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제46장 모겐족(3)
신경외과 병동 과장실.
업무용 책상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민석과 과장이 대화 중이었다.
방금 막 한국 뇌혈관 협회 회원들이 떠난 참이라 자리가 어수선했다.
테이블 위에는 치워지지 않은 빈 커피잔들이 놓였고.
간식 부스러기가 보였으며.
몇몇 소파는 삐뚤어져 있었다.
“하하하. 협회 사람들 반응 봤어? 아주 놀라 죽겠다는 표정이잖아.”
과장이 개그 프로그램이라도 본 것처럼 박장대소했다.
근 몇 달 동안 과장이 이렇게 유쾌한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과장의 반응이 민석은 퍽 놀라웠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오히려 잘 됐어. 스토리텔링이 확실히 됐단 말이야. 분명 협회 사람들은 오늘 수술을 평생 잊지 못하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도중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나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당연히 없어야지. 있어서도 안 되고.”
과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민석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극심한 피로에 당장 건물 바닥에라도 눕고 싶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수술이었는데.
중간에 현미경이 고장 나면서 마음고생이 극심했다.
거기에 수술 끝나고 협회 사람들과 과장에게 접대까지 했더니 죽을 맛이었다.
“환자 상태는 어때?”
“양호합니다. 일단 바이탈에 문제가 없습니다. 수술 후 촬영한 MRI도 확인했는데 별 이상 없었죠.”
“휴. 이제 완전히 안심이 되는군. 혹시 준후가 문합을 제대로 못 해서 사고가 터질까 걱정했는데.”
“사실 저도 MRI를 보고 나서야 한 시름 덜었습니다.”
민석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대답했다.
수술이 끝나갈 때쯤.
얇디얇은 뇌혈관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준후뿐이었다.
미세 현미경은 고장 났고 준후만이 25배율의 시력을 가졌으니까.
그래서 준후가 혈관을 제대로 문합했는지, 아닌지를 민석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뇌압이 정상이고.
혈종도 보이지 않아 수술이 잘 끝났다고.
‘짐작’만…… 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MRI를 확인한 후 짐작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준후의 문합은 완벽했다.
“어쨌거나 준후 덕에 수술이 무사히 끝났군.”
“네. 수리를 기다렸다면 필시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터졌겠죠.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나도 이제야 알 것 같아. 곽 교수나 서 교수가 왜 준후를 예뻐라 하는지.”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레지던트 1년 차는 당신에게 이용가치가 없잖아요. 그래서 관심이 없었던 거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민석은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민석은 생각했다.
준후의 앞날이 그리 평화롭지 않을 것 같음을.
과장의 눈에 들었다는 뜻은…….
앞으로 과장에게 단물을 쪽쪽 빨릴 일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민석은 문득 준후가 불쌍해졌다.
하지만 제 코가 석 자인지라 준후를 도울 수는 없었다.
과장은 이기적인 독재자였다.
“과장님.”
“왜?”
“그럼 이번 수술을 논문으로 발표하면 협회지 게재에는 문제가 없는 거겠죠?”
“자네, 걱정도 팔자군. 오늘 두 눈으로 본 게 있는데 설마 협회 사람들이 모른 척하겠어?”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소아 모야모야병 환자에게 직접혈관문합술을 할 정도로 대범한 사람이 이렇게 간이 콩알만 해서야. 쯧쯧쯧.”
민석이 한심하다는 듯, 과장이 혀를 찼다.
“수술 논문 말고 오늘 있었던 사건들도 논문으로 써 봐.”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나서 시력 10.0인 레지던트가 루뻬만 사용해서 수술을 마무리 지었다는 논문이지.”
“그건 좀…….”
민석이 말끝을 흐렸다.
준후의 활약이 대단했던 건 사실이었다.
히어로 영화 같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논문감일까?
민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해당 논문을 썼다가 망신만 당하는 건 아닐지…….
벌써부터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준후 관련 논문은 과학적인 것도 아니고 뭔가 데이터화 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뭐? 어때? 학회 사람들 관심은 오질나게 끌 텐데.”
과장이 껄껄 웃었다.
준후가 주인공인 논문을 생각하는 것으로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과장은 뼛속까지 관종이었다.
아이고, 불쌍하다, 내 팔자.
어쩌다 이런 악마 같은 과장을 만나서 개고생을 하는지.
“자네가 착각할까 봐 말해두는데…… 준후 관련 논문 작성은 권유가 아니야. 명령이라고.”
“알겠습니다. 기존 논문과 병행하겠습니다. 작성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래. 자네도 나중에 과장이 되면 내 마음, 다 이해하게 될 거야.”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시간은 비워둬. 한우로 기름칠 좀 하자고. 고생했는데 몸보신이라도 해야지.”
“감사합니다. 과장님.”
대화를 마친 후 민석은 과장실을 나왔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이마에 맺힌 땀을 의사 가운 소매로 훔쳤다.
과장과의 대화는 언제나 불편했다.
* * *
지이이잉.
4번 수술방 문이 열렸다.
준후는 수술 복장을 착용한 상태로 안에 들어갔다.
설령 수술이 없다고 해도 수술방에 들어갈 때는 오염 방지를 위해 수술 복장을 제대로 갖춰야 했다.
수술방에는 먼저 와 있던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도 수술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사내의 키가 170대 후반 정도에 체구는 호리호리했고 눈은 소처럼 크고 순박했다.
수술대에 공구 상자를 올려놓은 채 미세 현미경을 빤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터벅. 터벅.
준후가 일부러 발소리를 냈다.
그제야 사내가 준후를 응시했다.
“누구신지…….”
“신경외과 레지던트 서준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레지던트 선생님이시군요. ‘리디안 바이오’의 정비 팀장 문영훈이라고 합니다.”
준후가 곁에 서자 영훈이 준후를 향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미세 현미경 건은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급한 수술 중에 고장이 나서 애먹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사람 하는 일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각별한 주의 부탁드릴게요. 정말 위험천만했습니다.”
수술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준후는 등골이 오싹했다.
준후가 무림 출신이었길래 망정이지.
만약 1시간 동안 수리를 기다렸다면 어떤 비극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힘들었다.
“팀장님은 의공학부 전공이신가요?”
“네. 전도유망한 과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최근에 하는 일만 보면. 사실 저는 정비가 아니라 장비 개발을 하고 싶었거든요.”
“괴리감이 크시겠네요.”
“안 그래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부서를 옮길 계획입니다.”
의공학부는 의료공학부의 줄임말로 병원 검사 및 치료에 필요한 다양한 장비들을 생산 및 개발하는 학부였다.
병원에서 사용되는 검사기기와 장비들은 거의 전부 의공학부 출신 엔지니어들의 손을 거친 것이라고 보면 됐다.
판타지 소설로 치면.
드워프쯤 되는 존재랄까.
“정비는 시작하셨나요?”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네. 확인 중입니다. 렌즈는 멀쩡한데 영상 출력이 안 되더군요. 특이 케이스예요.”
영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내부를 뜯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괜찮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해요.”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미세 현미경에 머물렀다.
미세 현미경은 ‘ㄱ’자 행태였다.
렌즈가 달린 부분(-)에는 오염을 막기 위해 투명한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
세로 부분(l)은 스탠드로.
현미경의 세부 조작을 할 수 있는 계기판과 버튼들이 위치했다.
“근데 선생님 바쁘지 않으세요? 수리가 언제 끝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보고 계시면 피곤하실 텐데…….”
“이것도 나름 좋은 경험이죠.”
준후는 이 기회에 미세 현미경 정비법을 익혀보고 싶었다.
그러면 설령 미세 현미경이 다시 고장 나더라도.
뒷수습이 한결 편해질 테니까.
25배율을 소화할 수 있는 외과 의사는 지구상에 준후밖에 없었다.
다른 외과의에게 준후 같은 활약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즉, 정비법을 익히는 게 최선이었다.
준후는 영훈이 작업하는 모습을 꼼꼼하게 지켜보았다.
초식화 형태로 저장하면서.
펄럭~
영훈이 미세 현미경 렌즈의 비닐 포장부터 걷어냈다.
그리고 렌즈에서 10센티미터 상단에 위치한 8개의 나사를 풀었다.
나사를 풀자 복잡하게 엉킨 선들이 보였다.
해당 선들은 꼭 영화 속에서 본 시한폭탄의 연결선 같았다.
“이거 좀 허탈한데요?”
“왜 그러시죠?”
“문제가 생각보다 간단했네요. 여기 선 보이시죠?”
영훈이 드라이버로 주황색 선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주황선의 피복이 벗겨져 있었고.
피복 안쪽에 있던 전선에 훼손된 흔적이 있었다.
전선 몇 가닥이 튀어나온 것이다.
“몸으로 비유하면 이 주황선이 사람의 시신경입니다. 시신경을 다치면 앞을 못 보는 것처럼, 이 선이 고장 나면 렌즈가 영상 송출을 못 해요.”
“근데 이거 고의로 훼손한 거 아닌가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준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났다.
더럽고 구린 냄새가 났다.
벗겨진 피복의 단면이 지나치게 깔끔했다.
마치 칼로 그은 것처럼.
“제 눈에도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네요. 하지만 이런 짓을 누가 고의적으로 하겠어요?”
영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준후는 단숨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이코패스 의사 시호.
시호라면 이런 끔찍한 장난을 하고도 남았다.
생각이 그쯤 미치자.
불쾌함과 분노가 전신을 휘어 감았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또 사람 목숨으로 장난을 쳐?
이젠 하다 하다…….
미세 현미경을 훼손한다고?
“혹시 의심 가는 사람이 있으세요?”
준후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읽고.
영훈이 물었다.
“네. 솔직히 있습니다.”
“죄송한데 그건 너무 비약이에요. 괜한 사람 오해하지 마세요.”
“왜죠?”
“설령 그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칠게요.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이 주황선에 기능을 알 수 있겠어요?”
“…….”
“정비를 하는 저희나 아는 거지.”
“맞는 말씀인 것 같기는 한데…….”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시호가 범인이라면 시호가 미세 현미경의 내부 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마 스승 박재현 교수라도 해도 미세 현미경의 구조는 모를 것이다.
의사는 현미경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현미경을 정비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왜일까.
시호 범인설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건.
시호가 진짜 범인이라서?
아니면 단순히 시호에게 색안경을 끼고 있어서?
이번만큼은 준후도 갈피를 잡기 힘들어 혼란스러웠다.
“알아보니까 몇 달 전 정기 정비할 때 신입이 왔더라고요.”
“네. 그래서요?”
“신입이 정비를 하면서 실수로 피복을 건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손상된 게 누적되면서 고장이 났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의사가 미세 현미경의 구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습니까?”
“의공학부 전공을 하면 알 수도 있겠죠.”
영훈의 농담 섞인 대답.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외과 의사는 결코 미세 현미경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시호는 확실히 범인이 아니라는 건데…….
오늘 사건은 단순한 비극이자.
해프닝이었다는 건데…….
그런데도 준후는 시호가 범인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자신을 엿 먹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시호 아닌가.
그런 시호에게.
이번 모야모야병 수술은 장난치기 아주 좋은 찬스였다.
준후가 재은과 보호자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생활비를 보태주기 위해.
라이브 영상을 촬영하고 후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 이번 수술에 실패한다면.
준후가 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준후는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한 가지 질문을 추가했다.
“혹시 몇 달 전에 현미경을 정기 검진했다는 신입분,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