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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53화 (253/424)

253화

제48장 이삭(3)

‘아주 몸이 근질근질해서 미칠 지경이지?’

준후는 시호를 지켜보며 코웃음을 쳤다.

병동 사각지대까지 CCTV를 설치한 후.

그러니까 6개월 전부터.

시호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환자에게 나쁜 짓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나쁜 짓이라면…….

고의적으로 환자에게 부실한 처치를 하거나, 목숨을 앗아가는 행동을 말했다.

식물인간 환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CCTV로 동선이 훤하게 노출되니.

시호도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위험부담이 컸을 것이다.

준후는 앞으로도 이렇게 시호를 계속 괴롭힐 계획이었다. 그러다가 시호가 발톱을 드러내면 그때, 시호를 사냥할 계획이었다.

‘D-day’가 멀지 않았음을 준후는 피부로 느꼈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이코패스여.

반드시 그대의 죗값을 물으리라.

“너희 둘 내 이야기하니? 귀가 간질간질한데?”

시호가 준후와 민경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입가에는 예의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위선자의 역겨운 미소였다.

“아뇨. 뭐 찔리는 거 있으세요?”

“농담 삼아 해본 소리야.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준후야. 적당히 해. 넌 왜 예전부터 시호 선배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잠자코 있던 민경이 시호 편을 들었다.

사랑의 콩깍지가 덜 벗겨진 모양이었다.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올 성탄절에 시호 선배한테 고백해 보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민경은 준후에게 연애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당시 준후는 고백하면 쪽박 차는 3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하나, 시호는 민경에게 코딱지만큼도 관심이 없다. 고백해 봤자 상처만 입는다.

둘. 고백에 실패하면 둘 사이만 심각하게 어색해진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셋, 시호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고백을 하려거든 좀 더 길게 봐라.

……라고 준후는 조언해 준 적이 있었다.

민경♥경수 조합이면 모를까.

민경♥시호 조합은 결사반대인 준후였다. 사이코패스와 연애를 해서 얻을 게 상처밖에 더 있을까 싶었다.

민경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걸 지켜볼 수 없었기에 준후는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다.

“아무래도 저는 전생에 시호 선배랑 원수였나 봐요.”

“어머, 애 치프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말이라도 곱게 하든가.”

“됐어. 준후야 원래 솔직한 게 매력이니까.”

시호의 시선이 한참 동안 준후에게 머물렀다.

눈빛이 가히 곱지는 않았다.

화난 기색이 은은하게 숨겨져 있었다.

피차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이.

준후도 시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비장하고 팽팽한 분위기가 흘렀다.

먼저 자리를 떠난 건 시호였다.

시호는 컨퍼런스를 진행하는 탁자로 이동했다.

“안 그래도 치프 돼서 힘든 사람한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진짜 너답지 않아.”

민경이 팔짱을 낀 채 툴툴거렸다.

“시호 선배는 치프가 돼서 힘든 게 아니에요. 정말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어요.”

“무슨 이유?”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하여간 잘났고 비밀도 많으셔. 아영이가 고생이다.”

“아영이 끌어들이기 있기입니까?”

“흥! 네 유일한 약점이 아영이인데 아영이라도 물고 늘어져야지 뭐.”

민경과의 대화가 끝났다.

과장이 가장 나중에 컨퍼런스 룸에 입장하면서 컨퍼런스의 막이 올랐다.

입원 환자 브리핑.

수술 스케줄 정리 등등.

구렁이 담 넘듯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도중 과장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잠깐, 여러분께 전할 기쁜 소식이 있어요.”

과장이 헤죽헤죽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과장은 천성이 사악했지만 감정표현은 솔직한 편이었다.

정말 좋은 일이 있는 것이리라.

“몇 개월 전 소아에게 직접혈관문합술을 펼친 케이스가 있었잖아요?”

“…….”

“곽 교수가 해당 논문을 완성해서 한국 신경외과 협회지 메인페이지에 실렸습니다. 자, 곽 교수를 향해서 우레와 같은 박수!”

짝. 짝. 짝.

짝. 짝. 짝.

과장의 박수 유도에 스태프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노골적인 쇼가 부끄러웠는지 민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참. 준후 너도 꽤 인기인이 됐단다.”

과장이 웃음기가 덜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말씀이십니까? 제가 왜…….”

“곽 교수가 네 논문도 같이 발표했거든.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난 상황에서 시력이 10.0인 ‘시력 천재 레지던트’가 루뻬만 쓰고 집도를 완성했다고 말이야.”

“아. 네.”

준후는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딴 게 논문거리?

수술 당시 멋진 활약을 펼친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학술지에 게재될 만한 사건이냐고 물어보면 의문이 갔다.

케이스도 하나뿐이고.

데이터에서 통찰이나 수술법을 뽑아낼 것도 없는데 말이다.

“무슨 소리니? 반응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뻔했는데. 전 세계 신경외과를 뒤져봐도 이런 케이스는 없을걸?”

“…….”

“루뻬만 쓰고 뇌혈관 문합술을 한 서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집도를 완성한 건 준후이건만 생색은 과장이 내고 있었다.

어휴, 하여간 저 밉상.

“안 그래도 오늘 대전에서 신경외과 교수 몇 명이 올라올 거야. 겸사겸사 준후 너도 보고 간다니까 그렇게 알아라.”

“네. 과장님.”

구경거리가 됐다는 사실이 살짝 불쾌했지만 준후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재은이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준후 선생님. 단상으로 올라와 주세요.”

컨퍼런스 진행을 맡은 시호가 준후를 호출했다.

준후가 단상에 섰다.

오늘은 준후의 케이스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1. 환자 한 명을 선정한다.

2. 해당 환자의 진단 및 처치, 수술 등등의 과정을 의국 스태프 앞에서 설명한다.

3.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다.

이것이 케이스 발표였는데.

환자 한 명을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의술의 숙련도를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치프, 자료 좀 띄워주시겠어요?”

준후의 부탁에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가 준비한 PPT 자료를 빔 프로젝터 스크린에 띄웠다.

관록 있는 과장과 교수들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준후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서울 본원의 케이스 발표는 엄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마음 여린 레지던트는 매서운 질의응답에 눈물과 콧물을 쏙 빼기 일쑤였다.

민경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준후는 케이스 발표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준후는 스승 재현의 논문 자료를 싹 다 암기했다.

뇌종양과 뇌혈관 질환.

적어도 이 두 가지 분야라면 벌써 교수들 뺨 때릴 만한 지식을 갖췄다.

그러니 발표를 두려워할 이유도.

긴장할 이유도 하등 없었다.

준후는 그저 발표를 즐기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비는 해둘까.

본격적인 발표에 앞서서.

준후는 내공을 끌어올려 양손 검지에 담았다.

검지로 좌우 귀 뒤쪽 부위를 가볍게 문질렀다.

해마를 자극하는 ‘점혈법’이었다.

내공이 머리카락과 두피, 두개골을 차례대로 통과한 뒤 해마에 닿았다.

해마 인근에 있는 신경 세포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꼬마전구에 번쩍번쩍 불이 들어오고.

그 불빛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지도가 만들어지는 듯한 강렬한 감각이 생겨났다.

해마 자극 점혈법 덕분에.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스승의 비급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연결됐던 것이다.

휘몰아치는 지식의 폭풍 속에서.

준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지금의 준후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모드였다.

* * *

‘괴물 같은 놈. 뭐 저런 게 다 있지?’

준후의 케이스 발표를 들으며 시호를 혀를 찼다.

어제 6시간씩 두 번.

그러니까 12시간 수술 어시스트를 하고 당직 근무로 밤까지 샜던 준후였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건만.

준후는 쉬는 날 푹 자고 온 사람처럼 팔팔해 보였다.

자료 준비 또한 철저했다.

진단하는 논리가 철근처럼 단단했고.

진단하는 논리를 풀어내는 과정은 비단결처럼 매끄러웠다.

시호는 가만히 교수들을 살폈다.

교수들은 다들 준후에게 홀딱 반해 버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암 그렇지’하고 혼잣말을 내뱉는 교수도 있었다.

준후의 활약에 시호는 슬슬 배가 아팠다.

강렬한 시기와 질투를 느꼈다.

준후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수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던 건 시호였다.

교수들은 항상 시호를 찾았다.

그런데 준후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모두가 준후를 주목했다.

시호는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되었다.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감히 내 쾌락까지 망쳐?

너 때문에 6개월 동안.

살인 충동을 단 한 번도 해소하지 못했다고!

정신이 나가 버릴 지경이라고!

까드드득!

시호는 다시 준후를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시기와 질투가 뜨거운 분노로 진화하고 있었다.

준후의 철통 감시 때문에.

근 몇 개월 동안 살인의 맛을 못 보고 있었다.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시호가 미세 현미경을 고장 내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살인 방법을 썼음에도 준후는 환자를 살려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시호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의 진 빚을 갚아줄 의무가 있었다.

시호는 책상에 올려둔 수첩을 펼쳤다.

준후의 PPT를 건네받은 날이 어제였다. 그래서 시호는 자료를 미리 읽고 고난이도의 질문을 따로 준비해왔다.

왜냐고?

교수와 다른 레지던트 앞에서 준후를 망신주기 위해서!

“그럼 이상으로 T.A(교통사고)로 발생한 두개골 함몰 골절 및 지주막하 출혈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짝. 짝. 짝.

발표가 끝나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럼 혹시 질문 있는 분은 질문 해 주시겠습니까?”

준후가 물었으나.

컨퍼런스 룸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발표 내용이 워낙 알차서 캐물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호에겐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저 질문 있습니다.”

시호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공식적인 발표 자리였기에 준후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네. 시호 선생님 질문해 주세요.”

“S.A.H(Subarachnoid hemorrhage, 지주막하 출혈) 수술 후에 발생할 수 있는 후유증이 설명 안 되어 있네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시호 선생. 너무 깊게 들어가는 거 아니야?”

잠자코 있던 뇌종양 파트 교수 신동훈이 말을 이었다.

“수술 다음 과정까지 다루면 끝이 없을 텐데?”

“외과의라면 당연히 수술 후 후유증까지 공부하고 알아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서 선생은 아직 2년 차잖아.”

“아, 제가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시호는 괜히 멋쩍은 척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준후가 제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고작 레지던트 2년 차라는 걸 교수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킨 것이다.

시호의 수작이 먹혔을까.

많은 교수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 선생님, 지금 질문은 없던 걸로…….”

“아니요, 바로 답변드릴게요. S.A.H 후유증에 관한 거요. 대답은 짧게 해드릴까요? 아니면 길게 해드릴까요?”

준후의 대답이 천하 태평했다.

마치 카페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드릴까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드릴까요 하고 물어보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발표 사례 범위 밖에 있는 내용을 알고 있을 리 없을 텐데…….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지?

어느 순간.

준후에게 한 방 먹였다는 통쾌함은 사라지고 긴장과 불안함을 느끼는 시호였다.

“뭐, 아는 게 있으면 최대한 길게 이야기해 주시죠.”

시호가 신속하게 응수했다.

이것은 질 수가 없는, 아니,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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