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45화 (245/424)

245화

제46장 모겐족(5)

소아 중환자실.

시호는 한 침상 앞에 서서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자를 향한 시호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이마에는 주름이 지고.

미간은 좁아졌다.

곤히 잠들어 있는 환자의 이름은 이재은.

6세의 아이였다.

아이는 오전에 모야모야병 직접혈관술문합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젠장! 이 이상은 제아무리 나라도 버거운데.’

시호가 살인 충동을 참아온 지도 어언 4개월째.

살인 충동을 견디다 못해 시호는 결국 생에 20번째 살인을 저지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모처럼의 살인은 계획부터 쉽지 않았다.

기존 CCTV 사각지대에 새로운 CCTV가 쫙 깔려 버린 탓에 동선을 숨기기 어려웠다.

이게 다 준후 때문이었다.

사람은 죽이고 싶고.

그런데 또 사람을 죽일 마땅한 방법은 없고……

속이 곪고 썩어들어가던 도중.

시호는 아주 창의적인 살인 방식을 찾아냈다.

그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으면서.

동시에 준후까지 엿 먹일 수 환상적인 수법을.

하지만 이게 웬걸?

오늘 오전, 작전은 대실패로 돌아갔고.

환자는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시호 입장에서는 지독하게 황당한 결과였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다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재은이라는 동명이인의 환자가 한 명 더 입원한 거 아닐까.

그런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선생님. 잠깐 이쪽으로 와주실래요?”

시호는 근처에 있던 간호사를 호출했다.

“네. 선생님. 어쩐 일로…….”

“여기 이재은 환자요. 모야모야병으로 입원한 환자 맞죠?”

“맞아요.”

“제가 뇌종양 수술 끝나고 바로 중환자실에 와서 그런데요. 이재은 환자 수술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말도 마세요. 준후 선생님이 이번에도 한 건 했다니까요?”

“준후…… 가요?”

“네. 지금 별명이 모겐족이래요. 시력이 10.0이라서요. 말도 안 되지만 진짜래요!”

간호사의 웃음기 섞인 설명이 이어졌다.

수술 막판에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났다.

그런데 시력이 10.0인 준후가 2.5배율 루뻬(광학 안경)를 쓰고 수술을 마무리 지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사람 시력이 10.0일 수가 있어요?”

시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간호사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별명이 모겐족인 거죠. 모겐족이란 부족은 시력이 10.0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설령 시력이 그렇게 좋더라도 뇌혈관 문합술은 소화하기 힘들 텐데.”

“저야 병동 간호사라서 거기까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준후 선생님 대단하죠?”

“대단하네요. 죽이고 싶을 만큼.”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혼잣말이니까.”

간호사가 떠난 후.

시호는 재은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살인에 실패하면서 해결되지 못한 살인 욕구.

고삐 풀린 살인 욕구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시호는 불쑥 재은이 착용하고 있는 산소마스크를 벗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재은이 숨을 못 쉬어서 꺽꺽거리다가 절명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턱!

시호가 재은의 산소마스크 위에 손을 얹었다.

하나, 둘, 셋.

재은의 숨결을 느끼며 3초를 세고는 손을 떼었다.

아무리 살인에 배고프다고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계획 없는 살인.

완전 범죄가 아닌 살인은 저급한 종자들의 몫이었다.

고귀한 시호의 몫은 아니었다.

시호는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신경외과 병동으로 복귀했다.

드르르륵.

당직실로 들어갔다.

철천지원수인 준후는 없었다.

대신 경수가 당직 근무 중이었다.

“준후는 응급실 갔니?”

“네. 선배도 수술 끝나고 이제 복귀하시는 거죠?”

“말도 마. 피곤해 죽겠으니까. 땅바닥에라도 눕고 싶은 심정이다.”

“커피라도 드시면서 좀 쉬세요.”

“그럴까? 카페 갈 건데 넌 뭐 마실래?”

“전 따뜻한 라떼요.”

“하긴 요즘처럼 쌀쌀할 때는 부드러운 라떼만 한 게 없지.”

시답지 않게 대화를 끌면서.

시호는 책장에 있던 ‘책자’ 하나를 꺼내 의사 가운 주머니에 쓱 넣었다.

차트 입력 중인 경수는 다행히 시호의 행동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 간다. 금방 올게.”

“네. 선배.”

그 길로 시호가 찾은 곳은 병동 옥상이었다.

옥상은 흡연하는 스태프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병원 전 구역이 금연이지만.

옥상만큼은 비공식 흡연 구역이었다.

옥상은 의외로 한산했다.

먼저 온 한 쌍의 남자 직원이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뿜어댈 뿐이었다.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시호는 살금살금 옥상 구석으로 이동했다.

담배꽁초가 들어 있는 대형 통조림통 안에 자신이 챙겨온 ‘책자’를 넣었다.

찰칵!

화르르륵.

바람이 불지 않았고 또 ‘책자’가 소형이라 금방 불이 붙었다.

‘책자’는 활활 잘만 타올랐다.

‘책자’의 겉표지 문구는 이랬다.

「미세 현미경 가이드 핸드북」

그랬다.

시호는 이 핸드북을 사용해서.

준후가 수술했던 4번 방의 미세 현미경을 미리 조작해 놓았다.

렌즈와 본체의 배율을 연결하는 선을 훼손시켜 놓았다.

핸드북은 석 달 전에 확보했다.

어리바리한 신입 직원이 정비를 왔길래 구경하던 중.

무방비하게 놓인 신입 직원의 가방이 보였다.

가방 안에 핸드북이 보였다.

오호, 이걸로 장난 좀 칠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에 핸드북을 몰래 훔쳐두었다.

그리고 시점은 다시 오늘.

시호는 천재적인 살인 수법을 감행했으나 준후의 활약 탓에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증거물은 빨리 없애 버려야지.

눈치 빠른 준후 녀석이 파고들면 곤란해질 테니까.

완전 범죄를 위해.

시호는 책자가 새까맣게 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통조림통을 축구공 차듯 뻥 걷어차 버렸다.

까아아아앙~

맑은 쇳소리와 함께 담배꽁초, 책자의 탄 조각이 옥상 바닥을 나뒹굴었다.

해소되지 못한 살인 욕구.

준후를 향한 분노와 원망감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미친, 모겐족 새끼!

네가 감히 다음에도 날 방해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겠어.

* * *

그로부터 3주가 지난 시점.

오전 10시.

신경외과 당직실에서 근무를 보던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또 어디 가는데?”

경수가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 퇴원하는데 잠깐 이야기 좀 하려고.”

“환자 누구?”

“모야모야병 걸렸던 재은이 알지?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재은이만 중요하고 난 안 중요하냐?”

“마사지 10분 권 끊어줄게.”

“그래. 천천히 갔다 와.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미래인데 그 정도 신경은 써줘야지.”

경수의 태세 전환에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요즘 경수는 마사지라면 껌뻑 죽었다.

준후는 당직실을 떠나 소아 병동으로 이동했다.

드르르륵.

재은이가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재은이는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부부는 짐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보호자분. 안녕, 재은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냐세요.”

세 사람의 인사가 물밀 듯이 쏟아졌다.

“오늘이 재은이 퇴원하는 날이네요. 뭔가 시원섭섭합니다.”

준후는 소감을 담아 말했다.

재은이가 건강하게 퇴원하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발랄한 재은이를 못 본다는 것은 아쉬웠다.

“저희도 뭔가 실감이 안 나네요. 입원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퇴원할 때가 되고. 선생님이 후원금까지 챙겨주시고요.”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준후도 질세라 고개를 숙였다.

“퇴원 약 먹이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외래 진료 보시면 될 겁니다.”

“…….”

“그리고 6개월 정도 후에 교수님께서 2차 수술 계획을 잡아주실 거예요.”

안타깝게도…….

모야모야병 수술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1차 수술과 2차 수술을 통해서 양쪽 뇌혈관을 번갈아 수술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별걱정이 없었다.

2차 수술.

그러니까 앞으로 수술할 뇌 좌측 혈관이 이미 수술을 끝낸 우측 혈관보다 상태가 양호해서였다.

“네. 그동안 재은이 관리 잘할게요. 그리고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아내 보호자가 준후에게 불쑥 비닐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어제 잠깐 집에 들러서 빚은 만두에요. 제가 만두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지금 드셔보세요. 제 아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만두 맛은 정말 일품이거든요.”

“하하하. 그럴까요?”

준후는 비닐 봉투를 풀어헤쳤다.

봉투 안에 담긴 1회용품 용기를 젖힌 순간.

와!

감탄이 터졌다.

다양한 형태로 빚은 만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반달 모양, 둥근 모양. 삼각형 모양. 복주머니 모양 등등.

모양만 거의 6개 가까이 되었는데 심지어 그 형태가 어설프지도 않았다.

만두는 전부 예쁘고 야무지게 빚어졌다.

피가 터져서 속이 바깥으로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준후는 복주머니 만두부터 입에 넣었다.

“으음…… 진짜 맛있네요! 근래 먹은 만두 중에 제일 맛있어요!”

준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감탄했다.

방금 먹은 만두는 부추 만두였다.

간은 적당했고.

중간중간 씹히는 부추는 아삭하면서 싱그러운 향을 뿜어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랄까.

조금 과장하자면 100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휴우, 선생님.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네요.”

“미각을 잃거나 부추를 싫어하는 분이 아니면 싫어할 수가 없겠는데요?”

준후는 다른 만두들도 하나씩 다 집어 먹어보았다.

부추 만두 때문에 입맛이 터져 버린 것이다.

김치 만두.

새우 만두.

튀김 만두 등등.

각각의 만두를 먹어보고 준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두의 맛은 준후의 예상을 몇 배 이상 뛰어넘어 버렸다.

재은이 어머니의 만두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보호자 분, 혹시 예전에 만두 가게를 하셨나요?”

“저는 아니고 친정어머니가요. 일을 도우면서 많이 배웠죠.”

“맛을 보니까 장사 잘되셨겠는데요?”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쑥스럽지만, 동네에서는 제법 유명했어요.”

재은이의 어머니가 수줍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만두 가게 차려보시는 건 어때요? 제가 보기엔 충분히 경쟁력이 있어 보이는데.”

“그쵸?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준후의 말에 재은이 아버지가 껴들었다.

“당신, 만두에 소질 있다니까. 왜 그렇게 자기 요리 솜씨를 못 믿어?”

“박종원의 영세 식당 못 봤어? 주변에서 겉치레로 음식 맛있다고 해줘서 좋다고 식당 열었다가 망하는 거?”

“보호자 분 요리는 겉치레가 아니라 정말 맛있어요. 식당 차려도 될 정도예요.”

“그걸 선생님이 어떻게 아세요?”

“방금 먹어봤으니까 알죠.”

“맛있게 드셔 주신 건 감사하지만 그래도 식당 차릴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재은이 어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돌아가신 어머니 손맛을 절반 정도 따라 하는 것뿐이에요. 전 아직 멀었어요.”

“아뇨. 이 기회에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죠. 식당 연다고 하시면 저도 투자하고 싶습니다.”

“와…… 투자씩이나요? 대체 제 어디를 믿고요?”

“당연히 보호자분이 만든 만두 솜씨를 믿어서죠.”

준후는 씨익 웃었다.

보호자가 만두 가게를 차리면 절대 망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남들은 까맣게 모르겠지만 준후는 만두 전문가였다.

준후는 만두 미식가였다.

무림에서 활동하던 당시 만두를 좋아해서 삼시 세끼 만두만 먹었던 날도 수두룩했다.

만두 귀신인 준후는 알았다.

무림에서 먹어 본 웬만한 맛집의 만두와 비교해도 보호자의 만두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호자가 만두를 차리면 준후는 꿩 먹고 알 먹고다.

재은 가족의 생계가 보장되고.

준후는 맛있는 만두를 마음껏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만두 가게 오픈,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락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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