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제47장 벌써 일 년(3)
영등포역에 위치한 한 카페.
준후는 맞은편에 앉은 사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서정호.
국내 최고의 MCN 업체 중 한 곳인 슈퍼 박스의 영업 팀장이었다.
30분 가까이 이어진 대화는 슬슬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계약 진행해도 될까요?”
“네. 그러시죠.”
정호가 계약서를 내밀었고 준후는 계약서를 빠르고 꼼꼼하게 훑었다.
믿을 만한 회사라고 해서 계약서를 대충 볼 수는 없었다.
독소 조항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몰랐다.
실제로 불공정한 계약으로 피해를 본 뉴튜버나 스트리머 및 BJ도 꽤 많았다.
‘뭐, 이상한 조건은 없네.’
준후는 계약서를 다 읽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기간.
계약 범위.
수익 배분 등등.
중요하게 살핀 조항 중에 악의적인 내용은 없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건 지키는 업체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계약 후.
일시적으로 수익이 줄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수익이 늘어날 것이다.
채널 운영이 안정되고.
동영상에 썸네일과 편집이 들어가면 그 효과가 무시무시할 테니까.
서걱. 서걱.
준후는 계약서 마지막 장에 서명을 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근데 선생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세요.”
“혹시 사인은 안 쓰시나요? 이 기회에 하나 만들어두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에이,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정호의 지적에 준후는 멋쩍게 웃었다.
준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인란에 한글 이름 석 자를 사용해 왔다.
그게 가장 깔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0만 뉴튜버면 사실상 연예인 아닙니까? 그리고 팬분들이 사인 요청할 때 말입니다.”
“…….”
“이름보다는 멋지거나 유쾌한 사인이 있으면 받는 분도 추억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한 번 생각해 보죠.”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그냥 하는 소리입니다. 하하하.”
서류 봉투에 각자의 계약서를 챙기면서 계약은 끝났다.
준후는 앓던 이를 뺀 것처럼 후련했다.
앞으로는 뉴튜브에 신경을 덜 써도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슬슬 일어나려던 찰나.
“저기 혹시 서준후…… 선생님 아니세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 두 명이 테이블에 접근했다.
“네. 맞습니다.”
“와! 그럴 줄 알았어요. 워낙 잘 생기셔서 멀리서 봐도 빛이 나더라고요.”
안경을 쓴 여성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자리에서 발을 콩콩 굴렀다.
“저희 둘 다 선생님 팬이에요.”
“뉴튜브 잘 보고 있어요. 동전 구기는 영상도 봤고 얼마 전 라이브 후원 방송도 보고 후원도 했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죄송한데 사인받고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여기…….”
머리띠를 한 여성이 가방에서 펜과 노트를 꺼내서 내밀었다.
인생 첫 사인 요청이 준후는 쑥스러웠다.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놈이라고.
이리 반응해 주나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팬에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100만 뉴튜버면 사실상 연예인 아닙니까? 그리고 팬분들이 사인 요청할 때 말입니다.
-이름보다는 멋지거나 유쾌한 사인이 있으면 받는 분도 추억이 되지 않을까요?
방금 막 정호와 나눈 대화가 떠오르면서 준후는 살짝 고민했다.
확실히 이름만 써주면 성의가 없어 보일 것 같긴 했다.
그렇다면 다 방법이 있지.
결심을 굳힌 준후가 마침내 볼펜을 손에 쥐었다.
스르르륵.
서예가가 화선지에 붓을 놀리듯.
준후의 손이 노트 위를 간드러지게 누볐다.
손목의 움직임은 절도가 넘치면서 동시에 유연했다. 한 번의 끊어짐 없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
“…….”
사인이 끝난 후.
두 명의 여성 팬과 정호는 악어처럼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준후의 서명이 너무 멋있었던 것이다.
서명에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와. 대박! 진짜 환상적이에요. 혹시 예전에 서예 배우셨어요?”
“되게 예스럽고 고풍스러워요. 글씨체를 팔아도 될 것 같아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한 장 더 해드릴게요.”
준후는 씽긋 웃으며 노트 다음 장에 사인을 했다.
준후의 사인이 멋있었던 이유.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준후가 무림 출신이었던 점을 십분 활용했던 것이다.
조금 전 준후는 한자 이름을 화려한 초서체로 휘갈겼다.
요즘은 한자를 잘 안 쓴다는 점.
무림에서 한문을 많이 썼기에 한자를 자연스럽고 멋지게 쓸 수 있다는 점.
이 2가지가 시너지를 터뜨리니.
사인이 멋있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찰칵!
찰칵!
여성 팬들과 사진까지 찍으면서 짧은 팬 미팅이 종료되었다.
짧지만 뜻깊은 시간이었다.
딸랑, 도어벨 소리를 앞세우며 준후는 정호와 카페를 나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파란 호수가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했다.
이제 계절은 가을보다 겨울에 더 가까웠다.
레지던트 합격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번개처럼 흘러…….
어느새 1년 차를 졸업할 때가 되었다.
이럴 때 보면 시간이 덧없고 무상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피부에 와 닿았다.
“아까는 말씀 못 드렸는데 선생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사인도 즉석에서 만들어내시고.”
“다 팀장 조언 덕분 아니겠어요?”
“어휴.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일단 이틀 내로 선생님 담당자 정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
“저희 회사 에이스로 붙일 테니까 염려 마시고요.”
“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줘보세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부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주물럭거리던데 동전 아니에요?”
준후는 웃으며 물었다.
동전 구부리기 영상을 업로드한 이후.
영상을 본 사람 중 일부가 준후에게 동전 구부리기 시범을 요청했다.
-네가 진짜면 내 눈앞에서 동전을 구부려봐라. 그럼 믿어주겠다.
이런 태도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정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왕 만난 김에 준후의 힘을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동전 영상이 진짜인지 궁금하긴 하죠. 그런데 선생님이 이런 일로 너무 시달리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거기에 기름을 붓는 것 같아서 께름칙하기도 하고…….”
“누구를 탓할 게 있나요? 애초에 그걸 노리고 만든 영상인데.”
“그럼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호가 허리를 숙였다.
조심스럽게 준후에게 동전을 내밀었다.
동전을 받아들고 박장대소하는 준후.
“팀장님. 이건 선 넘으시는 거 아닌가요?”
“왠지 가능할 것 같아서…….”
“가능하기야 하겠죠.”
정호가 건넨 동전이…….
준후 손에 들린 동전이…….
500원짜리였던 것이다.
정호가 준후를 시험하고 싶어서 작정했다고 할까.
“자. 집중해서 잘 보세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납니다.”
“네. 선생님.”
준후는 엄지와 중지로 동전을 잡았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손가락에 담았다.
용조수(龍爪手).
용이 손톱으로 먹이를 움켜쥐듯.
준후는 내공으로 증폭된 손가락 힘으로 500원짜리 동전을 움켜쥐었다.
이에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기적이 펼쳐졌다.
잘 구운 와플이 반으로 접히는 것처럼, 동전이 1초 만에 반으로 접혀버린 것이다.
“이…… 이게 되네요? 100원짜리도 아니고 500원짜리였는데.”
“본의 아니게 동전 구부리기 영상으로 관심종자가 됐는데. 그렇다고 제가 사기꾼은 아니거든요.”
“와! 회사 직원들에게도 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준후는 구부린 동전을 정호에게 건넸다. 그리고 작별 인사 대신으로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호는 머뭇거리며 준후의 악수를 받지 않았다.
“왜 악수를…….”
어리둥절하던 준후는 곧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손을 거뒀다.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 손도 동전처럼 구겨질까 봐 겁먹었네.
* * *
[이번에 내리실 정류장은 오류동역. 오류동역입니다. 다음 정거장은…….]
삐비비빅!
하차 태그를 하고 준후는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주변을 훑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남은 일정은 3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지금 소화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친척 집에 가 친척 동생에게 대박 뉴튜버가 되는 꿀팁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태용이 걔가 한 달 전부터 인터넷 방송하고 뉴튜브 시작했댄다. 준후 네가 선배니까 쉬는 날에 가서 조언도 주고 그러면 어떻겠니?
얼마 전 통화 도중.
어머니가 준후에게 부탁했던 것이 있었다. 준후는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2번째 일정은 벌모세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준후는 매일 매일 손꼽아 기다렸던 벌모세수를 펼칠 예정이었다.
벌모세수란.
무공을 익히기 위한 최상의 육체를 만드는 작업인데.
최근 벌모세수에 필요한 내공을 확보했다.
벌모세수는 어릴 때 받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효과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벌모세수 난이도가 상승할 뿐.
벌모세수를 순조롭게 마친다면.
준후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근골격, 혈맥, 신경 등등의 최적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기존에 익힌 무공의 위력들도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벌모세수가 꿀처럼 마냥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벌모세수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자칫 잘못 펼쳤다가는…….
주화입마에 이를 수 있었다.
만약 무림이 아닌 현대에서 주화입마를 당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오금이 저리고.
팔뚝에 닭살이 돋고.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올랐다.
현대에서 주화입마를 당하면 도움받을 사람이 없으니까.
아니, 그전에 누구도 주화입마를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외과의들은 준후가 피를 토해도 왜 토하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조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방심해선 안 되겠지.
한 번 삐끗하면 벼랑에서 떨어지는 거나 다름없을 테니까.
3번째 일정은 부모님과 저녁 식사였는데.
이는 2번째 일정의 성공 여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벌모세수 도중 문제가 터진다면.
식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준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눈앞에 오래된 빌라가 서 있었다.
준후는 계단을 훌쩍훌쩍 건너뛰어 4층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고 잠시 후.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졸린 눈을 한 청년이 현관문을 열었다.
사촌 동생이자 갓 스트리머와 뉴튜버로 데뷔한 나태용이었다.
“어. 형. 왔어?”
“그래. 오랜만이다? 잠이 덜 깼니?”
“응. 어제 새벽까지 방송했거든. 안으로 들어와. 점심은 먹었어?”
“먹고 왔지. 너는?”
“나는 씻고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으려고. 형도 하나 끓여줄까?”
“됐어. 라면은 지긋지긋하다.”
준후는 격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거의 하루에 한 번씩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라면 생각만 하면 속에서 신물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준후는 쉬는 날에는 아예 면 요리 자체에 입을 대지 않았다.
거실에 들어선 준후는 소파에 앉았다.
지이이잉.
리모컨으로 화면을 켜자 마침 건강 정보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제가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법은 바로 시서스 가루에 있어요.]
‘하…… 저놈의 시서스 광고 좀 안 볼 수 없나?’
준후가 한탄하는 사이.
한 일반인 출연자가 뜬금없이 샐러드에 시서스 가루를 왕창 때려 부었다.
맛도 없는 걸 맛있는 척 먹어댔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방송에 같이 출연한 의사 출연자들은 시서스가 신의 음식이라며 극찬했다.
식욕이 줄고.
체지방·콜레스테롤이 감소하고.
소화 능력이 향상되고 어쩌고저쩌고 등등.
협찬을 받은 것이 분명한 멘트와 행동들이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쇼 닥터라는 말이 생기는 거라고.
준후가 쇼 닥터를 비판하는 가운데.
한 인물이 화면에 잡혔다.
순간 준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했다.
시서스를 홍보하는 쇼 닥터 중 무척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바로 스승 박재현이었다.
아니, 왜 스승님이 이딴 쓰레기 방송에 나오지?
혹시 협박이라도 당하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