서 시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성은은 분만 스케줄이 있어서 합류하지 못했다.
준후는 막 진동벨이 울려 커피를 가지러 간 참이었다.
“준후는 평소 성격이 어떠니?”
민석이 물었다.
준후가 없는 지금이야말로 준후 이야기를 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의국 스태프와 환자나 보호자에게도 다정다감한 성격입니다. 일 처리야 두말할 것도 없고요.”
“허허. 극찬이구나.”
“빈말이 아니라 저 말고 다른 스태프들 의견도 비슷할 겁니다.”
“그래? 그 정도란 말이지?”
민석은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레지던트 중 최고의 인재가 누구냐.
누군가 물으면 민석은 언제나 눈앞의 시호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호는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업무에 관해서는 칼과 같았다.
특히 어시스트 솜씨가 기가 막혔다.
시야 확보, 출혈 관리, 미세 처치 등등.
그래서 준후의 활약상이 들려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왔다.
준후가 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시호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준후와 함께하면서 마음이 차차 준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준후에게는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존재했다.
특히 수술 중 클립을 구부리던 모습을 떠올리면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오르고 팔뚝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교수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준후가 구부린 클립, 정말 괜찮을까요? 삼차신경 손상은 피했지만 다른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부작용? 무슨 부작용 말이니?”
“이를테면 준후가 구겨서 두꺼워진 클립이 모 동맥을 압박할 수도 있는 건 아닌지…….”
시호의 지적에 민석은 적잖이 감탄했다.
꽤 예리한 지적이었다.
민석도 수술 도중 그 부분을 각별하게 신경 쓰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문제없을 거다. 구긴 덕분에 클립이 다소 두꺼워졌더라도 모 동맥 방향과 클립 몸통 부분이 겹치지 않으니까.”
“…….”
“뭣하면 확인해 볼까?”
민석은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으로 PACS(영상전달시스템)에 접속해, 환자의 MRI 영상을 액정에 띄웠다.
요즘은 휴대폰으로도 웬만한 병원 업무는 다 볼 수 있었다.
“여기에 있는 회색 실선이 클립인데 후교통동맥하고 어긋나 있지? 혈관 압박은 걱정 안 해도 된단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아니, 잘했어. 수술 후에도 환자를 걱정하는 게 참 외과의니까 말이야.”
민석은 오히려 시호를 칭찬했다.
하지만 민석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했다.
시호의 진의는 준후가 구부린 클립이 환자에게 문제를 일으켜 준후가 죄책감과 실의에 빠지길 바랐다는 것을.
그러니까 시호는 환자를 걱정해서 질문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질문했다는 것을.
“그나저나 앞으로는 뇌동맥류 전용 클립을 넉넉하게 구입해둬야겠구나.”
민석이 혼잣말을 이어갔다.
“활용 빈도가 높은 코일 위주로 구입했더니 오늘처럼 특이한 케이스가 닥쳤을 때는 대처를 못 했어.”
“교수님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십니까?”
“머리털 나고 처음이야. 뭐, 그래서 외과의 생활이 지루하지 않은 거겠지만.”
“커피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준후가 자리로 돌아왔다.
민석과 시호에게 커피를 건넨 후 의자에 앉았다.
오늘 수술 성공의 일등공신이라서 그런지 준후가 평소보다 듬직해 보이는 민석이었다.
만약 준후가 어시스트가 아니었다면.
준후가 클립을 구부리지 않았다면.
수술은 1시간 이상 더 걸렸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민석은 준후 덕분에 양극성 소작기로 뇌동맥류를 지져서 뇌동맥류의 크기를 줄이는 위험한 시술을 피할 수 있었다.
위험한 길 대신 꽃길을 걸을 수 있었다.
“혹시 제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아까부터 귀가 간지러운 것 같습니다.”
준후의 너스레에 민석은 피식 웃었다.
“녀석, 감도 좋구나.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둘 다 생각해둔 전공은 있니?”
“저는 뇌혈관 파트 전공을 하고 싶습니다.”
시호가 먼저 대답했다.
“이유는?”
“뇌혈관 수술이 주는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응급 상황이 가장 많이 발생하기도 하고요.”
“암. 그렇고말고. 나도 그래서 뇌혈관 파트를 전공했지. 준후, 너는 어떠냐?”
“황당하고 건방진 소리로 들리시겠지만 저는 모든 파트를 다 정복하고 싶습니다.”
“모든 파트를?”
놀란 민석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신경외과를 통해 전공할 수 있는 파트는 크게 여섯 가지가 있었다.
뇌종양 파트.
뇌혈관 파트.
정위신경 파트.
수부외과 파트.
외상외과 파트.
소아 신경외과 파트.
한 분야만 파고들어도 끝이 없거늘, 준후는 모든 분야에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꿈이 거창해도 너무 거창했다.
“준후야, 혹시 박재현 교수를 아니?”
“네. 알고 있습니다.”
재현이 준후의 스승이었지만 준후는 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재현이 신신당부를 했기에.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인 박재현 교수가 트리플 전공이란다. 미국 최고의 신경외과 교수인 대니얼 교수도 트리플 전공이고.”
“…….”
“그런데 네가 헥사 전공을 하겠다고?”
“네. 전 할 수 있습니다.”
“허…… 너무 많은 걸 하려다가 죽도 밥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단다. 다시 생각해 보려무나.”
민석은 진심으로 준후를 걱정했다.
너무 높은 이상은 사람을 짓누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상에 짓눌려 폐인이 된 외과의를 민석은 아주 많이 지켜봐 왔다.
그 때문에 민석은 차라리 속물이 되는 길을 택했고.
“조언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뜻을 세웠고 뜻을 꺾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이상향 같은 이야기지만 저는 적어도 제가 관리하는 환자가 제 눈앞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사람이 죽는 걸 보는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일은 너무 지긋지긋합니다.”
준후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민석은 뼈저린 한(恨)을 읽어냈다.
어쩌면 저 한이야말로 준후를 성장케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부럽구나. 저 올곧은 마음.
나도 한때는 준후처럼 정의감과 희생정신에 불타오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그것들은 다 재가 되어버렸어.
지금의 난 실적과 승진에 묶여 버린 노예가 되어버렸지.
준후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보면서 민석은 준후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 올려다보다가 목이 빠질 것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누구 한 명쯤은.”
민석이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괜찮다면 나중에 대니얼 교수를 소개시켜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