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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27화 (227/424)

227화

제43장 괴력(2)

터벅. 터벅.

민석과 대화를 마친 후 준후는 시호와 신경외과 병동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뇌동맥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환자와 태아는 무사했으며 민석에게 칭찬도 들었다.

기분이 좋아야 마땅하건만 준후는 어쩐지 쑥스러웠다.

헥사 전공 이야기를 꺼내면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드러낸 것이, 마음의 상처를 드러낸 것이 민망했다.

급발진을 한 느낌이랄까.

아니, 차라리 잘한 걸지도 몰라.

상처일수록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야지. 일광욕도 시켜주고 그 존재를 기꺼이 인정해 줘야지.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준후는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검색창에 대니얼 교수를 검색해 봤다.

한글로 검색했는데도 대니얼 교수의 이력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미국 출신의 대니얼 교수는 메이유 병원 출신이었다.

전공은 당연히 신경외과.

스승이 뇌종양, 뇌혈관, 정위 신경의 트리플 전공인데 반해.

대니얼은 수부외과, 외상외과, 소아외과에서 트리플 전공이었다.

스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박재현 VS 대니얼, 세계 최고 신경외과 의사의 격돌, 과연 승자는?]

스승과 대니얼의 대결 구도를 다룬 기사도 있었다.

확인해 보니 낚시 기사였다.

2년 전 스승이 서로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 소아를 수술할 때.

대니얼이 한국에 방문에서 수술을 참관했다는 기사였다.

실제로 두 사람의 의학적인 견해가 달랐다거나, 서로가 잘났다고 싸웠다는 내용은 아니었다.

아오, 열 받네.

이러니까 기자가 아니라 기레기 소리를 듣지.

약이 오르긴 했지만 준후는 대니얼의 존재가 반가웠다.

스승 재현과 대니얼의 의학 지식과 관록.

그것들을 모조리 흡수하면 최강의 신경외과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민석이 대니얼과 친분이 있다는 것도 호재였다.

대니얼의 별명은 Mr. freak로 괴짜라는 뜻이었다.

괴팍한 성격 탓에 만나기 쉽지 않은 인물인데 민석의 도움을 받으면 그 문제도 해소할 수 있으리라.

대니얼의 기사를 읽으며 준후는 미국으로 날아가는 자신을 떠올렸다.

지금은 상상이지만 나중에는 현실이 될 그림을.

“뭔데 혼자 히죽거리냐? 같이 좀 웃자.”

잠자코 있던 시호가 입을 열었다.

“딱히 공유할 건 아니네요.”

준후는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시호의 본질.

그러니까 사이코패스 기질을 꿰뚫었기에 좋은 말이 나올 수 없었다.

“너 진짜 헥사 전공이 목표였어? 그건 몰랐네?”

시호가 화제를 돌렸다.

“왜요? 얼토당토않아 보여서요?”

“그런 생각은 안 했어. 오히려 너답고 생각했지. 넌 영웅 놀이 좋아하잖아.”

“아픈 사람을 최대한 많이 치료하고 싶다는 게 영웅 놀이입니까? 말씀이 심하시네요.”

준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시호의 삐뚤어진 화법에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렸다.

시호에겐 정을 주고 싶어도 도저히 정을 줄 수가 없었다.

단 1mg조차.

“근데 한 가지 명심해두는 게 좋아.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할 때 더 아프다는 거.”

“악담은 여전하시네요. 제가 망했으면 좋겠죠?”

“망한다기보다는 타락했으면 좋겠네. 타락한 영웅처럼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거든.”

“근데 이 기회에 뭐하나 물을게요.”

“뭐든지.”

“왜 내 앞에서만 가면을 벗죠?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착한 척을 하면서?”

준후는 세상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시호는 스태프들과 환자·보호자들에게 미소 천사로 불릴 만큼 잘 웃고 배려 넘치는 행동을 했다.

그런데 유독 준후와 대화할 때면.

본인의 어둠을 기꺼이 드러냈다.

그런 모습이 준후는 모순으로 느껴졌다.

위선을 떨 작정이면 끝까지 위선을 떠는 게 낫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으니까 굳이 위장할 필요가 없지. 에너지 낭비잖아?”

“대단한 위인 납셨네요.”

“아무렴 너만 하려고.”

“불쾌하네요. 저를 선배랑 같은 선에 두는 건.”

“전에도 말했을 텐데?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라고.”

시호가 빙긋 웃었다.

지금 맥락에서 어떻게 웃을 수가 있을까.

준후에게 시호는 여전히 수수께끼이자 불가사의였다.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마디 더 하죠.”

준후는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환자나 보호자에게 허튼짓할 생각 말아요. 아영이한테도요. 다 들었어요. 흉부외과까지 찾아가서 아영이 보고 왔다는 거.”

“…….”

“지금까지는 미꾸라지처럼 잘 피해왔지만 내 눈은 절대 못 속입니다. 만약 허튼짓하다가 걸리면 선배, 뼈도 못 추립니다.”

준후는 평소답지 않게, 아니, 준후답지 않게 시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바꿔 말하면 준후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와야 할 만큼 시호가 뿌리 깊은 악인이었던 것이다.

시호의 존재는 준후에게 늘 긴장과 불안을 선사했다.

“대답 안 해요?”

“…….”

시호가 준후의 시선을 피해 침묵을 지켰다.

부정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결국 한쪽이 쓰러져야 끝날 모양이었다.

* * *

그 날 저녁.

창밖이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밤 9시쯤 해서 준후는 신경외과 ICU(중환자실)를 찾았다.

ICU에서는 평소처럼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꼬릿꼬릿한 대 소변 지린내.

비릿한 피 냄새.

살이 문드러지면서 나는 퀴퀴한 냄새.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소독약 냄새를 제외하면 준후가 무림에서 수도 없이 맡아본 냄새였다.

준후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냄새였다.

무림에서 준후는 동료들의 죽음을 냄새로 기억했다.

“선생님 또 오셨어요?”

스테이션을 지나치는데 신효진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바쁘실 텐데 가끔은 인턴이나 경수 쌤도 보내시지.”

“저는 중환자실 체질인가 봐요. 강미래 환자는 좀 어때요?”

준후는 미래의 상태를 물었다.

미래는 오늘 뇌동맥류 클립 결찰술을 받은 임산부 환자였다.

“바이탈 정상이고 심전도, 산소포화도도 정상이에요. 순조롭게 회복 중이랍니다.”

“듣던 중 반가운 노티네요. 저 미래 환자 잠깐 키핑(keeping, 의사가 환자 곁에서 환자를 지키는 일) 좀 할게요.”

“키핑은 환자 상태가 안 좋을 때 하는 거 아닌가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효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좋아질 것 같을 때에도 할 수 있죠.”

“뭐, 준후 쌤이 키핑해 주면 저야 좋긴 하죠. 이상하게 준후 쌤이 키핑한 환자는 하나같이 회복이 빠르더라고요.”

“제가 약손이라서 그런가 봐요.”

농담을 하고 준후는 스테이션에서 의자 하나를 챙겼다.

미래의 침상으로 이동해 의자를 놓고 곁에 의자에 앉았다.

미래는 아직 의식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태아를 잉태한 배가 볼록하게 솟았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중환자실 환자 중 임산부는 미래가 유일했다.

준후는 미래를 응시하다가 미래의 손을 슬며시 감싸 쥐었다.

효진이 앞서 말한 것처럼.

준후의 키핑이 효과적이었던 것은 준후가 일부 중환자에게 기공치료를 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빠른 회복을 위해 준후는 미래에게도 기공치료를 할 작정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준후의 손에서 미래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준후의 세심한 유도에 따라 내공이 미래의 전신 혈맥을 속속들이 훑기 시작했다.

내공은 자연진기라고 하는 자연의 에너지였다.

상처의 회복과 치유를 돕는 효과가 있었다.

무림 고수들이 잠을 잊고.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하루아침에 회복하는 것도 풍부한 내공 덕분이었다.

무림인이라면 정·사파를 가리지 않고 영약이나 내단에 환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말이다.

팔 쪽에 혈맥을 뚫고 준후는 내공을 미래의 머리 쪽으로 보냈다.

왼팔 – 머리 – 오른팔 - 오른쪽 다리 - 왼쪽 다리 - 가슴 - 복부.

준후가 익힌 청풍심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내공을 운영하고 있었다.

내공으로 회오리 모양을 그리며 혈맥을 꿰뚫어주는 특징도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기공치료를 하고 싶더라.’

준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환자의 머리 쪽 혈맥을 뚫는 과정에서 이상 징후를 포착했다.

뇌척수액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장소가 있었다.

바로 제3뇌실과 제4뇌실이 맞닿는 통로 부분이었다.

해당 통로는 협착(좁아짐)상태였다.

환자가 임신중독증을 앓았고.

또 긴 수술을 받은 후유증으로 뇌실에 구조적인 변화가 생긴 듯했다.

뇌실 협착을 방치한다면 환자는 수두증을 앓을 확률이 있었다.

뇌척수액이 순환하지 못하면서 한 장소에 저류하게 되고.

이로 인해 뇌가 부어 뇌압이 상승하여 뇌에 대미지가 갈 위험이 존재했다.

최악의 경우 수술을 또 해야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수술 두 번은 절대 안 되지.

어떻게 해서든 내 선에서 막자.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필사적인 각오를 다지며 준후는 제3뇌실과 제4뇌실의 통로에 집중적으로 내공을 때려 박았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해당 장소에 내공으로 원을 그리면서 통로를 차츰 넓혀주었다.

내공의 흐름을 따라 뇌척수액도 같이 회전했다.

준후 덕분에 뇌실 통로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집중치료를 한 지 10분째.

뇌실 통로는 본래 형태를 되찾았다.

내공을 거두어도 통로의 폭은 넓게 유지되었고 뇌척수액의 순환도 한결 넉넉해졌다.

기공치료가 없었다면 발생했을 수두증을 사전에 완벽하게 제거한 것이다.

이렇게 치료를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를 않겠지.

아니, 아무도 알 수가 없겠지.

환자도 보호자도.

심지어 동료 스태프들도.

내공 치료를 할 때마다 준후는 외로움을 느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혼자 간직했기에.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서 치료를 한 것도 아니었고.

준후 자신만큼은 자신의 노고와 환자를 향한 정성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나를 속이지 않고.

내가 나를 알아주면 그걸로 족하다.

준후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뇌실 통로가 좁아져 있었던 것 이외에 환자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준후는 환자의 전신 혈맥에 내공을 보내는 작업을 다섯 번 정도 반복했다.

혈맥에 스며든 내공은 분명 환자의 회복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다.

장담컨대 내일 오후쯤이면 환자는 의식을 차리고.

모레쯤에는 일반 병실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준후가 지금까지 직접 모은, 기공치료를 해준 환자들의 빅 데이터를 감안하면 말이다.

“선생님,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준후 쌤도 고생하세요.”

기공 치료를 끝낸 준후가 중환자실을 나왔다.

내공을 소모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더니 준후도 노곤했다.

머리가 무겁고 팔다리도 무거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등가교환의 법칙이라고, 환자의 회복에는 태생적으로 의료진의 헌신이 소모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준후는 지친 걸음으로 가까운 휴게실을 찾았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휴게실은 을씨년스럽게 텅 비어 있었다.

탁!

준후는 가운에 넣어두었던 약함에서 영양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효과가 좋다고 소문난 비타민 B 영양제 비맥신 메타.

비타민 C.

타우린.

그리고 최근 추가한 홍경천까지.

꿀꺽!

정수기 종이컵에 물을 담아 영양제를 삼킨 후, 준후는 소파에 앉아 운기조식을 펼쳤다.

일주천 하는 내공과 함께.

전신 혈맥으로 스며드는 영양제의 성분들.

단 30분의 운기조식만으로도 준후의 신체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맞이했다.

피로가 씻은 듯이 날아간 것이다.

반나절을 푹 잔 것처럼 개운했다.

허리만 조금 불편해서, 준후는 소파에서 일어나 철판교를 펼쳤다.

철판교란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요원들의 총알을 피한 자세였다.

허리를 90도까지 꺾는 동작이었다.

천근추로 하체의 중심을 잡았기에 준후는 넘어지지 않고 한동안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뚜두둑!

준후는 시원한 뼈 소리를 들으며 허리를 다시 펴 신경외과 병동으로 상쾌하게 복귀했다.

영양제와 운기조식 조합은 역시 사기였다.

아니, 개사기였다.

고작 30분의 휴식으로 준후는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체력과 집중력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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