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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56화 (256/424)

256화

제49장 태풍(1)

터벅. 터벅.

준후는 뇌혈관 조영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경수와의 대화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대전에 가줄 수 있냐는 부탁에 경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래’라고 대답했다.

놀란 건 오히려 준후였다.

그래서 추가 질문도 준후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정말 괜찮겠어? 대전 분원은 서울보다 몇 배는 더 힘들 거야.

-안 괜찮을 건 또 뭐 있어? 어차피 대전 분원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그래도…….

말끝을 흐리면서 준후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친구에게 험지로 가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유쾌할 리 없었다.

동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준후는 무림에서부터 끔찍하게 싫어했다.

‘무결검’이라는 별호는…….

단순히 무공 실력이 뛰어나서 붙은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뒤처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일 처리가 깔끔해서 붙은 별호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준후조차 어쩔 방법이 없었다.

시호를 처단하기 위해서, 준후는 반드시 서울에 남아 있어야 했다.

함정을 팔 시간이 필요했다.

-끝까지 안 물어볼 거야? 내가 왜 너한테 대전에 가달라고 하는지?

-조금 궁금하긴 한데…… 갔다 와서 듣는 게 좋겠네. 너도 다 계획이 있어서 이러는 거 아니겠어?

-이해해 줘서 고맙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그래. 은혜 갚은 까치 말고, 내가 바로 은혜 갚은 경수다. 나중에 전래동화라도 만들어 봐. 아, 참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경수가 말을 이었다.

-주변 사람한테 부탁하는 거 너무 어렵고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 넌 다른 사람한테 뭔가를 부탁한다는 게 폐를 끼치는 거라고 생각하지?

경수의 말은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 준후의 폐와 심장을 동시에 꿰뚫어버렸다.

몸이 굳고 입이 얼어붙었다.

무공 초식이 파훼를 당한 것처럼, 준후의 저 깊은 내면이 파훼 당하고 말았다.

-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부탁을 ‘안’ 한다는 것도 ‘오만’한 거야. 생각해 봐. 자기가 모자란 부분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힘들어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이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거 아니겠어?

-…….

-그런 의미에서 부탁을 ‘안’하는 것도 일종의 ‘왜곡된 완벽주의’라고 난 생각한다. 솔직히 네가 나한테 부탁해 줘서 고마워. 이제야 날 동료로 봐주는 것 같아서.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어.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에게 받은 충격으로.

목소리가 쉬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날 동료로 봐주는 것 같아서’라는 말이 준후에게는 가장 인상 깊었다.

경수의 지적이 맞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준후는 ‘말로만’ 주변 사람을 동료로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들을 동료가 아닌 자신이 돌봐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얕잡아봤던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경수도 준후의 부탁을 받고 기뻤으리라.

누군가에게 부탁받는다는 건…….

부탁받은 사람이 부탁받은 일을 처리할 능력이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면서 준후는 자신의 세계가 확 넓어진 쾌감을 느꼈다.

허물을 벗은 것처럼 상쾌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던 곳에 빛이 들어오면서 기분 나쁜 습기와 축축함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무공이 아니라 내면에 성취를 이룬 준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이윽고 멈춰선 장소는…….

[뇌혈관 조영실]

오늘의 메인 이벤트 중 하나가 준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뇌혈관 조영실은 수술방과 미묘하게 구조가 달랐다.

중앙에 검사대가 놓였고.

검사대에 위쪽.

그러니까 환자가 누웠을 때 머리가 있을 장소에 C-arm이 위치했다.

C-arm은 알파벳 C자 모양을 띤 방사선 검사 장치였다.

C-arm 옆에는 즉석에서 CT 영상을 판독할 수 있는 3대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검사에 필요한 각종 처치 물품들은 벽 한쪽 면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준후는 사수인 민경, 어시스트인 소독 간호사와 조영술을 준비 중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검사 도구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둔탁한 쇳소리를 토해냈다.

드레싱 카트 위로 곡반, 트레이, 바드, 포셉 통들이 하나둘 올라왔다.

빈 공간 없이 빽빽해졌다.

소독 간호사가 알콜솜이 담긴 통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짧은 순간 알싸한 알콜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후각이 예민한 준후는 코가 시큰거렸다.

뇌혈관 조영술이라…….

준후는 자신이 배워야 할 검사를 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신경외과에서 뇌혈관 조영술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검사 중 하나였다.

뇌혈관 조영술은 뇌혈관의 상태를 가장 정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검사였다.

수술 계획을 세우고 또 수술 후 치료 계획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준후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펼칠 수 있었다.

‘내공 뇌혈관 조영술’은 조영제 대신 내공을 사용하며 환자에게 부작용은 1도 없었다.

검사 및 결과가 나오는 데 1시간 가까이 걸리는 뇌혈관 조영술과 달리 준후의 ‘내공 혈관 조영술’은 1분이면 만사 오케이였다.

실로 사기적인 검사법이랄까.

하지만 ‘내공 혈관 조영술’에도 피할 수 없는 단점이 존재했으니…….

바로 다른 사람과 검사 결과를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기에.

어쨌거나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둬야지.

뇌혈관 조영술을 배워야 나중에 카테터 시술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준후, 너 무슨 생각해?”

곁에서 수술 준비를 하던 민경이 물었다.

준후가 민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뇌혈관 조영술을 할 때도 수술할 때와 마찬가지로 감염을 막기 위해 수술 복장을 착용했다.

그래서 민경의 얼굴 중 눈만 보였다.

이제 보니 쌍꺼풀이 꽤 길었다.

“아뇨. 그냥 아무것도.”

“에이, 설마 천하의 서준후가 긴장한 건 아니겠지?”

“사실 너무 무서워요. 손발이 달달 떨리는 걸 억지로 참고 있다고요.”

준후가 짐짓 익살스럽게 팔다리를 떨었다. 그 모습에 민경이 낄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못 말리겠다. 너는. 근데 준후야.”

“네.”

“진짜 대전 안 갈 거야? 내가 봤을 때는 대전 파견 적임자는 딱 너인 것 같은데.”

민경의 수다가 이어졌다.

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된 대전에 근무하면 응급 환자 진료 볼 일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수술방에 더 많이 들어가고.

그러면 실력을 키울 수 있고.

어쩌고저쩌고…….

마스크를 쓰지 않았으면 침이 한 바가지는 튀었을 만큼.

민경은 준후를 유혹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냉정한 눈빛으로 민경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말이 다 끝났을 때 단 한마디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시호 선배가 시켰죠?”

송곳 같은 질문에 민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능적으로 준후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부터 하는 소리는 선배한테 하는 소리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

“한 번 더 개수작 부리면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치프한테 전해주세요.”

“…….”

“아셨죠?”

“아…… 알긴 아는데 표현이 너무 심하지 않아?”

민경의 목소리에 거부감이 담겼다.

“그런 말 들어도 싸요. 그 인간은.”

“에휴.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잘 생각하셨어요. 괜히 저랑 치프 사이에 끼면 선배만 괴로워요. 잠자코 있는 게 최선이에요.”

“근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요?”

“내 생각엔 아무리 봐도 너랑 시호 선배는 영혼의 파트너 같은데 말이야. 정작 둘은 맨날 물고 뜯고 치고받고 싸우잖아.”

“영혼의 파트너가 아니라 영혼의 적수겠죠.”

준후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마스크 뒤에 숨은 미소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다.

무림의 원수가 적일도였다면.

현대의 원수는 시호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본인밖에 모르는 쾌락 살인마라는 점이었다.

준후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준후에게 고통을 안긴 악마들이라는 점도 있다.

다만 적일도와 시호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적일도는 준후에게 목숨을 잃기 전까지 준후를 압도한 반면.

시호는 준후에게 음모를 간파당하고 번번이 좌절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시호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시호가 준후의 약점(?)인 아영에게 언제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아영이 시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준후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대전 파견에 저항하면서 시호를 최대한 빨리 쫓아낼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한 20분 정도 남았네?”

민경이 벽시계를 응시하고 말을 이었다.

“조영술 요령 꼼꼼하게 알려줄 테니까 잘 기억해둬. 너도 잘 알지? 환자 앞에서 일일이 설명했다간 환자가 너 초짜인 줄 알고 긴장한다는 거.”

“암요. 잘 알죠.”

“오케이, 시작할게.”

민경의 설명을, 준후는 두 귀로 듣고 머릿속에 저장했다.

물론 사전에 공부를 해두긴 했다.

하지만 책을 통한 간접 경험과 피부에 와 닿는 실전 경험의 간격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특히 환자의 생사가 서전의 손에 달려 있는 외과 계열에서는.

과연 현장에서 터득한 민경의 팁은 꿀이었다.

달달했다.

덕분에 조영술에 실패하지 않을 확률이 95퍼센트에서 99퍼센트로 증가한 느낌이었다.

준후의 몸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똑.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문밖에서 환자가 들어간다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영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60대 남성이었다.

환자가 워낙 깡말라서인지 걸치고 있는 수술복이 힙합 스타일처럼 헐렁해 보였다.

환자의 느린 걸음이 수술대로 향했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오른팔로 끌고 다니는 링거 폴대 바퀴에서 거추장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환자의 이름은 민영태.

두통 및 어지럼증으로 외래를 방문하였고.

CT 촬영 결과 후교통동맥에 뇌동맥류가 의심되어 뇌혈관 조영술을 받게 되었다.

“어르신, 이쪽으로 누워보시겠어요?”

준후가 환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굳게 입술을 다문 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행동이 위태로워 보인 것과 달리 환자의 눈빛은 굳건했다.

병에 겁먹은 사람이 아니라 병과 싸우고 있는 사람의 기개가 담겨 있었다.

이런 환자가 정말 무서운 환자다.

……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본인이 본인 몸을 완벽하게 컨트롤 하는 것처럼.

스태프들도 처치를 완벽하게 하길 바라는 스타일 같았기에, 환자가.

과연 스태프들의 도움을 뿌리치고 어르신이 수술대에 누웠다.

“잠시만요.”

준후는 환자의 손목부터 살폈다.

조영제 테스트에서 이상은 없었다.

알레르기 반응은 정상이었다.

그렇게 코앞으로 다가온 조영술이 준후는 오히려 설레었다.

카테터를 사용하는 검사는 오늘 처음 시도하는데도 두려움을 잊었다.

새로운 의술 = 더 많은 환자를 살릴 능력을 갖추는 일.

머릿속에 이미 확고한 공식이 박혀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조영술에 긴장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준후는 환자에게 조영술의 절차와 부작용을 설명했다.

그리고 곧장 만화공을 펼쳤다.

단전에 잠들어 있던 내공이 분수처럼 솟구쳐 전신을 휘어 감았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오감이 몇 배로 증폭되었다.

동시에 각각의 오감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수술방에 존재하는 모든 감각 정보가 블랙홀처럼 준후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뇌혈관 조영술 엄청 어려워.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오늘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자. 알았지?”

준후 곁에 있던 민경이 속삭이듯 말했다.

환자를 의식한 목소리였다.

“선배, 방금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자고 하셨죠?”

“응. 근데 왜?”

“그럼 CAG(Cerebral AngioGraphy, 뇌혈관 조영술) 이번 한 번에 성공해도 되죠?”

“어쭈, 매번 잘한다고 칭찬했더니 선 넘네?”

준후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원래 제 특기잖아요. 선 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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