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41화 (241/424)

241화

제46장 모겐족(1)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복도 끝에 서 있던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시력이 10.0이라고 밝힌 일은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넘어 경악을 받을 행동이었다.

50미터 거리에 있는 1.5mm 글씨나 숫자를 읽을 수 있다?

세상에 누가 그런 말을 믿을까?

사실은 준후도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준후에게 필요한 건…….

주변의 적당한 관심과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준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수술은 실패할 것이다.

수리 기사가 도착할 때까지 뇌혈관이, 아니, 재은이가 버틴다는 보장이 없었다.

수술의 마침표를 직접 찍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무공의 기적을 어디까지 노출해야 할까.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허공답보(공중을 걷는 보법의 일종)를 펼쳐도 될까.

그럼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할까.

타인에게 선보일 수 있는 무공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준후는 새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 너무 멀리 보지 말자.

당장 눈앞에 있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야.

내가 가는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이 되어줄 테니.

지이이잉.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준후는 철우의 전화를 받았다.

-자칭 모겐족 준후 씨. 뭐가 적혔는지 맞춰 보세요. 빨리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준후는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눈동자에 담았다.

내공이 몰리면서 눈동자가 달군 쇠처럼 뜨거워졌다.

준후는 파(波, 물결 파)자 결을 운영하면서 내공을 정면으로 쏘아냈다.

복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점심시간 근처였던 데다가 스태프 대다수는 수술 중이었고 보호자들은 대기실에 앉아 있어서였다.

그중 시야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존재했지만 상관없었다.

준후는 사람들의 틈을 꿰뚫고 종이를 볼 자신이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뜸을 들여? 이제 좀 아차 싶지? 괜히 나섰다고 후회되지?

“후회요? 전 그런 회는 안 먹습니다. 참치회로 부탁드릴게요.”

-미친……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하네? 확실히 넌 회까닥 돈 게 맞아.

“네. 맞아요. 돌았습니다. 재은이를 살리고 싶어서.”

복도를 걷고 있던 두 사람 사이로 준후는 보았다.

철우가 들고 있는 종이, 그 종이에 적힌 숫자를.

아주 크고 또렷하게.

“숫자 7이네요.”

-…….

“아니라고는 말 못 하시네요?”

-너 뽑기 운이 좋다. 행운의 7이라서 그냥 골라본 거 아니야?

“운으로 환자를 살릴 순 없죠. 진짜 시력이라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숫자를 1-100까지 적어보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거든? 잠깐만 기다려.

철우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등을 돌려 무언가를 적어갔다.

여전히 준후를 불신하는 태도.

하지만 준후는 철우를 충분히 이해했다.

준후가 지금 하는 행동은 엄연히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를 쉽게 믿는다면 오히려 지능을 의심해야 했다.

-적었어. 맞춰봐.

“네.”

내공으로 증폭한 시력으로 준후는 어렵지 않게 포스트잇에 적힌 숫자를 맞췄다.

숫자는 ‘82’였다.

그 후로도 시험은 10번 가까이 진행되었다.

준후는 테스트를 100퍼센트의 확률로 통과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조화경의 무림 고수인 준후였다.

이 정도 능력을 펼치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와…… 너 사람 맞니? 저번에는 뇌동맥류 클립을 구부리더니. 이번에는 50미터 바깥에 있는 숫자를 읽어?”

철우가 준후에게 다가와 물었다.

준후의 활약에 충격 받은 모습이었다.

“제가 좀 별난 데가 있거든요.”

“솔직히 말해. 너 외계인 아니냐?”

“이런…… 들켰네요.”

철우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준후는 수술실로 복귀했다.

스크럽(수술 전 소독)과 수술복장을 착용하고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교수님. 준후 시력 10.0 맞습니다. 50미터 거리에서 10번 확인했는데 숫자를 전부 맞췄습니다.”

“허…… 그거 놀랍구나.”

민석이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제 시력은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교수님께서 결단을 내려주세요.”

“네가 직접 문합술을 마무리 짓고 싶다고 했지?”

“네. 남은 건 3바늘뿐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라면 저도 소화할 자신 있습니다.”

준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재은이를 응시했다.

혈관 겸자로 뇌혈관 일부를 막아 놓은 상황.

허혈이 언제 발생할지 몰랐다.

뿐만 아니라 봉합 중인 혈관에 피가 통하지 않았으므로 해당 혈관이 손상될 위험도 존재했다.

수술의 속행이 절실했다.

“준후의 시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술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철우가 반대 의사를 밝혔다.

“미세 현미경 없이 뇌혈관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직접 봉합하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우,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민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지.”

“교수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나서 어시스트조차 못합니다. 근데 준후 혼자 문합술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서준후. 할 수 있어? 없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됐다. 집도의 자리로 서. 문합술 요령을 알려주마.”

민석의 목소리가 비장했다.

* * *

“뭐…… 뭐라고? 문합술을 준후가 한다고?”

스피커폰을 통해 전해들은 소식은 과장을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아니, 세상에!

이런 막장 수술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나서 중단된 수술을.

시력 10.0이라고 하는 레지던트 1년 차가 마무리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과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철우, 너 지금 장난해?”

-장난 아닙니다. 곽 교수님 오더라서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곽 교수 바꿔! 수리 기사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

-통화는 죽어도 안 하시겠답니다.

과장은 순간 전화기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한국 뇌혈관 협회 회원들만 없었으면 전화기는 벌써 박살이 났으리라.

이 인간이 나를 망신주려고 작정했나? 왜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두고 지랄이야!

과장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기 위해 심호흡했다.

“근데 준후 시력이 10.0인 건 확실해?”

-네.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1-100까지의 숫자를 한 번도 안 틀리고 맞췄습니다.

“너랑 짠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준후 수술을 반대하는 입장인데.

“알았으니까 끊어.”

과장은 통화를 끊은 후 협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했기에.

다들 수술 상황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거 참 죄송합니다. 손님을 모셔놓고 이런 추태를 보여서.”

“아니요. 아주 흥미진진한데요?”

나지웅이 웃으며 말했다.

나지웅은 한국 뇌혈관 협회 부회장이었다.

“흥미진진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시력 10.0인 레지던트가 존재하는 것도 신기하고. 그 레지던트가 수술을 마무리하는 것도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만한 구경은 어디서도 못할 걸요?”

“부회장님 지금 절 약 올리시는 겁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런 의도는 없었으니까 진정해요.”

지웅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과장님. 현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그야…… 수술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는 일이죠.”

“스태프들은 최선의 길을 선택한 겁니다. 물론 위험부담이 크겠지만요. 결단을 내렸으면 믿고 지켜봐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휴우. 알겠습니다.”

말싸움을 해봐야 이득 볼 것이 없었으므로 과장은 자리로 돌아갔다.

통유리 너머, 수술방을 응시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경솔했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과장은 ‘결과론자’였다.

수술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스태프들을 쥐 잡듯이 잡는 건 평소의 과장답지 않았다.

그래.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봐.

단 실패하면 지옥을 맛보게 해주마.

* * *

같은 시각 4번 수술방.

준후는 민석의 문합술 요령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조언은 딱히 필요 없었다.

준후는 어시스트 도중 민석의 문합술 요령을 이미 초식화하여 암기해두었다.

손가락의 움직임.

손목의 각도.

즐겨 사용하는 수술 도구 등등.

머릿속에 동영상이 있는데 굳이 이해하기 힘든 설명에 집중할 필요는 없었다.

“……알겠니?”

“네. 교수님.”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란다.”

민석의 눈빛이 준후에게 머물렀다.

민석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번 수술에 반드시 성공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걸 이루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물론 민석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는 걸 준후는 알았다.

민석이 재은이에게 직접혈관문합술을 펼친 이유가 학회에 관심을 끌 논문을 발표하기 위함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와는 별개로.

민석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만큼은 준후는 고맙게 생각했다.

민석과 같은 판단은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준후는 비장한 각오로 집도의 자리에 섰다.

잠시 중단했던 만화공을 펼쳤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전신을 휘어 감았다.

오감이 극대화되었다.

준후는 초식화 해둔 민석의 문합술을 머릿속에 재생하기도 했다.

만화경의 위력 덕분에.

문합술을 머릿속에 재생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따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감이 주는 정보들까지 꼼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만화경 특유의 멀티태스킹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솔직히 나조차 벅차긴 해.

9-0 nylon으로 봉합에 성공한 적이 없으니까.

더군다나 문합 대상이 소아의 뇌혈관이라면 말 다했지.

하지만 해내야 해.

재은이가 또래들처럼 마음 놓고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울어도 괜찮은 일상을 돌려주고 싶어.

준후를 각오를 다지며 수술모에 걸치고 있던 루뻬(광학 안경)를 착용했다.

순간 돋보기를 쓴 것처럼 사물들이 크고 가깝게 보였다.

루뻬의 2.5배율이 적용된 것이다.

그 상태에서 준후는 내공으로 시야를 증폭했다.

순간 벌어지는 놀라운 기적.

미세 현미경이 없음에도 준후는 미세 현미경에 버금가는 수술 시야를 확보하게 되었다.

호두처럼 주름진 뇌.

그 안에 있는 뇌신경과 뇌혈관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는 지구상에서 오직 준후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

“…….”

팽팽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는 수술방.

수술방은 어느새 태풍의 눈이 되어 있었다.

“9-0 nylon”

끼기기긱.

찰칵!

준후는 소독 간호사가 건넨 봉합사를 니들홀더로 조였다.

왼손으로는 얇디얇은 혈관이 요동치지 않도록 붙잡았다.

손목의 각도는 0도에서 30도로 호(아치)를 그리며 움직일 것.

최초 운침 장소는 혈관에서 0.5mm 떨어진 곳.

혈관의 표면은 회를 뜨듯이.

머릿속에 재생해둔 민석의 문합술을 따라서.

준후는 첫 번째 운침을 시도했다.

우회로가 되는 혈관에 봉합침을 꽂아 넣었다.

푹!

봉합침이 혈관을 꿰뚫었다.

이제 수술은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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