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제44장 후원(2)
“수고하셨습니다. 보호자분.”
준후가 보호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실시간 방송이 대성공으로 끝난 직후였다.
“수고야 제가 아니라 선생님이 다 하셨죠.”
“실시간 방송에 출연할 용기를 내셨던 것. 제게 귀중한 시간을 내주신 것도 엄청난 수고죠.”
“아이. 별말씀을…….”
보호자가 쑥스러워하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재은이도 고생했어.”
“저는 재밌고 신기했어요.”
“오구구구. 그랬어요? 우리 재은이 벌써 어른이네?”
재은이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준후는 빙그레 웃었다.
실시간 방송은 30분 정도로 짧게 끝마쳤다.
최대 시청자가 대략 3,000명에서 늘지 않았기에 길게 해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방송 시간에 비해서 후원금은 꽤 크게 모였다.
준후의 어림짐작으로는 대략 2천만 원 정도 되었다.
예상과 기대를 초월한 수익!
거대 뉴튜버의 슈퍼 채팅 수익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수익!
여기에 준후의 개인적인 후원금을 더한다면.
재은 가족은 한동안 돈에 쪼들리지 않고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단발성이긴 했지만.
준후는 자신의 성취에 만족했다.
때로는 낚시를 가르치기보다 당장 물고기를 주는 게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
“후원금은 조만간 내역서를 뽑아서 입금해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저희 집안 형편까지 생각해 주시고. 어째 매번 선생님께 신세만 지네요.”
보호자가 미안해하며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침상에 앉아 있던 재은이도 보호자를 따라 배꼽 인사를 했다.
병실을 나온 준후는 아영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받았다.
자신이 채팅창을 보는데 사용했던 아영의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고생했어. 아영아. 팔 아프지?”
“이 정도야 가뿐해. 1시간 넘게 흉부 절개창 견인도 해봤는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준후는 제 자리에서 섰다.
아영의 팔을 주무르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내공을 불어넣어 혈관을 확장시키고.
팟! 팟! 팟!
진통 점혈법으로 아영의 통증을 거짓말처럼 삭제해 버렸다.
“그러고 보면 준후 넌 참 신기해.”
“내가?”
“네가 손만 대면 긴장도 안 하게 되고 통증도 사라지잖아. 특히 저번에 모텔에서 허리 풀어준 거는 진짜 예술이었어.”
“…….”
“자세 교정도 됐고 근육통도 사라졌거든.”
“내가 원래 약손이잖아.”
“근데 채팅창은 어쩜 그렇게 잘 읽어? 실시간 방송은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영 입장에서는 신기할 만했다.
콸콸콸 쏟아지는 채팅들을 일일이 읽고 반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내가 원래 동체 시력도 끝내주지. 독수리도 울고 갈 수준이랄까.”
준후는 피식 웃었다.
압도적인 동체 시력의 근본은 당연히 무림에 있었다.
무림에서 동체 시력은 생명과 직결되었다.
상대가 휘두르는 무기,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단도, 차륜, 독침 등등의 암기.
이것들을 보고 피할 수 없다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무림의 경험과 비교했을 때 채팅창을 읽는 일은 숨 쉬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참고로 준후는 사천당문의 필살 오의인 만천화우도 파훼한 경험이 있었다.
“칫. 뭐만 하면 다 원래래. 이러다가 이름도 서원래로 바꿔야겠다?”
“바꿔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 아영이 너도 원래부터 좋아했거든.”
준후의 달달한 멘트에 아영이 쑥스러워했다.
두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참! 오후 스케줄은 어떻게 할 거야?”
“강남으로 가야지.”
“강남? 웬 강남?”
“다른 뉴튜브 채널하고 콜라보 하기로 했어. 콜라보만 해도 재은이 후원금을 지원하겠다고 하더라.”
준후는 나이스 댄싱 TV의 연락을 떠올렸다.
나이스 댄싱 TV.
아이돌 춤 커버, 창작 안무 등등.
다양한 댄스 동영상을 올리는 뉴튜브 채널로 구독자가 무려 150만 명에 달하는 곳이었다.
나이스 댄싱 TV는 한 달 전부터 준후에게 꾸준히 출연을 요청했고.
준후는 꾸준히 거절했다.
준후가 출연하면 분명 춤 대결 콘텐츠를 진행할 텐데.
그 경우 준후가 아니라 나이스 댄싱 TV가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준후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춤을 잘 춘다고.
동시에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왜냐하면…….
무공과 내공을 갖추면서 이미 초인의 경지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나이스 댄싱 TV에서 1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정말 콜라보 안 하실 건가요? 콜라보 방송 참여만 해도 환우의 후원금을 지급하겠습니다!!!!]
라이브 방송 도중.
준후는 나이스 댄싱 TV의 슈퍼 채팅을 확인했다.
조건이 이렇게 좋다면 콜라보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가자. 강남에서 데이트하다가 7시쯤 그쪽 스튜디오에 방문하면 될 것 같아.”
“응.”
준후는 아영과 병원을 나왔다.
그러면서 나이스 댄싱 TV가 지원할 후원금의 액수를 기대했다.
오늘만큼은.
나도 돈미새다.
* * *
강남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문성 빌딩.
빌딩의 2-4층은 나이스 댄싱 TV의 스튜디오였다.
민지는 3층 스튜디오에 딸린 개인 집무실에서 SNS를 하는 중이었다.
[춤추는 외과 의사 서준후님과의 실시간 콜라보 방송이 밤 7시에 진행됩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려요♡]
홍보 글을 다 올리고.
민지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준후와의 콜라보가 성사되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렸다.
민지는 준후의 팬이었다.
멋지고 지적인 외모.
젠틀한 말투.
외과의임에도 전문 댄서에 버금가는 춤 실력.
준후의 모든 것이 유니크하고 매력적이었다.
벌컥! 쿵!
갑자기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태영이 성난 표정으로 민지에게 다가왔다.
태영은 민지와 함께 나이스 댄싱 TV의 공동 대표였다.
“야, 왜 상의도 안 하고 막무가내로 일을 벌여? 외과 의사랑 콜라보하기로 했다면서? 그것도 쓸데없는 후원금까지 줘가면서?”
태영의 목소리에 잔뜩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전화했는데 안 받았잖아. 오후 내내.”
“그거야 어제 폭음해서 그런 거고. 어쨌거나 이런 중요한 일을 혼자 밀어붙이면 어떻게 하냐고.”
“오늘이 절호의 찬스였으니까.”
민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방금 SNS에 콜라보 공지 글 올렸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거야.”
“하여간 제멋대로라니까.”
태영이 씩씩거리며 민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좋게좋게 생각하자. 응? 우리도 슬슬 변화가 필요하다고.”
민지는 콜라보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강조했다.
최근 5개월 사이 업로드한 영상의 조회수가 급감하고 있었다.
구독자는 제자리걸음이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변화야 좋은데 그게 왜 외과 의사랑 콜라보 하는 걸로 이어지냐는 거지.”
“신기하잖아. 외과 의사인데 춤을 그렇게 잘 추니까.”
“X랄. 난 그 인간,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왜?”
“의사가 어떻게 우리랑 비슷한 수준으로 춤을 추냐고. 의대에서 공부하고 병원에서 근무하기 바쁜데.”
“…….”
“아마 동영상 편집했을 거야. 요새 그 뭐야, 딥 페이크인가 뭔가가 있다면서. 얼굴만 정교하게 편집하는 거.”
“…….”
“그 인간이 딥 페이크 사용했다는데 내 오른손목을 건다.”
태영의 지적한 의혹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민지는 생각했다.
실제로 민지도 태영과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준후의 뉴튜브 댓글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공통적인 의견은 이것이었다.
의사치고는 너무 전문적으로 춤을 잘 춘다.
영상을 조작했을 확률이 크다고.
하지만 민지는 준후를 신뢰하는 쪽이었다.
저칼로리 딸기 잼 폭로.
매스컴에서 기사로 다뤘던, 수많은 응급 환자를 구했던 전적 등등.
정의로운 준후가 굳이 댄스 영상으로 사기를 칠 이유가 있을까.
민지는 없다고 판단했다.
“원래 춤에 재능이 있었나 보지.”
“재능은 개뿔.”
“하여간 오늘 방송 끝나고 내 손목이 무사하길 기원해 줄게.”
민지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 * *
그 날 오후.
준후는 아영과 영화를 보고, 스티커 사진을 찍고, 서점을 방문하고, 수족관 데이트도 즐겼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병원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행복이기도 했다.
하루가 너무 달콤했기 때문일까.
준후는 전쟁터와 같은 외과 생활을 청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까지 느꼈다.
병원 밖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아픈 사람도, 죽어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고 또 여유로워 보였다.
따라서 준후가 긴장할 이유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벽해 보였다.
아니야.
그래도 사람을 살리는 일은 내 의무이자 사명이자 천직이야.
무공과 내공.
나만 가지고 있는 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일은 역시 외과 의사밖에 없어.
준후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초심으로 돌아갔다.
무림에서 죽어간 동료들과 현대에서 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졌던 성호를 떠올렸다.
“슬슬 곱창 먹으러 갈까?”
“좋아!”
팔짱을 낀 채 곁에서 걷던 아영이 아이처럼 신나게 대답했다.
오후 6시,
늦가을이라 해가 빨리 떨어졌다.
올려다본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강남역 인근은 퇴근하는 샐러리맨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준후는 매의 눈으로 식당들을 훑다가 손님이 많아 보이는 곱창집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모둠 곱창 4인분을 주문했다.
식당은 벌써 절반 넘게 손님이 차 있었다.
치이이익.
테이블 곳곳에서 곱창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불판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조차 맛있어 보였다.
준후의 맞은편 테이블에는 한 쌍의 중년 남성이 소주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아영아. 곱창이 그렇게 좋아?”
종업원이 내온 곱창을 불판에 올리며 준후가 물었다.
“응. 내 최애야.”
“난 느끼해서 많이 못 먹겠던데.”
“그게 매력이지. 고소한 게 얼마나 맛있는데. 물릴 때쯤이면 소스에 찍어 먹어도 되고.”
“그럼 다음에는 내가 곱창 맛집 알아볼게. 맛집 곱창은 뭐가 다른지 궁금하네?”
“나야 대환영이지.”
아영이 밝게 웃었다.
문득 아영의 등 뒤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는 듯했다.
아무래도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모양이었다.
“근데 준후야 뉴튜브 콜라보 괜찮겠어?”
“왜?”
“그 사람들, 왠지 의도가 불순해 보여. 괜히 너 불러내서 망신 주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아영이 우려를 표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외과 의사가 댄스 챌린지 영상으로 조회수를 쪽쪽 빨아 먹고 있으니까 배알이 꼴렸을지도?”
“그럼 왜 허락했어?”
“첫째로는 재은이 후원금 때문이고. 둘째로는 망신 안 당할 자신이 있어서지.”
“상대가 전문 댄서들인데 괜찮을까?”
“걱정 마. 날 상대하려면 마이클 잭슨쯤은 되어야 하니까.”
준후는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패배라는 단어는 준후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곱창이 다 익으면서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곱창 매니아인 아영이 곱창에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준후는 그런 아영을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앞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중년 남성 둘의 대화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서창환이 많이 죽었구먼. 벌써 취했어? 아까부터 왜 말을 못 해?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가지고.”
“아…… 아…… 그…… 게……”
“잔부터 빨리 비워. 기다리다가 술 상하겠어?”
준후는 맞은편 테이블에 있는 서창환이란 사내에게 주목했다.
창환은 팔을 덜덜 떨며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쨍그랑!
하지만 잔은 입에 닿지 못하고 식당 바닥으로 추락했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