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제48장 이삭(1)
집 근처 야산.
늦가을이라 해가 금방 떨어졌다.
산자락은 어둑어둑했으며 정상 부근에 황금빛 석양이 걸려 있었다.
휘이이잉.
바람에 숨은 칼날이 살갗을 여미는 듯했다.
주민들이 드문드문 산책로를 걷고 있었는데.
준후는 인적이 드문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자주 찾았던 공터에 자리를 잡은 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쥐었다.
검 대신이었다.
나뭇가지를 쥔 것만으로도 준후의 표정은 180도 변했다.
눈빛은 착 가라앉았으며.
기개가 바위처럼 굳건해졌다.
지금의 준후는 현대의 서준후가 아니라 무림맹을 호령하던, ‘무결검’의 서준후였다.
준후는 서씨세가의 청운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발동작이 구름을 밟듯 가볍고 사뿐사뿐했다.
사각 사각.
낙엽 밟는 소리마저 경쾌했다.
손에 들린 나뭇가지는 신들린 듯 허공을 가르고, 찌르고, 베어냈다.
우우웅, 공기가 울어댔다.
시간이 갈수록 검무는 더욱 과격해지고 강렬해졌다.
준후가 손에 쥐고 있는 연약한 나뭇가지는 공터를 완벽하게 사로잡아 나갔다.
그것이야말로 전직 조화경의 고수가 뿜어낼 수 있는 위압감이자 중력이었다.
주변 사물을 모두 빨아 당기는.
준후는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검무를 마치고 그 자리에 섰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윽고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
역시 벌모세수야. 효과가 끝내주는걸?
이전에 비해 초식이 2배는 더 빠르고 정교해졌어. 벌써 전성기 수준의 6할까지 올라왔군.
내공 운용도 마찬가지야.
진기를 끌어올리는 양과 속도가 2배 가까이 상승했어.
속으로 혼잣말을 하고 준후는 뿌듯함을 느꼈다.
벌모세수의 효과는 비단 무공과 내공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봉합, 절개 및 절제, 천자술.
그 밖의 각종 처치 등등.
외과 술기의 다양한 부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외과 수술도 ‘피지컬’의 영역이니까.
준후는 가만히 서서 앞으로 계획을 점검했다.
최우선 과제라면…….
당연히 호월십이수를 완벽하게 터득하는 것이었다.
4성을 넘어 10성.
즉, 대성을 한다면 준후는 지구 최강의 섬세함을 갖춘 외과의가 될 게 분명했다.
그다음 숙제는 스승 재현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
뇌종양 파트 정복.
뇌혈관 파트 정복.
슬슬 신경외과의 다른 분야를 공부할 때가 됐다.
정위신경파트가 먼저냐.
아니면 척수·경추 파트가 먼저냐.
아직 전공하고 싶은 분야를 결정하지 못했기에 준후는 재현에게 연락하지 않고 있었다.
“저기요, 형. 여기서 뭐 해요? 나뭇가지 같은 거나 들고.”
교복을 입은 7명의 남학생이 껄렁거리며 준후에게 다가왔다.
기척은 진작부터 읽었다.
되도록 자신과 얽히지 않길 바랐건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었다.
이마저도 애송이들의 업보일 테니.
“혹시 말 못 하는 거 아니죠?”
“왜? 지나가다 보니 내가 만만해 보였지? 삥 뜯기 좋아 보였지?”
“와. 이 형 눈치 겁나 빠르네. 학교 다닐 때 빵 셔틀 좀 해보셨나 봐요?”
선두에 있던 덩치가 깔깔깔 웃었다.
뒤에 있던 학생들도 덩달아 낄낄거렸다.
“돈 없어서 산길을 헤매는 불쌍한 학생들한테 용돈 좀 기부해 주세요. 돈만 주시면 조용히 갈게요.”
덩치가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하지만 덩치가 라이터를 찰칵거려도 불씨는 연신 맥없이 꺼져 버렸다.
준후가 ‘후우’ 입김으로 불씨를 꺼버린 것이다.
“X발. 나랑 장난해요? 형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아 볼래요? 여긴 CCTV도 없어. 우린 그냥 형 뚜까 팬 다음에 도망치면 그만이라고.”
덩치가 도끼눈을 뜨고 준후를 협박했다.
하지만 풋내기 고등학생의 말랑말랑한 협박이 준후에게 통할 리 없었다.
준후는 느와르 영화에 나올법한 거친 인생들을 10배 농축한 형태로 살아봤다.
무림은 그런 곳이니까.
이딴 꼬맹이들은 저잣거리에 시정잡배만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옛 생각 나네.
나도 무림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형태한테 무자비한 괴롭힘을 당했었지.
회상이 끝나기 무섭게.
준후의 이마에 분노의 힘줄이 돋아났다.
눈앞의 학생들은 어른을 상대로도 삥을 뜯는 소악마들이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동급생들에게는 대체 얼마나 더 끔찍하고 잔인한 짓을 저지르겠는가.
이 자리에서 따끔한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너희들 오늘을 악몽으로 기억하게 될 거다.”
“뭔 소리래? 유, 헤드 빙빙?”
덩치가 검지를 본인의 관자놀이에 대고 원을 그렸다.
문답무용.
준후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7명의 학생을 제압했다.
‘S’자를 그리며 학생들 틈을 파고들었고.
그 와중에 각종 장법과 권법과 각법 등을 장대비처럼 쏟아부었다.
학생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본인들이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조화경의 고수인 데다가 벌모세수까지 마친 준후 아닌가. 평범한 고등학생이 준후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파바바박!
퍼어어억!
학생들은 어느새 사이좋게 나란히 땅바닥에 누웠다.
아아아…….
으으으…….
가지각색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기 바빴다.
준후는 쓰러진 학생들의 혈도를 일일이 제압해서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마교도에게 전수받은(?) 분근착골술을 펼쳤다.
분근착골술.
인체의 특정한 부분에 내공을 불어넣어 근골격계, 신경을 인정사정없이 비틀어 버리는 사악한 고문술.
정파가 금지한 그 악독한 무공.
준후는 머리털 나고 인턴 때 딱 한 번 분근착골술을 써 봤다.
이번이 2번째였다.
그만큼 이 학생들은 죄질이 흉악했다.
“…….”
“…….”
아혈까지 점한 상태라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피부가 붉게 익어갔다.
힘줄과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벌어진 입에서는 더러운 개 거품과 침이 흘러내렸다.
“정확히 한 달 뒤에 너희들 학교 다시 찾아간다. 만약 그때도 또래 친구들 괴롭히고 있으면?”
“…….”
“오늘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기대해도 좋아.”
준후는 악마처럼 웃었다.
찌이이익.
완력으로 불량학생들의 교복 이름표를 뜯어냈다.
학생들은 이제 준후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 * *
그 날 저녁.
고깃집의 분위기는 왁자지껄했다.
불판 위에 올라간 삼겹살이 치이익 익어 갔고 그 뒤를 사람들의 두런두런 대화 소리,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따랐다.
“많이 드세요. 배고프실 텐데.”
준후는 잘 익은 삼겹살을 싹둑싹둑 가위로 잘랐다.
삼겹살을 부모님 쪽 불판으로 몰아넣었다.
“고기는 준후, 네가 많이 먹어야지. 밥도 맨날 부실하게 먹을 텐데.”
“그래. 엄마 아빠는 벌써 많이 먹었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히려 준후를 걱정했다.
현재 시간은 오후 7시 30분.
불량학생들을 참교육하고 귀가한 준후는 집에서 푹 쉬었다.
7시쯤 돌아온 부모님과 집 근처 고깃집을 찾았다.
모처럼 맛보는 삼겹살은 맛이 끝내줬다.
꿀맛이었다.
쫄깃쫄깃한 살코기와 고소한 지방의 황금 비율은 그야말로 사기에 가까웠다.
솔직히 준후는 스테이크보다 삼겹살이 더 좋았다.
삼겹살은 먹어도 먹어도 도통 질릴 줄 몰랐다.
“한잔하겠니?”
“네.”
아버지가 소주병을 쥐었고.
준후는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쪼르르르.
소주가 샘물처럼 잔에 고였다.
의국에서 응급콜을 할 시간은 이미 지났다. 뭐 사실 응급콜을 해도 상관이 없긴 했다.
준후야 내공으로 알콜 기운을 싹 증발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준후야, 엄마 눈이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뭐가요?”
“너, 오히려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인다?”
“건강하니까 건강해 보이겠죠.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연예인하고 저는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준후의 익살에 어머니가 피식 웃었다.
어머니가 준후를 건강하게 본 이유.
그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준후가 오늘 벌모세수를 해서였다. 벌모세수 덕분에 골격도 넓어지고 피부도 좋아졌으니까.
“우리 아들 몸이 좋아져서 아영이도 좋겠네.”
“여기서 아영이 여기가 왜 나와요?”
어머니의 19금 농담에 준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 할 만한 나이고 다 알 만한 나이인데 내숭 떨기는.”
“거 애 앞에서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맙시다.”
“당신도 참, 준후가 왜 애예요? 이렇게 잘 생기고 큰 애 봤어요?”
“저희 다른 이야기 하죠.”
준후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부모님의 최근 근황을 물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준후는 부모님과 일주일에 2번, 최소 10분씩 통화를 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안 했구나.”
아버지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준후야, 혹시 김 할머니 기억하니? 너 다니던 고등학교 앞에서 분식집 운영하시던.”
“네. 당연히 기억하죠.”
“몇 개월 전부터 폐암으로 투병하다가 결국 돌아가셨다는구나. 쯧쯧쯧.”
아버지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준후도 김 할머니, 그리고 분식집에 추억이 있었으므로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 정정하시던 분이 폐암이라니…….
뭔가 사실이 아니라 뜬소문을 들은 것처럼 황당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만큼 명백한 진리는 없어 보였다.
“담배는 안 피우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폐암에 걸리셨을까?”
“비흡연자의 폐암 발병율도 10-30퍼센트 정도 돼요. 요리 매연, 간접흡연, 미세 먼지, 폐 질환 이력 같은 것도 영향을 끼칠 수 있고요.”
“한 마디로 운이라는 거네?”
“운도 있고, 환경도 있고, 유전도 있고, 습관도 있죠.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아요.”
준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아버지도 이번 기회에 담배 끊으시는 게 어때요?”
“아이고, 우리 준후 속 시원하게 말 한번 잘했네. 안 그래도 엄마도 아빠한테 금연 이야기했거든.”
잠자코 있던 어머니가 쌍수를 들며 준후의 제안을 반겼다.
2 대 1로 아버지는 순식간에 수적인 열세에 몰렸다.
지원군이 없었으므로.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금연이란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무 자르듯이 한 번 끊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평생에 걸친 피 말리는 싸움이란 말이지.”
“당연히 힘드시겠죠. 그래도 저랑 어머니랑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하지 않겠어요?”
준후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구슬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사의 관점에서였다.
더 깊이 근본을 따지고 들어갔을 때, 준후는 솔직히 금연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만약 담배를 피워서 행복하고.
담배를 안 피웠을 때 불행하다고 치면 말이다.
담배를 피우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준후와 어머니의 파상공세에도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쪽 같은 절개를 뽐내는 선비처럼.
금연을 고민하겠다는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한편 반대편 테이블에선 한참 술 vs 담배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은 술이 더 나쁘다.
한쪽은 담배가 더 나쁘다며.
복싱선수가 복싱을 하듯 논리로 난타전을 벌였다.
가히 세기의 매치가 아닐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 역시 준후처럼 해당 테이블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술 vs 담배.
최악을 가리는 빌런 매치의 결과를 궁금해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밤 10시가 되었다.
달빛이 보드라운 카펫처럼 깔린 길 위를 준후는 부모님과 함께 걷고 있었다.
든든히 식사를 하고.
적당히 흥겹고 얼큰하게 취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져서 행복했다.
준후만의 소확행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났다.
가을과 겨울을 가로질러 봄이 찾아왔고 준후는 어느덧 레지던트 2년 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