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제44장 후원(5)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민지와 태영이 인사를 건넸다. 특히 태영은 준후에게 다가와 악수까지 청했다.
처음과는 180도 바뀐 공손한 태도,
현장에서 준후의 춤 솜씨를 확인하고 준후를 인정한 모양이었다.
“진짜 외과 의사가 취미 아닙니까? 춤을 너무 잘 추시는 데요?”
“하하하. 운 좋게 재능 같은 걸 타고났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중력 댄스도 말이 안 되는데 2라운드에서 보여주신 그 춤은 환상적이었어요.”
태영이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망의 댄스 배틀 2라운드는 자유 안무였다.
본인이 원하는 춤을 1-3분간 추면 됐다.
준후의 선택은 검무(劍舞)였는데.
소품실을 찾아 전통 한복 같은 복장을 챙겨 입었다. 장난감 칼을 들고 청풍검법의 1초식부터 4초식을 펼쳤다.
무림 출신이라서 그런지 현대에서도 꾸준히 검에 갈증을 느꼈던 탓이었다.
-미쳤다. 무협 영화의 나오는 주인공 같아요.
-눈 호강 제대로 하네. 이걸 실시간으로 본 내가 승자다!!!!!
검무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민지와 태영도, 크루도, 시청자들도 귀신에게 홀린 듯 준후에게 홀려 버렸다.
극찬이 쏟아지고.
경악에 물들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무림에서도 조화경의 경지에 오른 초고수의 검법을 견식하기 힘든 판국인데.
현대에서야 오죽하겠는가.
검무의 활약으로 준후는 2라운드마저 태영을 발라 버렸다.
3라운드도 마찬가지였다.
태영이 제아무리 일류 춤꾼이라고 한들 소용없었다.
준후는 인류 최강의 피지컬에 내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태영은 처음부터 적수가 안 됐다.
“다른 부탁은 좀 하기 힘들 것 같고. 무중력 댄스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
“특수 신발하고 장비 없이 펼친 게 너무 놀라워서요.”
태영이 눈을 반짝거리며 부탁했고 준후는 난감했다.
천근추와 내공심법 + 흡자 결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제 체형이 특이 체형이라서 가능한 거거든요.”
“무슨 체형이신데요?”
“발목 관절이 잘 꺾이는 체형입니다. 그래서 일반인 분은 소화를 못 해요.”
“너무 아쉽네요.”
실망하는 태영을 보며 준후는 오히려 안심했다.
임기응변치고는 퍽 괜찮은 해명이었다.
“선생님. 저희 스태프가 오늘 슈퍼 채팅하고 도네이션 비용을 합산해 봤거든요?”
“아, 벌써요?”
준후는 쫑긋 귀를 세웠다.
돈미새 모드라서 돈에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저희가 라이브 방송을 한 이래로 가장 많은 후원을 받았네요. 무려 800만 원이나 찍었습니다.”
“진짜 많이 받았네요.”
“준후 쌤 오전 라이브 방송을 못 본 준후 쌤 구독자들이 후원을 많이 해주셨더라고요.”
민지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흘 내로 수수료 제외하고 보내드릴게요. 승리 수당 500만 원 포함해서요.”
“너무 급할 필요 없습니다. 정산도 안 받았는데 슈퍼 채팅 금액을 주신다니.”
“어차피 드릴 돈인데요. 뭐.”
“이렇게 친분도 쌓았는데 앞으로 종종 콜라보 영상도 찍죠.”
“저희야 대환영이에요.”
잡담은 곧 마무리되었다.
준후는 민지, 태영과 작별 인사를 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까만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준후의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떠났다.
찌르~ 찌르~ 찌르~
인근 공원에서 청아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완벽한 밤.
나이스 댄싱 TV와의 콜라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후원금을 두둑하게 챙겼고.
준후의 헤이터들, 그러니까 뉴튜브 채널에 업로드한 춤 동영상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이스 댄싱 TV의 구독자가 준후의 채널에 흥미를 느끼고 방문한다면 뉴튜브 채널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즉 준후 입장에서는 콜라보 방송으로 일거삼득의 효과를 얻은 셈이었다.
준비는 다 끝났어.
이제 남은 건 제일 중요한 수술뿐이구나.
하긴 후원금이 아무리 많아도 수술에 실패하면 말짱 도루묵이지.
수술 전까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손의 감각도 최상으로 끌어올리자.
“준후야. 춤 대결할 때 너 진짜 멋있더라.”
“아영이 네 남자친구라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세상에 이런 남친이 또 있을까 싶네.”
“아영이 너 같은 여친도 없어.”
준후는 곁에서 걷는 아영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아영의 다정함과 배려는 준후가 가진 무공과 내공보다 절대 못 하지 않았다.
동기이지 형인 성호의 뇌사 소식을 들었을 때.
준후를 일으킨 건 무공도 내공도 아니었다.
바로 아영이었다.
“1시간 넘게 서 있느라 피곤했지? 갈 때는 택시 타고 가자.”
“좋아.”
준후가 휴대폰을 꺼내 택시 앱을 작동시키려는데 아영이 화제를 돌렸다.
“나 어떻게 저장되어 있어? 갑자기 궁금하네?”
“보여줄까?”
준후는 아영에게 휴대폰 주소록을 보여주었다. 부모님 다음으로 저장된 아영의 이름은 이랬다.
아영♡
“그래도 다행이네. 정 없게 풀네임으로 저장했을 줄 알았거든.”
“하하하. 그렇지?”
준후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사실 아영의 이름에 하트를 붙인 지는 1주가 채 지나지 않았다.
본래 준후는 ‘아영이’라고 아영을 저장해 놓았다.
애칭을 사용하기에는 어쩐지 쑥스러웠던 것이다.
-야, 살고 싶으면 이름 뒤에 하트라도 붙여. 나중에 아영이가 알면 노발대발한다?
그러다 경수가 우연히 준후의 주소록을 보고 조언을 해주었고.
준후는 조언을 따랐다.
그 결과 오늘 참사(?)가 벌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었다.
“근데 그걸로는 내 성에 안 차. 내 휴대폰 볼래?”
아영이 본인 휴대폰의 주소록을 준후에게 내밀었다. 저장된 준후의 이름은 ‘내 사랑♥’이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그럼 나도 내 사랑에 하트 붙일까?”
“똑같으면 재미없잖아? 내가 직접 바꿔줄게. 생각해 둔 게 있거든.”
아영이 빙긋 웃으며 준후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새롭게 저장된 아영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울 애기♥
* * *
“휴,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진짜 져버렸네. 완패다, 완패.”
태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며 연습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방송 세팅을 정리하고 있었다.
태영 곁에는 민지가 있었다.
“나도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너를 한 50퍼센트 정도만 따라가도 준후 쌤이 대단하다고 할 생각이었거든.”
“채팅창 반응은 어땠어? 중간에 멘탈이 나가서 확인 못 했는데.”
“걱정 마. 너 까는 사람은 없었어. 대부분 준후 쌤이 넘사벽이라는 반응이었거든.”
“아우. 쪽팔려. 춤만 10년 넘게 췄는데 외과 의사한테 발려 버렸으니…….”
태영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머리카락이 까치집처럼 엉망이 되었다.
라이브 방송을 하는 도중.
태영은 그야말로 강렬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처음에는 준후를 무시하고 얕잡아보았고.
준후에게 조금씩 감탄하다가.
순간 시기하고 질투도 하다가.
마지막으로 감탄과 존경을 느꼈다.
고작 10분 만에 아이돌 안무를 다 외우고, 마이클 잭슨의 무중력 댄스를 장비 없이 복사하고, 소품용 검으로 현대 무용 같은 아름다운 검무를 선보이는 데는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다 잊고 훌훌 털어버려.”
“그게 되겠냐? 뉴튜브 영상이나 SNS에 박제될 게 눈에 뻔한데?”
“네가 졌으면 대한민국에 준후 쌤 이길 사람 없어. 나도 마찬가지고.”
“그 말은 조금 마음에 드네.”
태영이 힘없이 웃었다.
민지의 위로에도 준후가 남긴 후유증은 쉽게 치료되질 않았다.
전문 댄서가 외과 의사와의 춤 대결에서 패배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다음 주에 있는 댄서 크루 모임에서 고개도 못 들 것 같았다.
“정 억울하면 다음 달에 자리 한 번 더 마련할까? 복수 콘텐츠 진행할래?”
“다시 해도 절대 못 이겨. 격차를 확실하게 느꼈거든.”
“승부욕의 화신, 성태영이 웬일이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근데…….”
태영이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
“준후 쌤한테 대결 콘텐츠 사전에 알려준 거 아니지?”
“야! 아니라고 했지! 사람 우습게 만들 거야! 나 눈깔 뒤집히는 거 보고 싶어?”
“알았어. 미안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하는 소리야.”
민지가 불같이 화를 내자 태영이 깨갱했다.
눈깔이 뒤집힌 민지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눈깔사탕이겠는가.
“우리 팀 SNS 봤는데 반응은 대체로 좋더라. 오늘 콘텐츠가 신선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어.”
“…….”
“앞으로 콜라보 자주 해야겠다.”
“그게 다 내가 흘린 피로 만들어진 거 알지?”
“암요. 알다마다요. 기분 꿀꿀할 테니까 고기나 먹으러 가자.”
“고기 먹을 기분 아니거든?”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몰라? 잔말 말고 따라와!”
민지가 억지로 팔을 당기는 바람에 태영은 반강제로 건물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그런데 다른 건 다 떠나서.
무중력 댄스는 진심으로 배워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려나?
무중력 댄스에 자꾸 미련이 남는 태영이었다.
* * *
며칠 뒤 새벽.
당직 근무 중인 준후는 신경외과 병동 당직실에 있었다.
쥐죽은 듯 고요한 당직실.
반쯤 걷힌 틈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흘러들어왔다.
준후는 창가 아래서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서씨세가를 대표하는 청운심법을 운용 중이었다.
청운심법은 9파와 5대세가의 심법에 뒤처지지 않는 훌륭한 심법이었다.
초대 가주인 서원평이 창안한 심법인데 서원평은 서씨세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쓰으읍.
준후는 깊은 들숨으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자연진기를 흡수했다.
흡수한 자연진기를 기경팔맥과 12경맥으로 찬찬히 흘려보냈다.
후우우.
깊은 날숨으로 몸 안에 축적된 탁한 기운을 바깥으로 흘려보냈다.
토납법(호흡법)에 집중하면서.
준후는 청운심법의 구결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가는 듯이, 또 머무르는 듯이.
흩어지는 듯이, 또 모여드는 듯이.
순백색으로 고결한 듯이, 또는 먹빛으로 타락한 듯이.
마음에 구름을 담으면
마음도 구름이 된다.
생과 사와 만물의 변화가 모두 이 몸 안에 있으니.
멀리서 찾을 것이 없다.
오성에 눈을 뜬 순간, 그대는 구름이 될지어다.
구름이 그대가 될지어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 청운심법의 구결을 되뇌던 중.
“……!”
준후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찰나의 변화에 흠칫 놀랐다.
잠깐이지만 몸이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반가운 징조였다.
청운심법의 이치를 터득한 순간.
공중부양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무림의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이 불완전했을까.
심법수련을 더 해도 몸이 떠오르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맞는 모양이네. 오늘 느낌을 잊지 말고 기억해두자.
현경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어.
큰 깨달음을 얻어서.
더 많은 환자를 살려내겠어.
준후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 묻은 가운을 툭툭 털어내고.
벽에 걸린 달력을 응시했다.
준후의 비장한 눈빛이 오늘 날짜에 그려진 빨간색 동그라미에 머물렀다.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는 재은이의 수술 날.
그 날이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