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제47장 벌써 일 년(1)
“꺄하하하~”
재은이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모처럼 하늘에 무지개가 떴는데 각도가 절묘해서 재은이의 입에서 무지개가 탄생하는 것 같았다.
병원 출입구 앞.
재은이는 남편의 어깨에서 목말을 타고 있었다.
남편이 별안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게 재미있었는지 재은이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때, 재은아? 어지러워? 아니면 아빠가 한 번 더 돌아줄까?”
“한 번 더요.”
“돌아라~ 아빠표 회전목마~”
“꺄하하하.”
다정한 부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서연도 방긋 웃었다.
요즘 들어 행복한 일만 가득했다.
우선 사이비 치료에 유혹당할 만큼 철딱서니 없었던 남편이 제정신을 차렸다.
건강한 노동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재은이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고맙게도 주치의 준후가 매달 300만 원 가까운 생활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가정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드디어 걷혀가는 기분이었다.
준후 선생님이 그랬지?
2차 수술은 아마 이번 수술보다 훨씬 쉬울 거라고.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뿐이네.
유일하게 단 하나 남은 불안이 서연을 덮쳤다.
바로 장기적인 생계 문제였다.
재은이를 야무지게 키우려면 아무래도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싶은데…….
지금까지 해오던 식당 일 말고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데…….
“여보. 무슨 생각해?”
남편이 서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 얼굴에 쓰여 있구먼. 치료도 잘 받았는데 대체 무슨 걱정해?”
“앞으로 먹고살 걱정.”
“그래서 말인데 우리, 서 선생님 제안 따라 보자.”
“제안이라면…… 만두 가게 열자고?”
“그래. 내 생각에는 괜찮아 보이던데?”
“안 돼. 내 손으로 집안 말아먹을 일 있어?”
서연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게를 냈다가 실패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5명이 자영업을 시작하면 10년 안에 4명이 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연은 그 4명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가정 형편도 안 좋거늘.
가게를 냈다가 망하면 남편과 재은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거야 해보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지. 그런 의미로 저기에서 잠깐 배 좀 채울까?”
남편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병원 입구 근처에 있던 만두 가게였다.
식사 시간이 아님에도.
가게는 테이블이 절반 넘게 차 있었다. 나름 맛집으로 인정받은 식당인 듯했다.
“난 별로 생각 없는데…….”
“잔말 말고 따라와.”
남편의 박력에 서연은 어쩔 수 없이 식당에 끌려갔다.
고기만두 1인분.
김치만두 1인분.
새우만두 1인분.
미리 빚어두고 찌기만 하면 됐기에 만두는 빨리 나왔다.
“재은아. 아빠가 호호 불어줄게. 재은이는 뜨거운 거 먹을 때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네!”
“당신도 먹어 봐.”
“응.”
서연은 젓가락으로 만두를 집어 입에 넣었다.
만두를 씹으면 씹을수록.
표정이 일그러지는 서연이었다.
만두피가 너무 두꺼워서 밀가루 풋내가 진하게 났다.
간을 제대로 못 했는지 속 재료는 짰고 미약하게 돼지고기 잡내도 났다.
이…… 이딴 게 맛집?
충격을 받은 서연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저 온 손님들은 만두를 맛있게만 먹고 있었다.
서연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었다.
서연 입맛에 이 정도 만두는 하급이었다.
“역시 당신이 만든 만두만 못하네. 그렇지?”
“그러게. 손님이 많길래 대단할 줄 알았어.”
“그건 당신이 착각을 해서 그래.”
“착각? 무슨 착각?”
“어렸을 때부터 만두는 어머님 가게에서만 먹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눈이 너무 높아져 버린 거지.”
“그건 인정!”
서연은 남편의 분석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직접 만두 가게를 차리는 일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가게 이름은 만두 여왕이 좋을까?
아냐, 너무 거창한 것 같으니까 평범한 이름으로 생각해 보자.
서연은 단꿈에 젖기 시작했다.
* * *
그 날 밤 10시.
신경외과 병동은 고요했다.
취침 시간이라 복도를 걷거나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병실은 어두컴컴했고.
달빛처럼 은은한 조명등이 병실 내부를 희끄무레 밝히고 있었다.
꼭 병동이 사람처럼 잠든 것 같았다.
한편 당직 근무자였던 준후는 당직실에 있었다.
혼자서 호월십이수를 연마 중이었다.
손가락을 사용하는 지법.
손바닥을 사용하는 장법.
손톱을 사용하는 조법.
손과 팔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수법 등등.
호월십이수는 손으로 펼치는 다양한 무공들을 집대성한 그야말로 끝판왕 무공이었다.
화장품으로 치면…….
올인원 제품이랄까?
올인원 제품이면 보통 기능이 떨어질 법도 한데.
호월십이수는 아니었다.
그 위력을 인정받아 당당하게 무림의 10대 수법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
쎄에에엑.
펄럭~
준후가 허공에 오른 손바닥을 뻗었다.
차마 눈으로 다 쫓을 수 없는.
강맹하면서도 신속한 장법.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 위력에 창가에 달린 커튼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준후는 오른 손바닥을 거두었다.
왼손으로 곧장 다음 초식을 펼쳤다.
상월(上月).
손바닥 아랫면에 힘을 실어서 어퍼컷을 하듯 상대의 턱을 올려치는 초식.
후우우웅.
바람을 찢는 소리가 당직실에 울려 퍼졌다.
초식들이 부드럽게 연결되면서 동작들은 아름다운 춤으로 변해갔다.
준후도 모처럼 무아경에 빠졌다.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벗어나 달빛에 춤을 추는 한 마리의 나비(호월)가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벽시계를 응시했다.
벌써 자정이었다.
체감상으로는 수련을 한 지 10분 정도밖에 안 된 줄 알았건만.
털썩!
기진맥진한 준후가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땀에 젖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호월십이수와 외과 수술.
얼핏 보면 둘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다.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력 있는 외과 의사가 되고 싶으면 수술 연습을 해야지.
왜 뜬구름 잡는 무공을 수련해?
누군가는 그렇게 물을지 몰랐다.
하지만 준후는 알았다.
무공이 외과 수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혈연 관계라는 사실을.
무공은 이를테면 외과 수술을 위한 기본기였다.
호월십이수의 다양한 동작을 습득하고 숙련도를 높이면서.
준후는 손과 팔과 손가락과 손목을 더 세심하게 다루게 되었다.
안 쓰던 근육과 신경을 쓴 덕분이랄까.
성과는 오늘 수술에도 나타났다.
호월십이수를 4성까지 익힌 덕에.
준후는 민석이 마무리하지 못했던 뇌혈관 문합술을 마무리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3바늘이었고 중간에 위기도 있었지만.)
만약 무공을 9성까지 익힌다면.
손놀림이 부족해서 수술에 실패하는 케이스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무림에서 배운 것 중에 의술로 또 써먹을 만한 게 있을까?’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피로 회복에 운기조식.
진통 및 지혈, 또는 뇌를 활성화 시키는 점혈법.
메스와 검법.
추궁과혈 마사지.
양손잡이를 만들어준 양수 호박 기술.
손의 전반적인 숙련도를 올려주는 호월십이수.
환자와 동료의 멘탈을 관리하는 정안(正眼).
타인의 동작을 초식화하여 암기해두는 버릇 등등.
오래전부터 준후는 무림에서 경험한 기술들을 착실하게 일상생활과 의술에 접목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가진 능력으로도…….
세계 최고의 외과의가 되는 일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준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준후는 더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더 완벽하게 치료하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잃을 때의 무기력감과 절망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기에.
당소윤처럼.
또 성호 형처럼.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다른 사람이 겪는 것도 싫었기에.
외과의로서 더 성장하기 위해서.
준후는 계속해서 무공과 현대 의술에 접목을 고민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무공은 취권이었다.
취권은 말 그대로 만취한 상태에서 펼치는 무공이었다.
취권의 강점은…….
상식을 벗어난 자유분방한 움직임에 있었다.
준후도 취권을 배운 개방 장로와 비무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여간 고생했던 게 아니었다.
공격과 방어가 예측 불능, 상상 초월이었던 것이다.
‘근데 술 마시고 수술하면 미친놈 소리를 듣겠지?’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취권은 써먹을 곳이 없어 보였다.
만취한 의사를 환자와 보호자, 스태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심지어 취권은 펼치기도 까다로웠다.
취권을 펼치기 위해서는 ‘걸개취공’이라는 심법을 운용해야 하는데…….
그 난이도가 지옥이었다.
취했으면서도 동시에 안 취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안 취했다’는 주정뱅이의 단골 멘트를 몸소 실천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는…….
취권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자신이 최악의 궁지에 몰렸을 때는 오히려 취권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뇌수술 중 알 수 없는 출혈이 발생했다고 치자.
어찌 손 쓸 도리가 없다고 치자.
이때 술을 마시고 취권을 운용하면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이성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창조적인 방식의 해결책이 떠오를지 몰랐다.
실제로 고흐와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도 술을 즐겨 했다.
특히 피카소의 경우 술을 마신 후 즉흥적으로 작업한 작품이 큰 인정을 받기도 했다.
무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개방 방주 취화선이 음주 도중.
일부 소실되었던 개방의 절기 항룡십팔장의 초식을 스스로 완성한 일이, 바로 그 일이었다.
역시 취권도 폐기 처분하기에는 아깝단 말이지.
멸균한 플라스크 술병에 40도 이상의 고량주를 담아 두고.
수술방 물품실에 가서 한 모금 하면 일단 어떻게든 조건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준후는 취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앞에 섰다.
야채칸에 숨겨둔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소주병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틀 전.
한 보호자가 병실에 몰래 반입한 소주를 빼앗아 온 것이었다.
꿀꺽.
꿀꺽.
준후는 소주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나발을 불었다.
쓰디쓴 소주가 목구멍과 식도와 위로 내려갔다.
덕분에 소화기계의 통로가 온전히 느껴질 정도였다.
“크으으으.”
준후의 입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본래 준후는 술꾼이 아니었다.
무림에서도 그랬고, 현대에서도 그랬다.
준후가 술을 잘 마시는 것처럼 보였던 건 보유한 내공으로 알코올을 휘발시킨 덕분이었다.
와. 이 상태로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눈앞이 어질어질한데?
속도 메스껍고.
팔다리에 감각도 없고.
환자 살리러 수술 들어갔다가 애꿎은 환자만 죽이겠어.
아, 참 하나 더!
진짜 음주 운전하는 새끼들은 다 죽어야 해.
이렇게 맛탱이가 간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아?
제정신이냐고!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평소 준후의 장기 중 하나인 총명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음주 운전자를 욕하는 등등.
의식이 제멋대로 내달렸다.
잠깐만…….
계속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려고 술 마신 게 아닌데.
‘걸개취공’의 구결이 어떻게 되더라? 구결을 기억해야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데?
어깨뼈가 탈골될 때까지 어깨춤을 추는 거였나?
맞아!
그 정도는 해야 술이 깨지!
만취한 준후가 좌우 어깨를 열심히 으쓱거렸다.
상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