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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55화 (255/424)

255화

제48장 이삭(5)

대전 분원이라…….

준후는 속으로 읊조렸다.

대전 분원은 준후와 악연이 있는 곳이었다.

동기 성호 형이 마지막으로 후송된 장소.

뇌사 판정을 받고 장기를 기증했던 장소.

그곳이 바로 신원대학교 병원 대전 분원이었다.

그래서일까 대전 분원만 떠올리면 준후는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하지만 시린 추억과 별개로 대전 분원은 준후가 수련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대전 분원은 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었는데 그 특성상 응급 및 외상 환자가 많았다.

즉, 지금보다 더 많은 환자를 보고 지금보다 더 많이 수술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준후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시호의 표정을 살폈다.

별명이 ‘미소 천사’인 시호는 평소와 달리 입가에 미소가 싹 지워져 있었다.

그 표정의 숨은 의미를 준후는 알 것도 같았다.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요?”

낯익은 목소리, 민경이 창가 쪽으로 다가왔다.

준후와 시호 중간에 서서 삼각형의 구도를 만들어냈다. 준후와 시호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공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별거 아니야. 파견 이야기하고 있었어. 준후한테 대전 분원을 추천했거든.”

“하긴 슬슬 파견 갈 때도 됐긴 하네. 준후야, 잘 됐다. 대전 분원이면 네 스타일 아니야?”

민경이 축하한다는 투로 말했다.

의술 수련에 미친…….

환자 이야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깨는 준후를 꿰뚫어 본 말이었다.

“글쎄요.”

“너답지 않게 미적거리네.”

시호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대전 분원 상황이 심각해. 며칠 전에 레지던트 2년 차 한 명이 ‘탈주’했다더라. 일 잘하는 사람 보내 달라고 아우성이야.”

“…….”

“일반 차팅 업무나 처치하고 수술은 의국에서 너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당연히 네가 가야지.”

“그럼 제 대답은…….”

“대답은?”

“싫습니다. 전 무조건 서울에 남겠습니다.”

준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눈빛은 굳건했으며 목소리에는 거절의 의지가 충만했다.

대전에 가야 하는 이유.

반대로 대전에 가면 안 되는 이유.

둘을 놓고 저울질했을 때.

후자의 이유가 압도적이었다.

네 알량한 수법에 넘어갈 줄 알았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지.

내가 무림맹 정치질 짬밥만 10년 차라고.

“와! 대박! 준후야, 진심이니? 네가 대전을 마다한다고?”

민경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민경 입장에서는 준후의 선택이 뜻밖이었으리라.

“네. 가기 싫습니다.”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엄밀히 말해서 난 너한테 제안하는 게 아니야. 명령하고 있는 거지.”

시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본인이 불쾌하다는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그럼 과장님이나 서 교수님께 제가 직접 말씀드리면 되죠? 대전에 가기 싫다고.”

“너…… 이 자식…….”

“업무가 바빠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드리죠.”

준후를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경쾌한 발소리가 시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 * *

“쟤 왜 저러니? 늦게 사춘기라도 왔어?”

시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준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고.

또 만만치 않았던 저항이라서, 시호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꿈에서 막 깬 것처럼 현실감의 농도가 옅었다.

“저도 완전 놀랐어요. 준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민경이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부탁을 거절하는 모습은 처음인데.”

“민경이 네가 설득 좀 해줄래?”

“제가요?”

“내 말은 안 들을 게 뻔하잖아. 그래도 네 말이라면 귓등으로는 듣겠지.”

“일단 노력은 해볼게요.”

“고맙다. 역시 민경이 너밖에 없어.”

시호는 싱긋 웃으며 민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민경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민경을 이용하는 일은 시호에게는 너무나 쉬웠다.

그나저나 조금 의외인걸?

작년쯤에는 고백을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민경이 고백하면 받아주고.

민경과 교제하면서 민경을 가스라이팅 한 후.

자신의 노예처럼 써먹으려고 했던 시호였다.

하지만 전개가 예상과 빗나갔다.

민경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음에도 끝끝내 고백은 하지 않았다.

뭐, 큰 상관은 없었다.

굳이 연인이 아니더라도 민경은 써먹을 곳이 많은 자원이었다.

“근데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말해.”

“만약 준후가 파견 안 가겠다고 끝까지 버티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별수 있나. 과장님한테 말씀드려야지.”

“준후가 ‘꼭’ 대전에 가야 하는 거예요?”

“꼭!”

시호는 힘주어 과장했다.

준후가 대전에 가야 하는 이유를 시호는 100개라도 넘게 댈 수 있었다.

준후를 내쫓는 일에 그만큼 진심이었던 것이다.

준후가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시호는 속옷까지 훌렁 벗고 복도에서 막춤을 출 각오마저 되어 있었다.

“날씨 참 좋네. 이런 날은 의사 노릇 때려치우고 한강이나 갔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병원에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까워요.”

“이번 달 중으로 쉬는 날 맞춰서 데이트라도 할까?”

“데…… 데이트요?”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남녀 둘이 만나면 데이트지. 그럼 약속한 거다?”

“……네. 선배.”

“슬슬 가자.”

시호는 민경과 함께 창가를 벗어났다.

계획은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했다.

무조건!

* * *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걸린 정오까지.

준후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일단 1년 차 인철을 아기처럼 돌봤다.

인철이 넣은 오더들을 확인하고, 소변줄 삽입, 비위관(콧줄)삽입 등등의 처치를 지켜보며 유익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준후에게 인철은 감사의 의미로 ‘쌍따봉’을 날렸다.

준후는 간간이 간호사의 병동 콜을 받아 노티를 추가했다.

병동에 C.A(Cardiac Arrest, 급성 심정지)가 터져서 다급하게 CPR을 실시한 적도 있었다.

준후는 누구보다 먼저 현장으로 달려갔다.

갈비뼈를 보호하는 ‘내가기공’ 흉부 압박으로 환자를 소생시켰다.

재활을 위해 병동을 거닐던 환자가 갑작스러운 현기증으로 쓰러지려는 걸 발견하고 ‘경공’을 밟아 환자를 부축하기도 했다.

환자는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병원은 ‘죽음’이라는 ‘지뢰’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곳.

준후는 긴장이라는 칼날을 날카롭게 벼르고 있었고, 그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매섭게 활약할 수 있었다.

“휴.”

응급실 진료를 마치고 준후는 당직실로 복귀했다.

의자에 앉아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방금 막 진료를 본 응급실 환자는 뇌진탕 환자였다.

얼굴에 검버섯이 유난히 활짝 핀 60대 어르신이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단다.

머리 엑스레이와 기본 검사(피 검사, 소변 검사, 심전도)로는 확진이 어렵고.

뇌출혈이 의심되는 상황.

준후는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펼쳤다.

벌모세수 덕분일까.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분에 불과했다.

일반 뇌혈관 조영술의 총 소요 시간이 1시간인 점을 감안하면 기적과도 같은 속도였다.

다행히 환자의 혈관 손상은 없었다.

어르신이 두통만 호소했기에 준후는 A.A.P(아세트아미노펜)을 3일 치를 처방해서 보냈다.

이상이 없다는 말에 어르신이 고맙다고 말하며 꽃처럼 활짝 웃으셨다.

검버섯이 그 천진난만한 미소의 거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노인의 검버섯은 흉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토양의 비료처럼 건강해 보였다.

당직실은 준후 혼자였다.

오전 첫 타임 스크럽에 들어간 경수는 아직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인철도 30분 전에 수술방에 들어갔다.

준후의 수술 스케줄은 오후에 몰려 있었다.

일단 1시간 후.

민경에게 뇌혈관 조영술을 배울 테고.

잠시 쉬었다가 뇌혈관 파트 민석 교수가 진행하는 뇌동맥류 코일 색전술의 어시스트로 들어갈 것이었다.

나도 슬슬 본때를 보여줄 때가 됐지.

조금만 기다려.

나도 네놈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으니까.

준후는 시호를 떠올리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대전 분원 파견을 원했으면서도 속마음과 달리 거절한 이유.

그 이유는 단순했다.

준후가 대전으로 내려가면 시호가 기다렸다는 듯 ‘살인 행각’을 저지를까 걱정돼서였다.

시호가 환자와 보호자를 건드리고.

혹시라도 아영에게까지 악마의 손을 드리운다면?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준후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시호와의 악연도 슬슬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

지난 4개월 동안.

준후는 아무도 모르게 시호의 뒤를 밟았다. 시호의 각종 범죄를 밝혀낼 증거를 찾아 열정적으로 헤맸다.

시호가 풋풋했던 1년 차 때부터 진료 봤던 환자들의 차트를 일일이 훑었다.

모래사장에서 진주 찾기였지만.

준후는 이를 악물었다.

눈에 불을 켜고 차트들을 꼼꼼히 독파해 나갔다.

지금은 병동에 없지만 과거 시호와 접촉이 있었던 간호사들을 만나서 인터뷰 같은 것도 진행했다.

그런 걸 왜 물어보세요?

간호사들이 곤두선 표정으로 경계했으나 준후는 여유롭게 대처했다.

존경하는 사람의 옛 시절이 궁금했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한 번 웃어주면 그만이었다.

미남계는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았던 시간들.

다행히 성과는 있었다.

꼬리가 길어서 밟히는 바가 있었다.

준후는 시호의 살인 패턴을 낱낱이 밝혀냈다.

그 수법은 크게 3가지로 교묘했다.

본인을 노출하지 않는, 그야말로 그림자 살인과 같았다.

1) 시호는 ‘펜타닐’을 즐겨 썼다.

펜타닐은 최근 대두되고 있는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였다.

중환자실에 침투해서 시호는 중환자에게 몰래 펜타닐을 투여했다. 환자는 발작을 일으켰고 금방 죽었다.

중환자의 죽음은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보호자는 물론이고 스태프들까지 죽을 사람이 죽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준후는 차트 분석을 통해 시호의 펜타닐 처방 건수가 남달리 많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굳이 입으로 꺼낼 필요가 없었다.

2) 시호는 ‘억지 수술’을 강행했다.

뇌사 환자 또는 식물인간 환자.

이런 중증 환자들은 회복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보통 수술하지 않기 마련이거늘, 시호는 보호자들에게 희망을 호소하며 수술을 강행했다.

이는 짬밥이 어느 정도 찬, 3년 차부터 써먹은 수법이었다.

대상은 응급 환자.

수술 가능한 교수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맞아야 했기에.

억지 수술 케이스는 많지 않았다.

눈알이 빠지도록 시호의 수술 기록지를 찾아보면서 준후는 해당 케이스를 찾아냈다.

3) 시호는 ‘엉터리 수술’을 했다.

타 병원에서 수술받은 전력이 있을 때.

또는 환자가 순박해 보일 때.

시호는 일부러 수술에서 실수를 했다.

수술 후 후유증을 앓는 환자를 보며 시호는 쾌감을 느꼈으리라.

엉터리 수술 케이스는 준후가 직접 경험한 바 있었다.

시호와 만난 직후.

경추 디스크 수술을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시호가 엄한 신경까지 갈아버리려고 해서 준후가 뜯어말렸던 적이 있었다.

그밖에도 시호의 악행은 소소하게 3가지가 더 있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준후가 밝혀내지 못한 악행은 더 많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므로 준후는 결코 시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악당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네가 날 파견 보내기 전에.

내가 널 경찰로 보내주마.

맹렬한 각오를 다지던 중, 드르륵 당직실 문이 열렸다.

피곤해 보이는 경수가 준후 곁에 앉았다.

“수술 빡셌지?”

“말도 마.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손도 아프고. 죽을 지경이야.”

“우리 사이에 마사지해달라는 말을 뭐 그렇게 돌려서 하고 그러냐.”

“들켰냐?”

준후는 경수에게 추궁과혈 마사지를 해주었다.

경수는 금방 팔팔해졌다.

혈색이 돌고 분위기가 밝아졌다.

경수와 잡담을 나누다가 준후는 본론을 꺼냈다. 대전 분원 파견 이야기였다.

“경수야. 내가 원래 부탁 같은 거 잘 안 하잖아? 이번 기회에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

경수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준후는 차분하게 입술을 뗐다.

“네가 가주라. 대전 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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