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제46장 모겐족(2)
지이이잉.
4번 수술방의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이 하나둘 수술방을 나왔다.
곤충의 허물처럼 벗겨지는 수술 가운, 수술모, 마스크, 장갑 등등.
벗겨진 복장은 폐기함으로 던져졌다.
터벅. 터벅.
집도의 민석이 앞장서고 그 뒤를 철우와 준후가 뒤따랐다.
수술실을 빠져나온 스태프들은 곧 재은이의 보호자와 마주했다.
“선생님. 재은이는 어떻게 됐나요?”
“당연히 무사하겠죠?”
보호자들이 스태프들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초조함과 불안함.
기대와 희망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민석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마주 잡은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수술은…… 무사히 종료되었습니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와!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선생님들이 잘해주실 거라고 했지? 글쎄. 이 사람이 하도 불안해서 저도 같이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보호자의 반응을 지켜보며 준후는 뿌듯함을 느꼈다.
보호자들이 가장 원했던 선물은 재은이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는 것이었을 텐데.
그 선물을 줄 수 있어서 기뻤다.
외과 의사라서 행복했다.
진짜 이번 수술에서는 별의별 짓을 다 했네. 이 정도로 쇼맨십을 펼쳤던 적이 있었나?
준후는 지난 수술 과정을 돌이키며 피식 웃었다.
오늘 수술의 하이라이트는 무려 두 군데나 있었다.
하나는 모겐족(?)급 시야를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술실을 나와 50미터 거리에서 시력 측정을 했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손으로 혈관문합술을 마무리 지은 일이었다.
특히 후자에서 준후는 진땀을 뺐다.
9-0 nylon으로 소아의 뇌혈관을 문합하는 일은 준후에게도 버거웠다.
메스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봉합술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내공으로 시야를 증폭하고.
멀티 태스킹과 초감각으로 대표되는 만화공을 펼치고.
초식화 해놓은 민석의 문합술을 머릿속에 재생시켜 놓고.
양수 호박 기술을 극성으로 펼쳤음에도 문합술은 만만치 않았다.
지식과 의지는 충만하거늘.
손이 따라와 주질 않았다.
비유하자면 삼류 무사가 이류 무사의 무공을 더듬더듬 따라 하는 느낌이랄까.
재은의 목숨이라는 외줄을 아슬아슬하게 타면서.
다행히 준후는 남은 3바늘을 완벽하게 꿰매는 데 성공했다.
호월십이수를 4성까지 성취하지 않았다면 문합술은 분명 실패했으리라.
집착을 넘어 중독에 이른 성장을 향한 갈망.
그것이 준후와 더불어 재은이까지 구원한 것이다.
“재은이를 중환자실로 보내서 며칠간 경과를 지켜보겠습니다. 자세한 치료 계획은 일반 병실로 전실한 후에 말씀드리죠.”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보호자들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스태프들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야. 우냐?”
보호자와 헤어져 복도를 걷던 중.
철우가 준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준후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고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감동적인 순간이니까요.”
“이 자식. 보기보다 마음이 여리네. 하긴 오늘처럼 긴박했던 수술이 끝나면 그럴 수도 있지.”
“하하하. 그러게요.”
준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사실 감동은 받긴 받았지만.
그것 때문에 운 건 아니었다.
내공으로 시력을 증폭했던 부작용이 뒤늦게 밀려왔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나쁘지 않아서 정정하지 않았다.
“참나. 황당하기 짝이 없구나. 수술 중에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나다니.”
민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과장님도 이런 경험은 없으십니까?”
“당연하지. 나 말고 다른 외과의도 마찬가지일걸?”
“그럼 현미경은 왜 고장 났을까요? 정비한 지도 얼마 안 됐다고 하던데.”
“나도 그게 궁금해. 수리 기사가 오고 있다니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
“그나저나 준후야, 고생 많았다. 이번에도 네 덕을 톡톡히 봤어.”
민석의 시선이 준후에게 머물렀다.
“별말씀을…… 저는 다 끝난 수술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인 걸요.”
“그 숟가락이 결정적이었지. 암, 그렇고말고.”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났던 순간만 떠올리면 민석은 지금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 뒤에는 호랑이가 서 있고.
눈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오싹했다.
그런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준후가 구원자로 강림했다.
물론 처음에는 본인 시력이 10.0이라는 허풍을 듣고 반신반의했지만 놀랍게도 준후는 정말 10.0 시력의 소유자였다.
2.5배율의 광학 안경을 착용하여.
25배의 수술 시야를 확보한 후.
고난이도의 혈관문합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준후가 없었으면 이번 수술은 폭삭 망했다.
그것이 민석의 지론이었다.
역시 준후는 복덩이야.
이래서 뇌종양 서 교수가 뻔질나게 준후를 어시스트로 썼던 거지.
서 교수, 그 인간…….
은근히 영악한 구석이 있어.
지이이잉.
생각이 라이벌 서 교수에게 옮겨가고 있던 그때, 가운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과장 전화였다.
“네. 과장님.”
-곽 교수, 지금 어디야?
“지금 지하 1층 식당으로 가는 중입니다. 고생도 했는데 애들 점심 좀 사 먹이려고요.”
-일단 식사는 둘이 먼저 하라고 하고 자네는 병동 컨퍼런스 룸으로 와. 수술도 잘 끝났는데 협회 사람들, 눈도장 좀 찍어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민석은 준후와 철우에게 사정을 말하고 준후에게 개인 카드를 맡기고.
타다다닥.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선생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체력 보충하려면 누가 뭐래도 고기가 최고지. 너도 이의 없지?”
“네.”
“근데 준후야, 너 시력 10.0이면 평소에 많이 불편하지 않냐? 뭔가 눈도 더 피로할 것 같고 그런데.”
“의외로 일상생활에는 지장 없어요. 뭐랄까, 집중을 하면 그때만 시력이 올라가는 느낌이라서요.”
“그래? 뭐 그럼 다행이고.”
다행히 철우는 준후의 시력을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이거…… 외과 실력 말고 거짓말 실력도 갈수록 느네.’
준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공으로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펼치고 나면 준후는 항상 핑계나 거짓말로 둘러대야 했다.
저번 수술에서 뇌동맥류 코일을 맨손으로 구부러뜨린 케이스가 대표적이었다.
만약 자신이 피노키오였다면.
지금쯤 코가 한 10미터 가까이 길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에 준후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터벅. 터벅.
복도를 걷던 도중.
창가에서 흘러드는 햇살이 무대 조명처럼 준후의 앞길을 밝히고 있었다.
재은아, 선생님은 약속 지켰어.
그러니까 이젠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앞으로 꽃길만 걷자.
* * *
타다다닥.
타다다닥.
당직실로 복귀한 준후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교수와 간호사 콜을 받은 오더 및 처방을 입력하고.
입·퇴원 기록지를 작성하고.
입원 환자들의 병명을 분류하고.
자잘한 의국 서류를 작성하고 등등.
반나절 짜리 수술을 마치고 난 터라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준후는 밀린 업무를 송판을 격파하듯 손쉽게 격파해 나갔다.
준후의 평균 타자 속도는 3,000에 육박했다.
영문과 한글 타자 구별 없이.
심지어 남들보다 10배는 더 빨리 치면서도 오타는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다.
경이로운 속도로 준후는 밀린 업무를 20분 만에 해치웠다.
‘타자 속도가 빠른 것도 은근히 꿀이란 말인지.’
준후는 희죽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레지던트 1년 차의 업무 중 7할이 처방 및 오더 입력, 서류 작성 등등의 전산업무였다.
그리고 전산업무를 번개처럼 끝낼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남는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준후는 우선 SNS부터 접속해 재은이의 수술이 무사히 끝났음을 알리는 글을 올렸다.
-선생님. 진짜 고생하셨어요. 혹시라도 재은이 잘못됐으면 진짜 펑펑 울었을 듯 ㅜㅜ
-라이브 방송은 못 봤지만 후원금 계좌에 후원금 입금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네요.
-항상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글을 올린 지 얼마 안 돼서 수십 개의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이 준후는 고마웠다.
세상은 아직 살 만했고.
공감과 배려는 죽지 않았다.
이 감사를 갚는 길이라면 준후가 앞으로도 외과의로서 실력을 키우고 위중한 환자들을 살리는 길밖에 없으리라.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렸다.
수술 어시스트를 마치고 온 경수가 준후 옆자리에 앉았다.
“넌 무슨 천생이 트러블 메이커냐? 이번에도 한 건 했다면서?”
경수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소식 들었나 보네.”
“듣기 싫어도 들리지. 사람들이 온통 네 이야기만 하는데. 모겐족 준후 씨.”
경수가 모겐족에 악센트를 넣었다.
준후는 그제야 괜히 모겐족을 입에 담았음을 후회했다.
느낌이 쎄한 게…….
앞으로 별명이 모겐족으로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스스로 뱉은 말이라 수습할 수도 없어 난감할 따름이었다.
“너 시력이 10.0이라며?”
“뭐. 대충 그런 느낌이지.”
“대충이 아니잖아. 사람 시력이 어떻게 10.0이 되냐?”
“나도 몰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그럼 모겐족은 알려나?”
“야, 그만해. 이제 지겹다.”
“나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지겹다고?”
경수는 준후의 시력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고 준후는 대충대충 대답했다.
이런 식의 관심을 준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준후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수술이 잘 끝났다는 것.
재은이가 무사하다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주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지컬 스틸을 맨손으로 구부러뜨리고 루뻬(광학 안경)만 쓰고 뇌혈관 문합을 돕고.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외계인. 사실 난 외계인이야.”
“오. 그건 좀 설득력이 있네. 출신 행성은?”
“아르…….”
하려던 농담을 주워 삼키고 준후는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응시했다.
띠리링~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에 더 가까웠던 경수가 전화를 받았다.
“신경외과입니다.”
-…….
“네네. 알겠습니다.”
하긴 슬슬 응급실에 내려갈 때도 됐지.
모처럼 진료 실력 좀 키워볼까?
경수의 통화를 엿들으면서 준후는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목을 풀었다.
새로운 환자를 만날 기대에 부풀었다.
의사에게 환자란…….
보람의 원천이자 경험치의 원천이기도 했다.
환자 없이는 의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응급실이지? 내가 갔다 올게.”
“응급실 아닌데?”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경수가 대답했다.
“그럼 어딘데?”
“의료 기기 업체 수리 기사. 수술실 도착했고 정비 시작할 거래. 미세 현미경 고장 났었잖아.”
“아…… 업체에서 왔구나. 그럼 더더욱 가봐야지.”
“네가 거길 왜 가?”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잠깐 당직실 좀 봐줘.”
“야! 치사하게 이러기야! 한창 바쁜 시간에 혼자 내빼면 어떻게 해?”
“갔다 와서 마사지해 줄게.”
“어. 그래. 느긋하게 갔다 와.”
경수의 태세전환이 번개보다 빨랐다.
드르르륵.
당직실을 나온 준후는 빠른 걸음으로 수술실을 향했다.
준후는 궁금했다.
미세 현미경이 정말 우연히 고장 났는지.
또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지면 자신이 직접 현미경을 고칠 수 있을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