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제49장 태풍(3)
오늘 처음 해보는 뇌혈관 조영술이었지만, 준후는 능숙한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시야는 모니터에 압정처럼 박혀 있었다.
카테터 입구를 잡은 왼손은 단단하게 고정되었고 오른손은 가이드 와이어를 쑥쑥 밀어 넣었다.
이후 조영제 투입.
생리식염수 세척.
공기 색전증 예방을 위해 수액줄을 손가락으로 튕기기 등등.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고의 검사 결과를 위해서 준후는 환자를 안심시켰고 환자가 수술 도중 움직이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했다.
집도의를 흔히 지휘자에 비유하는데.
준후는 2년 차 레지던트임에도 뇌혈관 조영술의 전 과정에 참여해 탁월한 진두지휘 솜씨를 뽐냈다.
“인간적으로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나 자존심 좀 상하려고 한다?”
곁에 있던 민경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작년부터 배웠어도 너처럼 못한다고.”
“운 좋게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하긴 재능 말고 무슨 설명이 가능하겠어? 미세 현미경 없이도 뇌혈관 문합술을 했는데.”
민경의 인정은 빨랐다.
그동안 준후가 보여준 활약들이 눈부셨기 때문이리라.
준후가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에는 크게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만화공.
다른 하나는 초식화였다.
준후는 지금까지 10차례 정도 교수들의 뇌혈관 조영술을 어시스트했다.
그런데 그걸 맹하게 넋 놓고 지켜봤냐고 하면…….
절대 아니었다!
무림에서 무공을 암기하듯 준후는 교수들의 세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다 암기했다.
그리고 암기한 동작들을 현재 고스란히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즉, 준후의 시술 = 교수의 시술이란 공식이 성립됐다.
‘이제 제일 중요한 곳이 남았네.’
준후는 흐릿했던 긴장감을 일깨웠다.
가이드 와이어가 막 후교통동맥에 진입했다.
후교통동맥은 관자놀이 근처에 위치했고.
CT 검사상 뇌동맥류가 존재한다고 의심 가는 장소였다.
“화끈합니다. 침 삼키세요.”
지시를 마치고 카테터에 조영제를 투입했다.
순간 빈 공간으로 하얗던 뇌혈관에 회색 아지랑이가 몰려들었다.
조영제가 투입되면서 뇌혈관의 형태는 두께가 더욱 선명해졌다.
극히 찰나의 순간!
준후의 두 눈은 후교통동맥이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 것을 놓치지 않았다.
무림 출신으로.
쾌속으로 날아오는 수십 개의 암기의 종류와 방향과 속도까지 감지하는 준후였다.
이 정도 눈썰미는 눈썰미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행이네.
걱정했던 것보다는 결과가 훨씬 좋아. 머리를 열 필요 없이 카테터 수술로 완치 가능하겠어.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촬영한 사진 같이 볼까?”
한편 민경은 준후와 달리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죠. 방금 P.C.A(Posterior Communicating Artery, 후교통동맥) 촬영한 사진 띄워주실래요?”
“네. 선생님.”
준후가 지시를 내리자 소독 간호사가 금방 영상을 모니터에 띄웠다.
모니터를 향한 민경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저기 관자놀이 쪽 뇌혈관이 부풀어 있다. 크기가 25mm는 넘어 보이는데…… 저 정도면 거대 뇌동맥류 아닌가?”
민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게도 뇌동맥류는 크면 클수록 수술이 어려웠다.
수술이 어려울수록.
환자는 위태롭고 서전은 고생하기 마련이었다.
“아니요. 제 눈에는 10mm 사이즈로 보이는데요?”
준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엥? 10mm? 농담이지? 저게 어딜 봐서 10mm밖에 안 돼?”
“10mm 맞는데요?”
“요거 요거 선배 놀리는데 맛 들였네, 소현 쌤 눈에는 어떻게 보여요?”
민경이 소독 간호사 소현의 의견을 구했다.
소현이 번개처럼 대답했다.
“25mm 맞지 않나요? 제대로 확인해 볼게요.”
딸칵. 딸칵.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바빴다.
이윽고 마우스 포인터 선이 부풀어 오른 뇌혈관의 크기를 측정했다.
부푼 뇌혈관의 크기는 놀랍게도 28mm였다.
환자의 머릿속에 강력한 시한폭탄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아까 보니까 시술 중에 눈도 안 감던데…… 혹시 눈이 피곤해서 착시가 보이니?”
“아뇨. 10mm 맞아요.”
준후는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고집했다.
민경이 그런 준후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민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준후는 둘을 전부 알았다.
“환자분. 저희가 영상 해석 중이라서요. 잠시만 대기해 주세요.”
“그러세요.”
환자가 흔쾌히 동의했기에.
준후는 민경과 본격적으로 속삭이듯 대화했다.
“그럼 누구 말이 맞는지 내기하실래요? 지는 쪽이 야식 사기 어때요?”
“결과가 이미 나왔는데 어떻게 내기를 해? 설마 아직까지 뇌혈관 크기가 10mm 우길 거야?”
“잘 생각해 보세요. 과연 제가 근거도 없이 이러고 있을지.”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어? 둘이면 둘이지 셋이겠어? 셋이면 셋이지 넷은 아닐 테고.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민경이 뜸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뇌혈관은 25mm 맞아. 나도 절대 양보 못 해.”
“저도 민경 쌤한테 한 표 던질게요.”
소현마저 민경의 편을 들었지만 준후는 외롭지 않았다. 진실이 준후의 편이었다.
“소현 선생님. 영상에 파노라마랑 슬로우 걸어서 다시 재생해 주세요.”
“영상을 느리게 연속 재생한다고 뇌혈관이 줄어들겠니?”
“끝까지 보세요.”
잠시 후 영상 재생이 끝났다.
소현과 민경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영상을 A부터 Z까지 보고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과 준후 사이에 놓인 피지컬의 차이였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소현 선생님. 영상 다시 재생해 주시고 제가 스톱하면 멈춰 주세요.”
“네.”
“더. 더. 더. 스톱.”
준후의 지적에 소현이 영상을 정지시켰다.
학생들 수준에 맞는 눈 맞춤 교육이 시작되었다.
“지금 조영제 투입된 혈관 보이죠?”
“네.”
“응.”
“근데 자세히 봐요. 상대적으로 먼 쪽 혈관, 그러니까 바깥쪽 혈관이 먼저 회색으로 물들잖아요.”
“어? 진짜네? 아까는 몰랐는데.”
민경의 눈이 왕 방울만 해졌다.
고개가 모니터에 점점 가까워졌다.
“원래대로라면 말이야. 조영제가 투입된 혈관 입구부터 회색으로 변하고, 바깥쪽 혈관이 나중에 회색으로 변해야 하는데. 완전 반대잖아?”
“이제 제대로 보셨네요.”
준후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영제가 순간 이동을 했을 리는 없고 결론은 하나뿐이죠.”
“혈관 중첩이구나.”
“네. 바로 그겁니다.”
명쾌한 결론이 내려지면서 민경과 소현이 수긍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쉽게 말하면…….
후교통동맥의 뇌동맥류는 28mm가 아니었다.
혈관이 중첩되어서 커 보인 것뿐이었다. 조영제의 비상식적인 움직임이 그 증거였다.
예를 들면 이랬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B혈관에 먼저 조영제가 들어가고.
비교적 큰 크기의 A혈관에 나중에 조영제가 들어간다.
그런데 영상을 치밀하게 못 보면.
이 둘이 교묘하게 하나의 혈관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근데 준후야.”
“네.”
“너는 영상에 슬로우랑 파노라마도 안 걸고 혈관 중첩을 맞췄던 거야?”
경악에 물든 민경의 눈동자가 준후에게 머물렀다.
소현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렇다고 봐야죠. 이래 봬도 제 별명이 모겐족이잖아요.”
준후도 두 눈으로 씽긋 웃으며 대답했다.
모겐족이라는 별명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럴 때는 무척 큰 도움이 됐다.
무림에서 단련한 무지막지한 시력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는 별명이 바로 모겐족이었다.
“휴우. 졌다. 졌어. 널 이길 생각을 한 내가 바보지. 그래서 야식은 뭐 먹고 싶은데?”
“오랜만에 하와이안 피자요. 다른 피자 주문은 절대 안 되고요.”
준후의 주문에 민경은 속으로 절규했다.
파인애플 피자라니…….
No~!~!~!
* * *
첫 뇌혈관 조영술을 마치고 신경외과 병동으로 복귀하는 준후의 발놀림은 경쾌했다.
무림에서 준후의 별호가 ‘무결검’이었다면 병원에서 준후의 별호는 ‘무결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준후는 단 한 번의 실수도 한 적이 없었다.
아직 레지던트 2년 차라서 업무 범위가 좁은 덕분도 있겠지만.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카테터 시술도 할 만하네.
뇌동맥류 코일 색전술도 빨리 배우고 싶다.
하나를 배우면 나머지 열을 배우고 싶은 준후였다. 의술을 향한 준후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당직실로 복귀하기 전.
준후는 직원용 휴게실을 찾았다.
점심시간 언저리라 휴게실은 버려진 것처럼 휑했다.
그래도 중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위험이 있었기에, 준후는 가부좌를 틀지 않은 채 운기조식을 펼쳤다.
만화공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고작 20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병동 당직실에 복귀한 준후는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1년 차 인철의 차팅 업무와 시술 업무도 봐주었다.
띠리링~
중간에 응급실 콜이 왔다.
환자는 헬스를 하던 중 허리를 다쳤는데, 요추 염좌 정도로 의심되었다.
준후는 응급실에 직접 내려가지 않고 대신 인철을 보냈다.
인철이 맡아도 충분한 환자였다.
특유의 업무 처리 능력을 십분 발휘한 덕분에 할 일은 금방 동나 버렸다.
달그락. 달그락.
고무 재질의 인체 모형과 수술 도구들이 책상 위로 올라왔다.
봉합 연습을 위한 세팅이 순식간에 끝났다.
준후는 자투리 시간도 허투루 버릴 생각이 없었다.
끼기기긱.
딸칵.
오른손에 쥔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단단히 조였다.
봉합사는 nylon 9-0.
봉합사는 1-0부터 11-0까지 있었는데 11-0의 봉합사가 가장 얇았다.
한 번 시험해 볼 때가 됐지.
내 수준이 어디까지인지.
작년 하반기에 6-0까지 가능했으니까 이번엔 9-0으로 시작하면 되겠지?
봉합 모형을 응시하는 준후의 눈빛이 비장했다.
벌모세수를 하고.
호월십이수를 7성까지 익힌 후.
준후는 자신의 한계를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수준이라면 최소 9-0은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본격적인 봉합이 시작되었다.
푹!
봉합침이 모형에 난 상처를 꿰뚫었다.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봉합사가 상처의 중심부를 일(一)자로 통과했다.
봉합사를 당겼다.
벌어졌던 상처가 오므라졌다.
휘리리릭.
양손이 화려하고 우아하게 움직이면서 상처에 단단히 매듭이 탄생했다.
준후의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
벌모세수와 호월십이수 훈련의 효과가 눈부셨다.
확실히 전보다 봉합이 쉬웠다.
예전이라면 중간에 실을 끊어먹거나.
손이 엉켜서 실이 엉켰을 텐데…….
지금은 손가락의 움직임, 손목의 움직임, 팔의 움직임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전보다 유기적이고 섬세한 동작이 가능했다.
‘좋았어. 이대로만 가자!’
어느새 무아지경이 준후를 덮쳤다.
주변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끼면서 준후는 오로지 봉합에만 몰두했다.
술이 아니라 봉합에 취해 버렸다.
風淸月朗(풍청월랑).
鏤月裁雲(누월재운).
殘月曉星(잔월효성).
손놀림에 다양한 무공 이치가 하나둘 더해졌다.
준후의 봉합은 하나의 예술로 재탄생 중이었다.
웬만한 신경까지 봉합할 수 있는 9-0 봉합사를 이용한 고난이도 봉합술이.
마치 일반 흉터를 봉합하는 3-0 봉합술처럼 간단하게 펼쳐졌다.
하루라도 빨리 더 실력 있는 서전이 되고 싶은.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은 준후의 집념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결과였다.
“말도 안 돼. 레지던트 2년 차가 9-0 봉합술을 펼친다고? 저렇게 완벽하게?”
“거봐. 내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했지?”
낯선 목소리에 준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봉합에 집중한 나머지 기척을 놓친 모양이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후한 인상의 교수 두 명이 준후 곁에서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 중 한 명은 낯이 익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