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제44장 후원(4)
나이스 댄싱 TV와의 콜라보 촬영은 안 하면 손해다.
준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로 나이스 댄싱 TV 측은 댄스 대결에서 이기면 재은이에게 후원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현재의 준후가 누구인가.
돈미새 모드의 준후 아닌가.
후원금을 거저 준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둘째는 준후의 뉴튜브 채널을 위해서였다.
이 기회에 150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해당 채널의 구독자에게 눈도장을 찍으면 개이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가 업로드하는 댄스 챌린지 영상.
이것을 합성이라 비판하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기회이기도 했다.
[띵동~ 4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상념이 물러갔다.
준후는 정면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어? 서준후 님 맞으시죠?”
접수대에 있던 직원이 아는 척을 했다.
“저를 아세요?”
“그럼요. 모르면 간첩이죠. 근데 옆에 계신 분은…….”
“애인입니다.”
“아…… 애인 있으시구나. 콜라보 촬영 때문에 오셨죠? 이쪽으로.”
직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안무 연습실이었다.
4층이 안무 연습실.
3층이 사무실인 듯했다.
안무실에서 30여 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박자가 빠르고 신나며 강렬했다.
노래에 맞게 댄서들의 동작들도 격렬했다.
이들이 오랫동안 합을 맞춘 전문가라는 사실을 준후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무림에서도 합진이라는 무공이 존재했다.
속된 말로 하면 다굴이랄까?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다굴이라면 당연히 소림의 백팔나한진이었다.
-무량수불. 백팔나한진은 단 한 번도 파훼 당한 적이 없다네. 정파 무림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지.
언젠가 접견한 소림 방장이 준후에게 한 말이었다.
아니, 108명이 덤벼서 싸우는데 그럼 지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당시의 준후는 그렇게 되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잠깐 잠깐. 스톱! 손님 오셨다.”
준후를 발견한 한 여성이 허공에 박수를 쳤다.
이에 음악이 꺼지고 춤이 멈췄다.
크루들의 시선이 일제히 준후와 아영에게 향했다.
“저 많은 사람이 쳐다보니까 왠지 무서운데?”
“걱정 마.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아영이 넌 내가 무조건 지킬 수 있어.”
“올~ 좀 멋있다.”
“아영이 네 남자친구 하려면 그 정도 스펙은 있어야지.”
“안녕하세요. 콜라보 제안한 나이스 댄싱 TV의 공동 대표 강민지입니다.”
“공동 대표 성태영이에요.”
민지와 태영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준후는 아영과 함께 두 사람과 통성명을 나눴다.
“평소에도 섭외를 계속 거절하시길래 오늘도 거절하실 줄 알았어요.”
“환자 후원금을 주신다는데 안 올 수가 있어야죠.”
“이참에 후원금 이야기를 해볼까요?”
민지가 설명에 나섰다.
준후가 태영과의 댄스 배틀에서 승리 시!
환자에게 500만 원을 후원한다.
오늘 방송 중 슈퍼 채팅 및 도네이션으로 들어온 금액도 후원금으로 지급한다.
단 패배 시!
후자의 금액만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좋습니다. 그만하면 만족해요. 그런데 저기는 뭐 하는 곳인가요?”
준후가 검지로 연습실 한쪽을 가리켰다.
몇몇 크루들이 작은 방을 드나들고 있어서 호기심이 생겼다.
“의상실 겸 소품실이에요.”
“그렇군요. 스튜디오가 넓고 깔끔하네요. 연습하실 맛, 나겠어요.”
“그래서 유지비도 많이 든답니다. 돈 먹는 하마예요.”
민지가 고충을 털어놓고 쓴웃음을 지었다.
“근데 선생님, 무슨 깡으로 오셨어요?”
잠자코 있던 태영이 삐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후를 향한 눈빛도 곱지 않았다.
“여기는 깡 없으면 못 오는 곳인가요?”
“선생님의 춤 영상이요. 춤추는 사람은 따로 있고 선생님 얼굴만 합성한 거라는 소문이 있는 건 아시죠?”
“오늘 방송에 나가면 실체가 까발려질지도 모른다. 뭐 그런 의미입니까?”
“네. 정확해요. 오늘 방송, 실시간이에요. 편집 같은 건 못할 겁니다.”
“제가 바라던 바예요.”
준후는 짧게 대답했다.
눈앞에 태영도 준후를 의심하는 사람 중 한 명인 듯했다.
하지만 준후는 태영을 딱히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외과 의사가 전문 댄서처럼 춤을 잘 추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야. 손님 모셔놓고 무슨 실례야.”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전 괜찮습니다. 방송 진행하시죠.”
준후가 두 사람을 말리면서 다툼은 의외로 금방 끝났다.
이윽고 방송 카메라와 조명이 세팅되기 시작했고.
크루들은 카메라 밖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아영도 준후에게 파이팅을 해주고 크루들 근처로 이동했다.
“트이치 하고 뉴튜브 송출 준비 끝났어?”
“네. 지금 켤까요?”
“잠깐만. 선생님. 준비되셨죠?”
“준비야 스튜디오 들어올 때부터 끝났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그럼 시작합니다. 선아야 방송 켜.”
“네. 시작합니다.”
딱!
방송 스텝이 손가락을 튕겼다.
“안녕하세요. 라이브 방송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다들 보고 싶었어요.”
민지가 자연스럽게 방송을 진행했다.
준후를 섭외한 이유와 배경, 오늘의 컨텐츠를 차례대로 설명했다.
“준후 선생님. 자기소개와 간단한 출사표 부탁드릴게요.”
“춤추는 외과 의사 서준후입니다. 좋은 컨텐츠에 초대받아 영광이고요. 오늘 댄스 대결에서 무조건 승리하겠습니다.”
“…….”
“오늘 여러분이 하시는 슈퍼 채팅과 도네이션은 전부 환자분의 재활 및 생활비에 사용되니까 아낌없이 팍팍 쏴주세요.”
준후는 돈미새의 풍모를 물씬 드러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목적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재은아. 선생님이 널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산다. 그러니까 수술 무사히 잘 받고 건강하게 회복하자.
“그럼 태영이도 한마디 해봐.”
“의사는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각오하세요.”
태영의 도발 섞인 멘트에 채팅창이 후끈 달아올랐다.
크루들 사이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지금부터 서준후 선생님과 태영이의 댄스 배틀을 시작하겠습니다!”
* * *
첫 번째 댄스 배틀 종목은 춤 암기였다.
오늘 저녁 따끈따끈하게 발매된 보이 그룹 서렌더의 2집 미니앨범에 수록된 타이틀 곡.
도망쳐(run away).
이 곡의 댄스를 보고 암기한 만큼 추는 것이었다.
-이건 전문 크루들도 빡센 거 아님? 외과 의사가 할 수 있음?
-후원금 안주겠다는 거네. ㅋㅋㅋ
-밸런스가 너무 안 맞아요 ㅜㅜ
채팅창 민심이 요동치자 민지가 해명에 나섰다.
“댄스 대결은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예요. 승자는 여러분의 투표로 결정되고요.”
“…….”
“준후 선생님에게도 충분히 승산 있어요.”
“…….”
“선아야 태블릿 좀.”
“네.”
방송 스텝이 카메라 앵글로 들어와 준후와 태영에게 각각 태블릿 PC를 건넸다.
‘이 정도면 껌이군.’
태블릿으로 영상을 확인하고 준후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무림 출신인 준후였다.
준후는 춤동작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매끄럽게 이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서씨세가의 대표 검법인 청풍검법.
이것은 총 36가지의 초식으로 구성되는데 다 펼치는 데 10분이 걸렸다.
그러니 4분짜리 동작들을 간파하고 암기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제가 먼저 하죠. 선생님은 영상 좀 더 보고 계세요.”
“그러세요.”
뚜두둑. 뚜두둑.
태영이 좌우로 고개를 꺾으며 앞으로 나갔다.
태영은 준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후는 잘 생긴 데다가 학벌도 좋고 심지어 자신의 전문 영역인 댄스까지 넘보고 있었다.
곱게 보려야 도무지 곱게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설치고 다니는 것도 오늘이 끝이야. 이 자리에서 아주 개망신을 시켜주겠어.
각오를 다진 태영이 방송 스텝에게 턱짓을 했다.
신호를 읽은 스태프가 음악을 재생했다.
따다다단~
비장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후렴구이자 후킹 구간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난 널 피해서 지구 반대까지 도망쳐. 네 찬란함이 내 눈을 멀게 해. 요동치는 심장, 내 숨을 멎게 해. 사랑은 이렇게 알다가도 모르지.]
태영은 박력 있는 동작으로 암기한 안무를 소화했다.
발재간은 제비처럼 날랬다.
안무의 연결 구간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10년간 댄스계에 몸을 담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물론 중간중간 위험구간이 존재하긴 했다.
1절 후렴구 직전의 브릿지 부분이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쌓은 경험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안개처럼 흐릿한 안무를 노래 가사로 보충하며 위기 탈출에 성공했다.
“전 여기까지입니다.”
1절을 멋지게 소화하고 태영은 준후와 민지의 사이에 위치했다.
더운 숨이 나오고.
옷이 땀에 젖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태영 쌤. 절 가져요. 엉엉.
-와! 10분 만에 1절을 거의 다 외우셨네요. 괴물이다 괴물.
-어우태(어차피 우승은 태영이라는 뜻)!!!!
채팅창의 후끈한 반응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준후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태영을 이길 수 없었다.
준후에게 남은 건 망신뿐이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실래요?”
태영이 준후를 도발하며 물었다.
“농담이 심하시네요. 포기할 사람이 누군지는 본인 눈으로 확인하세요.”
준후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섰다.
“지가 무슨 마이클 잭슨이라도 돼?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다 생각해둔 게 있겠지.”
“너 설마, 밸런스 맞춘다고 대결 종목 미리 알려줬어?”
태영이 가자미처럼 가느다란 눈빛으로 민지를 응시했다.
“적당히 해라. 내가 주작 혐오하는 거 알잖아.”
“뭐. 그럼 내가 무조건 이겼네.”
태영은 자신의 낙승을 확신했다.
준후는 안무를 대충 따라 하다가 중간에 이상한 막춤 같은 것을 추지 않을까 싶었다.
실력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
코믹함으로 어필해 투표를 얻어낼 계획일 것이다.
“음악 주세요.”
준후의 부탁에 음악이 재생되었다.
“…….”
“…….”
그리고 준후의 안무가 시작되면서 연습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민지도, 태영도, 크루들도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준후가 정공법으로 안무를 소화했던 것이다.
절도 있는 춤선.
동작마다 시원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팔과 다리.
박자를 제 옷처럼 가지고 노는 동작 등등.
누구도 말하지 못했지만 누구나 알게 되었다.
준후의 안무가 태영을 훌쩍 뛰어넘고 있음을.
씨X! 말도 안 돼!
이쯤 되면 외과 의사가 취미 아니야?
10분 안에 안무를 어떻게 저렇게 숙달하지?
준후를 지켜보며 태영은 경악하기 바빴다.
게다가 방금 막 선보인 준후의 후렴구 안무가 대박이었다.
앞으로 바닥까지 엎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고난이도 동작.
준후는 이것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태영은 까맣게 몰랐겠지만,
준후가 무림에서 뇌려타곤이라는 불리는 회피술의 이치를 담아서 안무를 펼쳤던 덕분이었다.
심지어 준후는 태영이 펼치지 못한 2절 안무까지 완벽하게 펼쳐내는 데 성공했다.
“쑥스럽지만 제 생각엔 한 군데도 안 틀린 것 같네요.”
안무를 A to Z까지 소화한 준후가 민지와 태영의 곁으로 돌아왔다.
“…….”
“…….”
그때까지도 준후가 남긴 충격이 연습실을 사로잡고 있었다.
채팅창마저 물음표로 도배 되어 있었다.
“민지 씨. 진행 안 하세요?”
“아. 네. 사전에 말씀드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안무를 통째로 암기하셨어요?”
경악한 민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평소 암기력이 좋은 편입니다.”
“이 정도면 그냥 좋은 수준이 아니라 천재 아닌가요?”
“뭐, 천재까지야…….”
준후는 대화를 하면서 뉴튜브 채팅창과 트이치 채팅창을 살폈다.
방송 시작 30분이 지났건만.
슈퍼 채팅과 도네이션을 합친 금액은 10만 원이 되지 않았다.
현재 돈미새 모드인 준후에게는 영 못마땅한 상황이었다.
“투표 진행하는 막간에 개인기를 보여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민지의 허락을 받은 준후는 곧바로 무중력 댄스를 선보였다.
무중력 댄스.
이것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선보였던 춤으로 몸을 45도 각도로 기울이는 동작이었다.
사실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특수 신발과 특수 장치가 필요했지만.
준후에겐 무공이 있었다.
준후는 천근추로 발바닥에 무게 중심을 잡았다.
발바닥에 흘려보낸 내공으로 흡(吸, 빨아들일 흡)자 결을 펼쳐 발바닥을 지면에 고정시키기도 했다.
준비가 끝났으므로.
준후는 상체를 45도로 숙였다.
보통이라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맞았지만 준후는 45도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했다.
다시 한번 뒤집히는 연습실.
대혼란에 빠진 채팅창.
“여러분의 슈퍼 채팅과 도네이션은 전부 재은이를 위해 사용됩니다. 많은 후원 부탁드립니다.”
[네오 님이 2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외과 의사. 돈미새. 아이돌 댄스 커버. 무중력 댄스. 끔찍한 혼종이네요. ㄷㄷㄷ.]
[비타 50,000 님이 5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료 후원의 행진.
준후는 남몰래 씨익 웃었다.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