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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54화 (254/424)

254화

제48장 이삭(4)

시호를 비롯한 다른 스태프들의 시선들이 준후에게 집중되었다.

다들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단순한 질의응답처럼 보이는 순간이지만, 그 속에 사실 준후 vs 시호의 대결 구도가 숨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지주막하 출혈 수술 후 환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후유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준후가 포문을 열었다.

“가장 흔한 후유증이라면 급성 수두증(머리에 뇌척수액이 참)입니다. 전체 환자의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죠.”

“…….”

“수술 후 재출혈이 발생하는 빈도도 높은 편이고요. 그 밖에 혈전증, 아주 드물게는 심부정맥 혈전증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질문을 빤히 예상했다는 듯.

준후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준후가 정답을 말했기에 시호는 더 이상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분한 기분이었다.

되로 주려다가 말로 받은 찜찜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나만 바보가 돼.

생각을 해라. 시호야.

언제까지 저 앙큼한 녀석한테 당하고만 있을 거야.

“답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술 후 후유증만 알고 치료법을 모르면 반쪽짜리 지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

“구체적인 치료법도 궁금합니다.”

점잖게 허를 찌르는 질문.

시호의 혀끝은 펜싱 칼처럼 날카로웠다.

“수두증이라면 튜브를 연결해 머릿속에 가득 찬 뇌척수액을 drainage(배액, 액체를 빼낸다.) 해줘야겠죠.”

“…….”

“만약 상태가 심각하다면 뇌척수액을 복부로 보내서 복부가 뇌척수액을 흡수하게 하는 수술. 즉 션트(shunt) 수술을 고려해 볼 수도 있겠죠.”

“…….”

“혈전증이 의심되는 경우 환자에게 압박 스타킹을 신기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젠장!’

지렁이 주름처럼 접히는 시호의 이마.

준후의 대답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어설픈 대답이 아니었다. 신경외과 교재에서 추천하는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이 녀석, 교재를 통째로 씹어 먹었나?

설령 예습을 했더라도 대답이 이렇게 기계적으로 튀어나올 수는 없는 건데.

“혈전증 예방에 압박 스타킹은 어떤 도움이 되죠?”

“다들 아시다시피 하지에 혈액이 정체되기 쉬운데요. 압박 스타킹을 신으면 다리에 압력이 높아집니다. 다리에 압력이 높아지면 다리에 있던 혈액이 심장으로 잘 올라가는 효과가 있죠.”

“압박 스타킹이 혈전 예방에 도움이 안 된다는 논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글쎄요. 케이스에 따라 다른 거 아닐까요?”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혈액 순환을 위해서라면 환자가 두 발로 걷는 게 가장 좋겠죠. 하지만 저희는 신경외과 소속입니다.”

“…….”

“의식이 없고 제 몸도 못 가누는 환자에게 걷기 운동을 시킬 순 없죠. 때문에 압박 스타킹은 그에 대한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크으으윽…….’

시호는 속으로 고통스러운 침음성을 삼켰다.

준후의 논리를 파고들어 균열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준후는 철혈의 요새였다.

외과 스킬로도.

의학 지식으로도.

시호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여간 볼수록 특이한 놈이야.

환자나 보호자를 챙기면서 감정이입을 잘하는 의사들은 보통 순진한 편이잖아.

그래서 보통 내 손아귀에서 놀아나기 마련인데…….

준후 녀석은 전혀 아니란 말이지.

오히려 내 머리 꼭대기 위에서 날 가지고 놀고 있어.

불쑥 시호의 마음속에 답답함과 불쾌함이 솟구쳤다.

무언가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마저 발생했다.

하지만 시호는 꾹 참았다.

싸구려 범죄자들과 시호를 가르는 경계.

그 경계는 바로 절제력이었다.

절제력 덕분에 시호는 그동안 수십 건의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평범하게 사람들 속에 녹아들 수 있었다.

“더 질문하실 게 있나요?”

시호가 침묵을 지키자 이번에는 준후는 오히려 시호에게 질문을 했다.

적어도 시호가 보기에는.

준후의 표정이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까불 테면 또 까불어 봐.

그런 건방진 분위기였다.

‘빌어먹을!’

아직 하지 못한 질문이 많았지만 시호는 꿀꺽 삼켰다.

이대로라면 준후의 주가만 높여주는 형세였다.

게다가 자신을 향한 스태프들의 시선도 어쩐지 비우호적으로 바뀐 듯했다.

준후를 노골적으로 공격했으니까.

“질문은…… 없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서 선생님.”

“별말씀을. 다른 분들은 질문 없으신가요?”

“…….”

“없으시면 이상 케이스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짝. 짝. 짝.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유도한 것도 아니건만.

시원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시호도 스태프들을 따라 박수를 치긴 했다. 소리는 조금도 나지 않았지만.

“시호야. 잠깐 나 좀 보자.”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난 후, 시호를 찾은 사람은 뜻밖에 과장이었다.

“네. 과장님.”

시호는 얼른 과장의 뒤를 따랐다.

예감상 준후에게 반격할 기회가 예상보다 10배는 더 빨리 다가온 것 같았다.

* * *

“와…… 선배, 케이스 발표할 때 완전 지적이었어요. 하도 청산유수로 말해서 교수님인 줄 착각했다니까요.”

1년 차 인철이 컨퍼런스 당시를 회상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전 정규 일과가 시작되면서 준후는 인철과 당직실로 이동해 차팅(charting)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짜식, 뭘 그 정도 가지고. 너도 나중에 다 이렇게 돼.”

“그냥은 안 될 것 같은데요?”

“당연히 공짜는 아니고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해둬야지.”

준후는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케이스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보다 시호에게 엿을 먹일 수 있어서 더 기쁜 준후였다.

케이스 발표 당시.

시호는 노골적으로 준후를 공격했다.

질문은 스터디 내용 바깥에서 끌어왔고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질문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준후 앞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개수작일 뿐이었다.

준후는 가히 걸어 다니는 의학 교재였다. 실제로 교재를 거의 달달 외웠고, 스승의 비급까지 몽땅 흡수해 버렸다.

뇌종양 파트.

뇌출혈 파트.

이 두 파트의 의학 지식만큼은 이미 교수처럼 해박했다.

그래도 마냥 좋아만 해선 안 되겠지.

당분간 특별히 더 조심해야겠어.

준후는 시호를 떠올리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준후의 방해와 감시로 인해 오랫동안 살인을 오로지 참기만 했던 시호였다.

그런 시호가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는 준후조차 알지 못했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아, 참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선배!”

“뭔데?”

“선배는 시호 선배랑 왜 이렇게 사이가 나빠요? 시호 선배도 좋은 분 같던데.”

인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인간이 좋은 사람 같다고?”

“네. 인사도 잘 받아주시고. 잘 웃기도 하시고. 환자랑 보호자한테 친절하시고. 어휴, 말하다 보니 숨이 찰 지경이네.”

“나는 숨 막힐 지경인데?”

준후가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알아야지. 내면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달라 보일 거다.”

“으음…… 어렵네요. 스님들 선문답 같아요.”

“괜찮아. 이해를 못 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니까.”

준후는 가볍게 인철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잡담 종료 후 준후는 업무에 집중했다.

컨퍼런스 회의록을 작성하고.

회진 때 메모한 오더를 추가하고.

간호사들의 병동 콜을 받아 개인적으로 오더를 추가하고.

입퇴원 기록지와 퇴원 요약지, 경과 기록지 등등.

다양한 차트 업무를 박살 냈다.

타다다다닥!

파바바바박!

준후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는 흡사 기관총 소리처럼 요란했다.

실제로 총알 대신 글자가 튀어나온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현재 준후의 타자수는 분당 5,000.

작년 타자수가 분당 3,000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거의 170퍼센트 가까이 상승했다.

신체를 최적화하는 벌모세수.

호월십이수의 7성 성취.

이 두 가지 타자 속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뭐 도와줄 거 없니?”

빠르게 본인 업무를 다 끝낸 준후가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엥? 벌써 끝나셨어요? 일 시작한 지 10분도 채 안 되신 것 같은데요?”

“그럼 내가 안 끝났는데 끝났다고 거짓말을 했겠니?”

“그냥 해본 말이었죠. 역시 준후 선배, 존경합니다.”

인철이 준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장난이었지만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준후의 타자 속도는 한마디로 미쳤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준후의 손가락이 제대로 안 보일 지경이었다.

신기루처럼 환영이 아른거리는 느낌이었다.

그 빠른 타자 속도로 준후는 남들이 180분 걸릴 일을 18분 만에 해냈다.

왜 그런 속도가 가능한지.

어떻게 그런 속도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준후의 타자 속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일을 번개처럼 마무리 지은 준후는 항상 주변 동료부터 챙겼다.

동료나 후배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면 마사지를.

일이 바빠 보이면 일을 거들어주었다.

그 후에야 개인 공부를 시작했다.

이런 준후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근데 선배 별명에 왜 소닉이 없죠? 타자 속도가 이렇게 빠른데?”

“소닉이면 그 고슴도치 캐릭터 말하는 거지?”

“네.”

“별명이라면 모겐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거든. 괜히 별명 더 붙여서 나 피곤하게 만들지 마.”

“넵! 그리고 일은 안 도와주셔도 됩니다. 오늘 정도면 충분히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래.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고.”

인철과의 잡담이 끝날 무렵.

드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시호가 등장했다.

불길하게도 시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준후야 바빠?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무슨 이야기인데요?”

“네 거취에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이야기지. 여기서 할래? 아니면 나가서 할래?”

준후는 인철을 슬쩍 쳐다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준후의 뜻을 읽고 시호가 먼저 당직실을 나갔다.

그 뒤를 준후가 따랐다.

두 사람이 마주 선 곳은 창가가 있는 병동 복도 끝이었다.

초봄의 눈 부신 햇살이 두 사람 사이로 흘러들어 왔다.

햇살은 분명 곱고 아름다웠으나 한편으로는 준후와 시호의 경계를 분명히 나누고 있었다.

둘은 영원히 섞일 수 없다는 듯.

“제 거취라고 할 만한 게 있나요? 너무 거창한 표현 아닙니까? 레지던트는 병동에서 수련하는 게 전부인데?”

“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빙 돌리지 말고 결론부터 말씀해 주시죠.”

“원한다면.”

시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레지던트 필수 업무에 지방 분원 파견이 포함된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네.”

준후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호의 말처럼 파견 업무는 필수였다.

4년의 레지던트 생활 중.

최소 한 번 이상은 타 지역 분원에서 3-6개월 동안 수련해야 했다.

치프부터 시호, 민경까지.

준후의 선배들도 전부 통과한 과정이었다.

“과장님이 나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시더라. 이번 주 중으로 파견 보낼 사람을 정하라고.”

음흉한 표정의 시호가 준후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서준후, 네가 가라. 대전 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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