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제47장 벌써 일 년(2)
조화경의 경지는 시장 바닥에서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취기에 헤롱거렸던 것은 고작 1-2분 남짓뿐이었다.
준후는 만취했지만 그 취한 상태를 ‘관조’, 즉 관찰하고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어지러움, 구역감, 팔다리 힘 빠짐 등등.
다양한 증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수준만으로는 안 돼.
이 상태로 수술도 할 수 있어야 해. 그래야 취권의 진정한 의미가 있을 테니까.
준후는 머릿속으로 되뇌기 시작했다.
개방 장로에게 들은 ‘걸개취공’의 구결을.
만취한 신선이 세상을 보고.
정신이 온전한 그대가 세상을 본다.
둘 중 어지러운 세상은 어디인가.
마음이 취한 자는 경계가 없으므로 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 마음이 취한 자는 하늘과 같아서 품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마음의 티끌을 제거하는데 취함의 묘미가 있느니…….
구결을 외우면서.
준후의 정신은 차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취하기 전보다 생각과 감정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면의 모든 것이 훨훨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준후는 취권의 묘미를 깨달은 상태로 봉합 연습을 해봤다.
봉합 모형을 책상에 두고.
니들홀더와 포셉, 봉합사 등의 봉합 도구들을 펼쳐놓았다.
잠깐!
봉합을 반드시 수술 도구로 할 필요가 있나?
생각을 180도 전환해 볼까.
취권의 영향 때문인지.
준후는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 없는 사실을 의심해 봤다.
봉합에 꼭 니들홀더를 사용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봉합의 기본은 이랬다.
주로 사용하는 손(오른손)에 니들홀더를 쥔다.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쥐어 사용한다.
왼손으로는 포셉을 든다.
봉합하는 조직을 잡아주는 식의 지원을 한다.
그런데 불쑥 일어난 발상의 전환.
니들홀더를 안 써보면 어떨까?
바보 같지만 당장 해보고 싶은 시도라서.
준후는 실행에 옮겼다.
우선 오른손에 쥔 니들홀더를 내려놓고 맨손으로 봉합침을 쥐었다.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4-0 PDS 봉합사로 펼쳐진 봉합은 무난하게 성공했다.
3센티미터 절개창에 꼼꼼한 10개가량의 매듭이 지어졌다.
만취 상태임이 믿기지 않는 탁월한 성취였다.
준후는 뿌듯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걸개취공은 이제 완전히 준후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
그것은 걸개취공 상태의 취권이 무척 매력적인 무공이라는 사실이었다.
방금 펼친 맨손 봉합도 취권의 산물이었으니까.
물론 상식으로 따지면.
오른손으로 니들홀더를 사용하는 게 옳았다.
오염을 방지하고.
더 미세한 컨트롤을 돕고.
수술 시야를 넓혀 주고 등등.
니들홀더를 사용하는 일은 사용하지 않는 일보다 이득이 몇 배는 컸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맨손 봉합도 충분히 활용 가능했다.
봉합 부위가 혈관이나 신경처럼 섬세하지 않으면.
또 외과의의 수술 솜씨가 미흡하다면.
맨손 수술은 꽤 유용했다.
젓가락으로 콩 집기.
맨손으로 콩 집기.
둘 중 어느 쪽이 간편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준후가 취권 상태에서 개발한 맨손 수술법은 당연히 후자에 속했는데.
충수돌기를 잘라내고 봉합하는 데는 충분히 응용 가능해 보였다.
‘와, 이건 전혀 예상 못 한 결과야.’
준후는 전율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만약 만취 상태가 아니었다면.
수술 도구 대신 맨손을 사용할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것이다.
상식을 파괴하고.
제3의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취권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앞으로를 기대해 봐도 좋을 무공이었다.
똑똑똑. 똑똑. 똑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SOS 형태로 들려왔다.
‘그분’이 도착한 것이다.
당직 중 취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법.
준후는 취기를 단전까지 끌어내렸다.
내공으로 강렬한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알콜 기운을 완전히 증발시켜 버렸다.
순간 정신이 맑아졌다.
두통과 구역감 같은 신체적 증상도 씻은 듯 사라졌다.
“네. 들어오세요.”
준후는 마음 편하게 그분을 모셨다.
* * *
그분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아영이었다.
준후와 아영은 일주일에 두 번.
상대가 당직 근무일 때.
상대의 당직실을 찾아가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입이 심심한데 나, 빵 먹어도 돼?”
준후 맞은편에 앉은 아영이 준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허! 역류성 식도염을 앓는 사람이 빵은 무슨 빵이야?”
“오늘 한 개도 안 먹었는데?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안 돼.”
“히이잉. 간신히 구한 연새 우유크림빵이란 말이야. 그래도 안 돼?”
“안 돼. 돌아 가.”
“준후 나빵.”
아영이 입술을 뾰족 내밀며 빵 개그를 선보였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준후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못 이기듯이 준후도 아영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알았어. 하루에 한 개는 봐줄게.”
“와! 대단한 인심! 바다처럼 넓은 인심!”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지?”
“응. 응.”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게 맞다는 거야? 내가 오해하고 있다는 게 맞는 거야?”
“둘 다.”
“대신 빵 먹기 전에 이거 먼저 먹어볼래?”
준후는 냉장고로 이동했다.
냉장 칸에 넣어두었던 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돌린 후 아영에게 내밀었다.
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만두를 응시했다.
“갑자기 웬 만두?”
“오늘 퇴원한 환자의 보호자한테 받았어. 맛이 진짜 끝내줘. 먹자마자 감탄이 나올걸?”
“만두 맛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아니, 그렇게 실례되는 말을? 일단 잡숴 봐.”
“일단 냄새 하나만큼은 끝내주네. 알았어.”
준후는 만두를 오물오물 씹는 아영을 지켜보았다.
긴장이나 불안 따위는 없었다.
만두 전문가 준후의 입맛을 만족시킨 만두였다.
이 만두가 다른 사람 입에 안 맞을 리 없었다.
실제로 의국 스태프들도 전부 반했고.
“우와. 진짜 맛있어! 만두피도 쫀득거리고 만두 속도 담백하면서 입맛이 계속 당기는데?”
“내가 뭐랬어. 맛있을 거랬잖아.”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남은 건 재은의 어머니가 만두 가게 오픈을 결심하는 일뿐이었다.
당장이야 준후의 제안이 당황스럽겠지만.
재은의 어머니도 결국 만두 가게를 차리는데 동의할 것이다.
낭중지추.
송곳 같은 재능은 제아무리 감춰 두어도 결국 드러나는 법이었다.
“준후야.”
“응. 왜?”
“나 만두 다 먹어도 돼?”
“울 애기가 먹고 싶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지.”
준후가 애칭을 사용하자 아영이 꺄르르 웃었다.
준후는 아영이 만두 먹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앵두 같은 입술에 만두를 가져가고.
오물오물 만두를 씹고.
만두를 꿀꺽 삼키는 사소한 모습마저 한 폭의 예술 작품 같았다.
아영을 향한 준후의 사랑은…….
곡식처럼 무르익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준후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아영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아영이 만두를 다 먹고 물도 마셨다.
“준후야, 요즘 뉴튜브 엄청 잘 되고 있잖아.”
“사실상 황금기라고 봐야지. 100만 구독자 찍고 골드 버튼도 곧 도착할 테니까.”
뉴튜브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준후는 채널이 이렇게 잘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구독자가 10만 명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
월 수익이 100만 원만 나와도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준후의 채널은 근 2년 만에 대형 채널로 급성장했다.
압도적인 성장세를 뽐냈다.
기대치를 10배 이상으로 뻥튀기하는 데 성공했다.
“근데 뉴튜브는 왜?”
“이제 슬슬 제대로 관리해야 할 것 같아서. 개인 사업자를 내고 직원을 쓰거나.”
“…….”
“아니면 MCN이라고 뉴튜버나 스트리머들 관리하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고.”
아영은 준후를 걱정했다.
채널이 커진 만큼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준후도 동의하는 바였다.
언제까지 영상을 대충 찍어서 올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또한 영상에 편집이 들어가면 퀄리티가 훨씬 좋아질 것이다.
업로드를 비롯해 채널 및 영상을 관리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든든할 것이다.
“안 그래도 계약하자는 MCN이 줄을 섰거든? 괜찮은 회사랑 계약하는 쪽으로 해결할게.”
“잘 생각했어.”
“역시 내 생각에 주는 건 아영이 너밖에 없네. 고마워, 사랑해.”
“나도.”
서로를 향한 시선이 맞닿았다.
서로의 눈동자가 서로를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차차 가까워지는 가운데.
준후는 불청객의 기척을 읽었다.
터덜. 터덜.
보폭만으로도 상대가 누구인지도 단번에 파악했다.
“훼방꾼이 나타났네? 뽀뽀는 나중에 해야겠다.”
* * *
그 날 새벽 2시.
아영이 떠난 자리를 민경이 차지했다.
당직실에 들어온 민경은 배가 너무 고파서 깼다고 했다. 그러더니 컵라면을 그 자리에서 두 개나 끓여 먹었다.
“선배, 그렇게 먹으면 얼굴 붓지 않아요?”
“뭐, 어때? 내일은 시호 선배도 오프라서 없을 텐데.”
“그러니까 시호 선배가 없을 때는 얼굴이 부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크으으으.”
민경은 라면 국물까지 싹싹 들이마셨다.
누가 보면 라면 CF를 찍는 줄 착각할 정도로 맛깔난 모습이었다.
“내가 불편한가? 아영이가 그냥 가버렸네? 좀 더 있어도 되는데.”
“선배가 불편해서 간 게 아니라 선배가 불편해할까 봐 간 거죠. 아영이는 그런 애예요.”
“어휴. 닭살 돋는 멘트 지리네. 천하의 서준후, 사랑꾼 다 됐다?”
“선배가 적응하세요. 전 못 고치니까.”
“아 참 준후야. 이참에 나 고민 상담 좀 해도 돼?”
민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이 있겠냐 하지만 민경의 고민 상담 요청은 놀라웠다.
민경은 성격이 활발했다.
신경외과의 홍일점으로 분위기 메이커와 인간 비타민을 담당했다.
민경이 평소 할 말.
안 할 말을 전부 하고 다니는 성격이었기에, 민경의 고민 상담 요청이 더 신경 쓰이는 준후였다.
“선배. 이런 말부터 꺼내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준후는 인상을 팍 쓰며 말을 이었다.
“혹시 누가 선배를 성적으로 희롱하고 추행했어요?”
“야, 왜 급발진하고 난리야. 그런 일 없어. 우리 스태프들 착한 거 너도 알잖아.”
민경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에 준후는 머쓱하면서도 한결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선배가 고민 상담을 부탁할 정도면 그 정도 사건은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아니야, 내 고민은 되게 사적이고 쉬운 고민이야.”
“그게 뭔데요?”
“그게…… 내가…….”
민경의 뺨이 어느새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몸은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갔다.
“너무 뜸 들이시는 거 아니에요?”
“부끄러우니까 그렇지. 그래서…… 내가…….”
“…….”
“올 성탄절에 시호 선배한테 고백해 보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민경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든 준후였다.
준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민경이 시호를 짝사랑했다는 것을.
하지만 준후는 민경의 사랑을 반대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대였다.
시호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였다.
그러니 민경이 시호와 맺어진다고 해도.
그 사랑이 행복할 리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불행과 지옥을 알리는 서막이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준후는 민경이 불행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 고백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고백해서 성공하면 좋은 거고 실패해도 나름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준후 네 생각은 어때?”
민경이 조심스레 의견을 물었고.
준후는 고백을 결사반대하기 위해 포문을 열었다.
“글쎄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어떤 점에서?”
“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