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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57화 (257/424)

257화

제49장 태풍(2)

“환자분.”

“네.”

“바지 살짝 내려주시겠어요?”

준후의 지시에 환자의 몸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환자의 바지춤이 스르륵 내려갔다.

긴 세월을 버텨낸 두 다리가 마른 가지처럼 앙상했다.

환자가 느낄 수치심을 최소화하기 위해, 준후는 재빨리 환자의 허벅지에 식탁보처럼 넓은 수술포를 깔았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카테터를 삽입할 우측 대퇴 동맥(허벅지 동맥)을 포비돈으로 소독했다.

환자의 허벅지 털은 이미 말끔하게 제모 되어 있었다.

감염 예방을 위한 선 조치였다.

“리도카인(국소 마취제), 주세요.”

“여기요.”

민경이 내민 1cc 주사기를, 준후가 손에 쥐었다.

“따끔합니다.”

푹, 주사기가 혈관 주변 피부를 관통했다.

준후는 동맥 인근 부위를 마취하고 환자와 잡담을 나눴다.

과묵한 줄 알았던 환자는 의외로 수다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묻지 않은 것들을 술술 풀어냈다.

가령 최근에 키우기 시작한 반려견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다거나, 큰아들이 얼마 전 장가를 갔다거나 등등.

긴장해서 말이 많은 것인지 원래 말이 많은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잔뜩 굳었던 환자의 얼굴이 다소 펴졌다는 것.

이마에서 꿈틀거리던 10개의 지렁이 주름은 이제 3개까지 줄어들었다.

준후는 환자와의 잡담을 즐기는 편이었다.

환자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편이었다.

-환자한테 너무 정 주지 마. 나중에 너만 상처받아. 혹시라도 수술이나 치료받고서 문제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주변 동료들은 그런 준후를 만류하는 편이었다.

지나치게 감정을 소모하면 그만큼 강력한 후유증이 찾아온다고 경고했다.

나중에 환자가 도를 넘는 부탁을 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준후는 생각이 달랐다.

의사는 있는 힘껏 환자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환자란…….

자세히 보고 예뻐해야 하며.

오래 보며 사랑해야 할 존재다.

이런 인식이 있어야만 의사는 성장하고 할 수 있다고 준후는 믿었다.

실제로 준후가 존경하는 명의들은 환자를 끔찍할 정도로 아꼈다.

환자가 소중하니까 늘 최선을 다하고 발전도 게을리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준후의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지금 걷고 있는 올곧은 길을 완주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힘 빼고 편안히 계세요. 빨리 검사 마치고 누렁이 보러 가셔야죠.”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환자.

누렁이 생각만 해도 기쁜지.

이마에 주름이 하나 더 사라졌다.

“그럼 시작합니다. 10번 블레이드요.”

민경이 내민 칼날을 준후는 스칼펠(칼대)에 꽂았다.

딸칵.

칼대에 칼날이 고정되는 소리가 똑딱이 버튼 소리처럼 경쾌했다.

준후는 미리 소독한, 또 미리 제모한 환자의 대퇴동맥에 0.5밀리미터 길이의 절개창을 만들었다.

스으으윽.

메스를 따라 찢어지는 피부.

찢어진 피부에서 울컥 쏟아져 나오는 혈액들.

무척 얕고 짧은 절개창을 만들고 있음에도 준후의 손에 전해지는 감촉은 그렇지 않았다.

메스가 아니라, 장검을 들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피부를 살짝 긋는 게 아니라, 마두의 가슴팍을 일(一)자로 길게 찢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좌우의 폐가 다 드러날 정도로 깊게.

이유는 간단했다.

앞서 펼친 만화공 때문이었다.

만화공을 통해 준후가 모든 감각을 몇 배로 증폭해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좋지.

감각이 증폭되면 수술을 섬세하게 할 수 있으니까.

보통 의료 사고도 집중력이 떨어지고 감각이 둔해지면서 생기기 마련이니까.

마스크 뒤로,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만화공을 사용해서 좋은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무림에서 칼부림을 하는 것처럼 수술을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역시 감각이 증폭돼서였다.

준후의 몸은 수술방에 있었지만.

준후의 머리는 어느새 수술방을 전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후는 ‘무결검’이라는 별호를 얻은 후.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다.

* * *

“거즈 주세요.”

“네.”

준후가 거즈로 카테터를 삽입할 절개창을 닦아냈다.

거즈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텅, 쓸모를 다한 거즈가 곡반에 버려졌다.

“카테터 주세요.”

“몇 미리로 드릴까요?”

“2mm짜리로 주세요.”

“너무 얇은 거 아니에요? 4mm 정도가 딱 좋아 보이는데.”

준후를 서포트 하던 민경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 앞이라서 존댓말을 사용 중이었다.)

카테터는 얇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었다.

목적과 상황에 따라서.

굵은 바늘을 써야 할 때가 있고 얇은 바늘을 써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 시술하는 환자의 경우.

4mm가 정석이었다.

“선배, 환자 혈관이 너무 가늘어요. 4mm 쓰면 혈관이 터질 것 같아요.”

준후가 민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속삭이듯 말했다.

“난 괜찮아 보이는데? 노인 환자 혈관이 보통 이렇지 않나?”

“제가 아까 만져봤는데 환자분 혈관이 동년배 혈관에 비해 탄력도 없고 가늘어요. 2mm 꼭 써야 해요.”

“알았어.”

민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준후의 판단은 옳았다.

2mm 굵기의 카테터를 쓴 덕분에 카테터는 환자의 대퇴동맥에 무사히 진입했다.

와! 대단하긴 하네.

오늘 처음 뇌혈관 조영술하면서 오히려 날 가르치고 있잖아?

민경은 준후에게 순수히 감탄했다. 시기심이나 열등감 따위는 0.1그램도 느끼지 않았다.

그럴 시기는 벌써 까마득하게 지났고.

준후를 질투해 봐야 손해를 보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토끼가 호랑이처럼 사냥을 할 수 없다고 한탄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말이다.

준후의 천재적인 재능을 감안해도 뇌혈관 조영술은 만만한 시술이 아니었다.

민경도 2년 차 때부터 뇌혈관 조영술을 배웠는데.

3년 차인 지금도 뇌혈관 조영술을 완벽하게 소화하지는 못했다.

이유라면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일반 수술이 마취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과 달리, 뇌혈관 조영술은 환자가 깨어 있다. 그래서 더 부담이 되고 긴장된다.

둘째로 시야와 손이 따로 놀아서 힘들다. 눈은 정면 모니터를 부고 손은 또 따로 움직여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섬세한 힘 조절이 필수다.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치면 카테터가 엉뚱한 혈관으로 진입하고, 이는 끔찍한 불상사를 낳을 수 있었다.

이렇게 가장 큰 문제만 3가지인데 자잘한 문제들까지 꼽자면 끝도 없는 것이 뇌혈관 조영술이었다.

앞선 이유 때문에 뇌혈관 조영술은 교수님들이 직접 진행하는 케이스가 훨씬 많았다.

‘별 탈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듯.

노심초사하는 민경의 심정을 준후는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야무진 솜씨로 카테터를 조종할 따름이었다.

왼손으로 카테터 입구 부분을 잡아 고정하고.

오른손으로는 가이드 와이어를 카테터 안으로 쑥쑥 밀어 넣었다.

준후의 시선은 모니터에 붙박이로 붙어 있었는데.

착각인지 몰라도…….

준후는 눈을 깜빡거리는 법을 잊은 듯했다.

부릅 뜬 눈이 감길 줄 몰랐다.

마치 누군가와 목숨을 건 눈싸움을 하는 듯 눈빛이 비장했다.

그러고 보니 준후는 항상 이랬다.

모든 시술이나 수술에서 항상 필사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점들은 후배지만 존경스러웠다.

“선배. 저 말고 모니터를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준후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 때문이었다.

“뭐야? 모니터만 보고 있으면서 내 시선을 어떻게 알아차려?”

민경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왼쪽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오른 눈으로 잠깐 선배를 봤거든요.”

“미친! 그게 되니? 너 사람 맞아? 로봇 아니고?”

“저는 돼요. 그리고 시술하면서부터 선배가 발끝으로 바닥을 세 번 두드린 것도 알고요.”

“…….”

민경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준후의 말 그대로였다.

민경은 긴장하면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건드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준후를 걱정하면서 대충 3번 정도 그랬다.

“역시 서준후, 너는 불가사리야.”

“불가사의 아니고요?”

“……그래. 니 잘났다.”

민경은 더 이상 준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준후를 걱정하는 것도 멈췄다.

이를테면 준후는 4차원에 사는 존재였다.

3차원에 사는 민경은 결코 준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준후가 무림 출신이라는 것도.

서씨세가의 비전 무공인 만화공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기에.

사실 민경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스으윽.

스으윽.

준후의 손놀림은 갈수록 섬세하고 빨라졌다.

급기야 뇌혈관 조영술에서 가장 고난이도인 코스.

그러니까 심장의 대동맥궁에서 경동맥궁으로 카테터를 올려보내는 코스까지 박살 내버린 준후였다.

놀랍게도!

카테터는 단 한 번도 혈관벽을 손상시키지 않았고!

카테터가 폐동맥이나 쇄골 동맥으로 엇나가는 일도 없었다.

처음 조영술을 한다고는 믿기지 않는 실력.

민경이 처음 조영술을 했을 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치프가 이러다가 환자를 잡겠다며 중간에 시술을 중단시켰는데 말이다.

분명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민경이 긴장을 풀고 몸에 힘을 빼기 시작했던 시기가.

곁에 있는 준후가 1년 차가 아닌 교수처럼 민경은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카테터가 일사천리로 뇌혈관까지 진입했다. 뇌혈관 조영술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환자분. 지금부터 조영제 투여할 거거든요.”

준후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리가 화끈거리고 눈이 번쩍할 겁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침 삼키지 말라고 하면 침도 삼키면 안 됩니다.”

“침 삼키는 게 무슨 상관이죠?”

환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침을 삼키는 미세한 동작도 검사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선생님, 조영제 주세요.”

“네.”

민경이 준후에게 조영제가 담긴 주사기를 건넸다.

준후가 그제야 눈을 깜빡거렸다.

[시술 중에는 절대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다. 시술이 중단됐을 때만 눈을 깜빡거린다.]

민경은 준후의 숨겨진 버릇 하나를 오늘 또 배웠다.

감탄스럽게도…….

준후가 가진 사소한 버릇들은 다 환자를 위한 것이고, 다 수술을 완벽하게 성공하기 위함이었다.

실로 존경할 만한 마인드 세팅이었다.

“자, 침 삼키세요. 눈이 번쩍합니다.”

푹!

준후가 카테터 노즐에 주사기 바늘을 삽입했다.

뒤이어 조영제를 투여했다.

정면 모니터에 비친 뇌혈관의 내부가 순간 잿빛으로 가득 찼다.

조영제 때문이었다.

찰칵, 조영제가 혈관에 투여된 순간이 파노라마 영상으로 저장되었다.

우측 내경동맥의 영상 촬영은 무탈하게 종료되었다.

“환자분 잘 참으셨습니다.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준후가 조영제가 담긴 주사기를 제거했다.

주르륵.

그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내부 압력 차로 피가 쏟아진 것이다.

“세척하세요.”

민경이 준후에게 생리식염수가 담긴 주사기를 건넸고, 준후는 생리식염수로 카테터 주변을 세척했다.

쏴아아아.

주사기에서 뿜어지는 생리식염수의 물줄기가 거셌다.

세척을 끝난 후에도 준후는 바빴다.

엄지로 수액줄을 톡톡 튕겼다.

수액줄이 남은 공기가 혈관을 막지 않도록 예방하는 동작.

즉, 공기 색전증을 예방하는 동작이었다.

뭐 하나 빠뜨리는 게 없는 준후를 보며.

민경은 혀를 찼다.

내가 조영술을 가르쳐주러 온 거야? 아니면 배우러 온 거야?

지금 상황이 혼란하고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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