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제46장 모겐족(4)
미세 현미경 수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종료되었다.
고작 5분 만에 끝나 버렸다.
현미경 렌즈와 본체 기기를 연결하는 주황선이 훼손되었기에 해당 선만 교체하면 그만이었다.
수리가 끝난 후.
준후는 영훈에게 여분의 주황선을 따로 받았다.
손에 쥔 주황선이 든든했다.
선을 교체하는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똑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쉽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준후는 그제야 마음이 편안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
“수고야 선생님들이 하셨죠. 수술 중에 현미경이 고장 나서 얼마나 난처하고 답답하셨겠습니까.”
“…….”
“그리고 앞으로 의료기기를 정기 검진할 때.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지이이잉.
준후는 영훈과 함께 애증이 담긴 4번 수술방을 나왔다.
수술 복장을 훌훌 벗어 던지고 수술실 바깥으로 나왔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곧바로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상대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신원대 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서준후라고 합니다.”
-아. 네. 리디안 바이오의 나찬영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어쩐 일로…….
준후의 통화 상대는.
가장 최근에 4번 수술방의 미세 현미경을 정비했다던 업체의 신입 직원이었다.
“오늘 수술 도중에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났다는 소식, 들으셨죠?”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찬영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과는 팀장님 덕분에 많이 먹었습니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 드렸거든요?”
-네. 얼마든지 여쭤보세요.
“몇 달 전 현미경 정비하실 때, 누가 곁에 있지 않으셨나요?
-곁에 있었던 사람이라…….
찬영이 말끝을 흐렸고.
준후는 찬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미세 현미경이 고의적으로 훼손됐다면 말이다.
누군가는 찬영에게 접근했어야 했다.
준후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영훈의 수리를 지켜보면서 미세 현미경에 대한 토막 지식을 얻게 되었다.
중요한 선의 위치와 수리법을 배웠다.
범인이 존재한다면.
범인도 준후와 같은 방식을 썼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고 보니 두 분 정도가 제가 수리하는 걸 지켜봤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 누군지 기억하시겠어요? 혹시 그중에 키가 작고 얼굴이 동글동글한 사람이 있나요?”
시호의 외모를 묘사하는 준후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여기서 찬영이 ‘예스’라고만 말해주면 시호에 대한 의심을 심증으로 굳힐 수 있었다.
심증이 생긴다면 구체적인 증거도 찾아볼 수 있을 테고.
-그게…… 죄송합니다. 하도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의사분들이 수술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고. 저도 워낙 긴장한 상태여서…….
찬영이 핑계를 둘러대듯 말했다.
“아. 그렇군요. 바쁘신데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준후는 아쉬운 목소리로 통화를 끊었다.
범인을 향한 실타래가 중요한 지점에서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단서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진지한 고민이 필요했다.
“선생님. 아직도 누가 고의로 미세 현미경을 고장 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준후를 지켜보고 있던 영훈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추리 소설이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하긴 팀장님 입장에서는 제가 음모론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제게도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죠?”
“내부 사정이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대충 악당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아니, 아무리 악당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찬영이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미세 현미경을 고장 내서 얻는 이득이 없지 않습니까? 의사가 수술을 망쳐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죠?”
“저기요. 팀장님?”
“네.”
“세상에는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존재합니다. 팀장님은 그런 사람을 아직 안 만나 보셔서 그래요.”
준후는 경고하듯 말했다.
무림을 경험하면서 준후는 매우 다양한 악인들을 마주쳤다.
잔인하고 잔혹한 놈.
위선자.
말로 사람을 꼬드기는 인간.
이성(二姓)을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악당 등등.
악인의 스펙트럼을 이해하지 못하면 악인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었다.
준후는 악한 인간들을 볼 때마다.
강력한 분노와 혐오감을 느꼈고.
그래서 그들을 소탕하는 일에 늘 발 벗고 나섰다.
현재 준후가 주목하는 사람은 2명.
한 명은 시호고.
다른 한 명은 과장이었다.
준후는 두 사람을 향해 이를 갈고 있었다. 적당한 때만 찾아오면 개 박살을 내줄 작정이었다.
“와! 방금 선생님 눈빛, 너무 오싹했는데요?”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고생하셨고 기회가 되면 또 뵙겠습니다.”
“네. 선생님.”
준후는 영훈의 명함을 받은 후 대화를 마쳤다.
곧바로 당직실로 돌아왔다.
“뭐야? 생각보다 빨리 왔네?”
경수가 준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으니까. 선 하나만 교체하면 끝나더라고.”
“잘됐네. 그럼 약속 지키셔.”
“당연하지. 약속하면 서준후 아니겠어?”
준후는 경수의 등 뒤로 돌아갔다.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경수의 목과 머리를 풀어주었다.
내공이 담긴 검지로.
옥침혈과, 천추혈, 완골혈등을 둥글게 문질렀다.
굳은 근육과 신경을 풀어주고 혈액 순환을 개선하는 데는 이만한 수법이 없었다.
뚜두둑!
뚜두둑!
준후는 경수의 목을 좌우로 90도씩 꺾으며 관절의 운동성을 증가시켜주기도 했다.
“와! 살 것 같네! 네 마시지는 언제 받아도 천상의 마사지라니까. 너무 개운해서 목과 머리에서 무게감이 안 느껴져.”
5분가량의 마시지가 끝나자.
경수가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준후는 피식 웃었다.
조화경의 고수가 추궁과혈로 마사지를 해주는데 시원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으니까.
어쨌거나 준후는 동료들에게 마사지를 해주는 일로도 자주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전생에서의 준후는…….
무림에서의 준후는…….
지금 같지 않았다.
서씨세가의 가주이자 아버지를 죽인 적일도를 처단하기 위해서 복수귀(復讎鬼)로 살아갔다.
동료라는 개념이 없었고.
동료가 소중한지도 몰랐다.
동료의 중요함을 깨달은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무림맹의 무사로 소독되어 마교의 함정에 빠졌던 위기일발의 임무 당시.
사천당가 출신, 당소윤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너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봤어?
마교의 추적을 회피하던 도중, 당소윤이 물었다.
-아니.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지?
-재미있으니까.
-별 시답지도 않은 재미를 추구하는군. 그러니까 네 별호가 파락공자인 거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산다는 건 다른 사람한테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해.
당소윤은 자기 할 말만 했다.
-난 네게 빚진 게 없다.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말 할 줄 알았어. 넌 어떤 면에서는 참 똑똑한데 어떤 면에서는 바보 천치 같단 말이야.
-…….
-앞으로는 제발 주변 사람도 좀 살피고 살아라. 응? 세상에 너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 저승길 동무가 너 같은 수다쟁이라니……. 벌써부터 저승길이 두려워지는군. 귀가 아프다.
-넌 안 죽어. 죽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해.
말을 마친 당소윤이 순식간에 준후의 혈을 점했다.
팟! 팟! 팟!
뜻밖의 기습에 준후는 대처를 하지 못했다.
짚단처럼 풀썩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너 대체 무슨 짓을…….
-당가의 절명독인 만천독을 사용하면 우리를 추적 중인 마교 놈들을 다 죽일 수 있어. 문제는 해독약이 하나뿐이라는 거지.
-그럼 너나 처마셔. 나한테 주지 말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까불고 있어.
당소윤이 피식 웃었다.
장포 속주머니에서 해독약을 꺼내 쓰러진 준후의 입에 넣었다.
쪼르르.
투명한 액체가 준후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너 적일도한테 복수하기 전까지는 못 죽는다며? 그러니까 이런 데서 죽으면 안 되지.
-내 목숨보다는 네 목숨이 소중하지 않나? 대체 왜 이런 짓을…….
준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목숨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법이었다.
그런데 당소윤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준후의 목숨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선택이었다.
만약 준후가 당소윤이었다면…….
절대 당소윤처럼 바보짓은 안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말 좀 들으라고 했지. 내가 아까 뭐랬어? 산다는 건 다른 사람한테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는 거라고 했지?
-그래서?
-너는 모르겠지만 나도 너한테 큰 빚을 졌거든.
-난 그런 기억 없는데?
-나중에 곰곰이 떠올려 봐. 분명 생각날 테니까. 그리고 그때는 다른 진실도 깨닫게 되겠지. 너 역시 혼자 잘나서 강해진 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한테 빚을 졌다는 걸.
-개소리 집어치우고 혈 풀어!
-싫은데~
당소윤이 빈정거리며 준후를 두 팔로 안았다.
가까운 동굴로 들어가 바닥에 준후를 눕혔다.
-난 오늘에서야 너한테 진 빚을 갚게 됐어. 그리고 넌 나한테 새로운 빚을 지게 됐지.
-…….
-이게 바로 빚의 순환이라는 거야.
-…….
-뭐, 빚이라고 해서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고. 이 빚이라는 건 삶의 무게를 상징해. 더 무거운 짐을 질수록 더 강해질 수 있지.
-…….
-근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네 삶은 너무 무겁단 말이지.
-당소윤, 너 진짜 내가 폭발하는 꼴을 보고 싶나? 마교 장로들보다 내 손에 먼저 죽고 싶어?
준후의 살벌한 발언에도 당소윤은 눈 한 번 깜빡거리지를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자의 결연함이었다.
-그래서 네가 나한테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게.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복수는 중요하지만 복수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파바밧!
당소윤이 준후에게 몸을 숙여 다시 한번 혈을 점했다.
준후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보니.
보랏빛 독무가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마교도의 시체 수십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당소윤은 마교도들에게 난도질을 당한 채 죽어 있었다.
-아…….
준후는 무릎을 꿇은 채 오열했다.
태어날 때 울고.
아버지를 잃을 때 울고.
근 20여 년 만에 다시 울어보는 것이었다.
급기야 준후는 울다가 지쳐 혼절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소윤의 희생으로 새 삶을 얻은 후.
준후의 가치관은 크게 바뀌었다.
주변 사람에게 얼음처럼 냉담했던 성격에서.
주변 사람을 끔찍할 정도로 위하는 성격으로 변해 버렸다.
그것이 당소윤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이었기에.
또한 당소윤의 빚은 목숨이었으므로, 준후 역시 죽을 때까지 타인에게 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준후. 뭐야? 너 갑자기 우냐?”
경수의 지적에 준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슴 시린 추억 탓에.
굵은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준후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무슨 추억이길래 그렇게 서럽게 울어? 말해봐. 들어줄게.”
“괜찮아. 말하기도 힘든 일이기도 하고.”
“속에 담아두면 병 된다? 속 시원하게 털어놔 보라니까?”
경수가 준후의 대답을 재촉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준후를 경계하고 미워하던 경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반응.
당소윤이 준후를 변화시킨 것처럼.
준후도 경수를 변화시켰다.
소윤이 말한 ‘빚’의 순환을 준후는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빚’이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깊게 새긴 흔적을 의미했다.
띠리리~
때마침 울리는 전화기.
준후는 곧바로 책상으로 이동해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준후는 금방 통화를 끊었다.
“응급실 콜이다. 내가 갔다 올 게.”
“방금까지 울던 인간이 무슨 진료야? 내가 갈 테니까 넌 쉬고 있어.”
“이미 늦었어.”
준후는 경수보다 먼저 당직실을 빠져나왔다.
터벅. 터벅.
응급실을 향해 빠르게 걷던 중.
준후는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윤아.
그리고 성호 형.
나 잘 하고 있는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