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제49장 태풍(4)
이시덕은 대전 신원대학교 병원의 신경외과 교수였다.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동안에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중년 교수였다.
서울에 있는 세미나에 참석한 후.
시덕은 후배인 신동훈 교수를 따라 서울 본원에 잠시 방문했다.
보고 싶은 스태프가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서준후’.
동훈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준후는 박재현을 능가할 천재적인 재능의 레지던트라고 했다.
2년 차에 불과함에도 의료지식이 해박하고 각종 수술 스킬은 이미 펠로우 뺨을 때릴 정도라고 했다.
-동훈아, 너답지 않게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니? 어디 비교할 때가 없어서 박재현 교수랑 비교를 해?
세미나에서 만난 동훈과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시덕은 준후 이야기를 건너 듣고 코웃음을 쳤다.
박재현은 이시덕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서전이었다. 국내 유일의 트리플보드 신경외과의기도 했다.
그런데 ‘서준후’라는 풋내기 레지던트가 박재현보다 뛰어날 수 있다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그 발언은 박재현을 모욕하는 처사다.
시덕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준후에 관련된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미세 현미경 없이 펼친 모야모야병 환자에 관한 뇌혈관 문합술.]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신경외과 학회에 경악할 만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시력이 10.0인 의사가 루뻬(광학 안경)만 착용한 채 소아의 뇌혈관을 4바늘이 꿰맨 의사가 있다는 소식이 학회를 강타했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이 준후였다.
그래서 시덕은 오늘 세미나가 끝난 직후 동훈과 함께 서울 본원의 당직실을 찾았다.
소문의 준후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봉합 연습 중인 청년이 준후임을 알아보았다.
준후의 외모는 의사보다는 배우에 더 잘 어울렸다.
우유처럼 하얗고 말끔한 피부.
선명한 이목구비.
시원시원하고 길쭉한 목과 팔과 다리 등등.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점.
그 점은 시덕과 동훈이 당직실에 들어올 때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준후가 연습에 ‘몰입’했다는 점.
그리고 준후가 연습 중인 봉합사의 크기가 무려 9-0이었다는 점이었다.
레지던트 2년 차면 말이다.
이제 막 개두술을 배우고 3-0 봉합사로 두피 정도나 꿰매는 시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준후는 때깔부터 달랐다.
감히 9-0 봉합사로 봉합 연습을 한다고?
9-0 봉합사를 다루려면 최소 펠로우에서 교수급의 숙련도가 필요한데?
그래서일까.
시덕은 동훈을 처음 봤음에도 눈앞의 청년이 준후라고 확신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준후가 시덕과 동훈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봉합 연습 중이었구나. 잠깐 대화 좀 괜찮겠니?”
“물론입니다.”
“이쪽은 대전 분원 신경외과 과장인 이시덕 과장님이란다. 동시에 내 의대 선배기도 하지.”
뇌종양 파트 조교수이자 준후와 각성 수술을 함께했던 동훈이 시덕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과장님. 서준후라고 합니다.”
“그래요. 평소 동훈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실력이 아주 대단하다고 하던데.”
시덕의 눈빛이 책상을 향했다.
책상에 놓인 실습 모형의 상처가 깔끔하게 봉합되어 있었다.
총 10개의 매듭은 탄탄했고.
매듭 간의 간격은 자로 잰 것처럼 균일했다.
시덕은 남은 봉합사의 길이를 계산해 보았다.
그리고 금방 결론을 내렸다.
준후가 봉합하면서 실을 단 한 번도 끊어뜨리지 않았음을.
실로 괴물 같은 재능이었다.
“난 솔직히 준후 씨에 대한 소문이 과장됐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직접 보니 오히려 축소된 경향이 있군요.”
“과찬이십니다. 저야 과장님이나 교수님들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근데 벌써부터 9-0 봉합사로 연습하는 이유가 있어요?”
시덕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눈에는 중학교에 입학해서 대학교 공부를 미리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환자는 제 성장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수술의 한 조각이 되려면 평소에도 실력을 쌓아야겠죠.”
“…….”
“저희 신경외과는 인원이 워낙 부족해서 늘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준후의 대답이 야무졌다.
레지던트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도 벅찰 텐데…….
준후는 다른 레지던트와 달리 미래를 보고 있었다.
확실히 그릇의 크기가 남달랐다.
이후로도 시덕은 준후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준후는 고민 없이 즉답을 했다.
고민이 없다는 건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고민을 해왔기에 벌써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냈다는 뜻이었다.
그 증거로 준후의 대답은 속이 깊었다.
내면을 공명케 하는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시덕은 준후가 탐났다.
미치도록 손에 넣고 싶었다.
애가 타고 극심한 갈증이 났다.
준후 같은 마인드와 실력을 갖춘 레지던트는 한국, 아니, 전 세계를 뒤져도 없으리라.
이렇게 멋진 보물 원석을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는 일은 고문과 다름없었다.
“준후야.”
시덕이 나지막이 준후를 불렀다.
대화 도중, 서로 말을 편하게 하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네. 과장님.”
“대전에서 근무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니? 최소한 파견이라도 와보지 않을래?”
시덕은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미끼를 던졌다.
“서전을 성장케 하는 건 누가 뭐래도 환자란다. 그리고 대전은 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어서 아주 많고 다양한 환자를 볼 수 있단다.”
“…….”
“너만 원한다면 최대한 네 편의를 봐주마. 2년 차라고 해도 단독 수술을 할 수 있게 해주겠어.”
“선배,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닙니까?”
잠자코 있던 동훈이 심히 걱정했다.
레지던트 2년 차에게 단독 수술을 맡긴다?
실로 위험한 발상이었다.
만약 수술 도중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뒷감당은 법원에서 피고로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보호자가 소송을 걸 테니까.
“그리고 준후를 훔쳐가는 일도 도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나는 선택권만 줬을 뿐이야.”
시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민 중인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
준후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거절의 침묵이 아니라 고민과 갈등의 침묵이었다.
시덕의 조언이 워낙 파격적이었던데다가 취향 저격이었던 것이다.
2년 차에 단독 수술이라…….
단독 수술만 가능하다면 준후의 실력이 일취월장으로 초상승할 수 있었다.
그동안 초식으로 저장했던 교수들의 수술들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었다.
-네. 꼭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목구멍에서 간질간질거리는 말을 준후는 꾹 참았다.
준후도 진심으로 대전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시호’라는 ‘시한폭탄’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분원도 갈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흠. 유감이구나. 순순히 간다고 하는 게 좋았을 텐데.”
시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유순하고 점잖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마치 시덕의 내면에서 한 마리의 맹수가 깨어난 듯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난 원하는 건 반드시 당장 손에 넣는 타입이야. 그러니까 넌 결국 대전에 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
“기왕이면 끌려가는 것보다 제 발로 오는 게 낫지 않겠니?”
“과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어디도 갈 수 없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살면서 제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준후와 시덕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어느 한쪽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누구도 먼저 서로에게 굽히지 않았다.
강(强) 대 강(强)의 싸움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두 사람의 기 싸움으로 당직실 공기가 숨 막힐 즈음.
누군가의 콜폰이 울렸다.
상황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동훈의 콜폰이었다.
동훈이 가운에서 콜폰을 꺼내 통화를 연결했다.
“어 왜? 무슨 일인데?”
-……
“하…… 곤란하네.”
“무슨 일인데 한숨부터 쉬고 난리야?”
시덕이 동훈에게 물었다.
“수부외과에서 펠로우급 스태프를 빌려달라고 하네요. 지금 손가락 접할 수술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스태프가 없다고.”
동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수부외과의 사정은 딱하다만 펠로우급 스태프는 신경외과에도 천금처럼 귀했다.
그리고 현재 신경외과 펠로우들은 전부 수술 중이었다.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을 하고 있군.”
“딱 잘라서 거절하기가 좀 그렇잖습니까? 수부외과에는 저희 신경외과 출신 교수님과 스태프들도 많은데.”
“난 거절하라고 말한 적 없어.”
“거절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요? 그런 묘수가 있으면 진작 알려주시지 그랬어요.”
“지금 말하려고 하잖아.”
시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운을 뗐다.
“수부외과에서 펠로우급 어시스트가 필요하다고 했지?”
“네.”
“코앞에 주인공이 있는데 왜 그렇게 애를 태워?”
“아니, 선배님. 준후는 레지던트 2년 차 아닙니까?”
시덕이 항의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부외과는 분명 펠로우 급 어시스트를 원했다.
준후를 보내는 건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없어. 수부외과는 펠로우가 아니라 펠로우‘급’ 어시스트를 원했으니까.”
“…….”
“9-0 봉합사를 다룰 수 있으면 펠로우‘급’ 어시스트 아닌가?”
시덕이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엄지로 등 뒤에 있는 당직실 출입구를 가리켰다.
“서준후.”
“네. 과장님.”
“수습은 내가 할 테니까 넌 당장 수술실로 가봐. 수부외과 도와줘.”
“저 30분 뒤에 다른 수술 어시스트 있습니다.”
“그것까지 다 감안해서 하는 말이니까 어서 가 봐. 책임은 내가 진다.”
준후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터벅. 터벅. 터벅.
잰걸음으로 당직실을 벗어났다.
솔직히 수부외과 수술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쁜 준후였다.
30분 뒤에 있을 척추 수술보다 손가락 접합 수술이 훨씬 더 힘들고 고난이도였기 때문이다.
[고난은 나를 성장시킨다.]
이는 준후가 무림에서부터 품고 있었던 좌우명 중 하나였다.
눈앞의 고난이나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기를 쓸 때야 비로소, 인간은 본인의 한계를 깨뜨릴 수 있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성격 한 번 시원시원해서 좋네. 우리 과장도 저런 면을 좀 본받았으며 좋으련만.
은근히 드러난 권위적인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준후는 시덕에게 호감을 느꼈다.
묵직한 카리스마와 화끈한 추진력이 마음에 들었다.
‘대전이야…… 시호를 처리하고 가도 늦지 않겠지.’
준후의 발걸음은 서서히 빨라져 어느새 청풍보를 밟기 시작했다.
좁은 복도 사이를 비집고 달림에도 그 속도와 움직임이 신묘했다.
준후는 행인 중 누구와도 옷깃조차 스치지 않았다.
마치 ‘비 사이로 막 가’는 수준이었다.
한편 당직실.
동훈은 팔짱을 낀 채 불만 섞인 표정으로 시덕을 응시했다.
“왕 노릇은 대전에서 해야지, 여기서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만 곤란하게.”
동훈의 입이 잔뜩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친한 선배인 시덕과 있을 때는 평소보다 위엄이나 무게감이 떨어지는 동훈이었다.
“준후를 훔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오시고. 또 준후를 멋대로 수부외과 어시스트로 보내고.”
“…….”
“뒷감당은 다 제 몫입니다. 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너라서 이러는 거야. 넌 다 해결할 능력이 있잖아.”
“휴우. 이럴 땐 제가 서울에 있는 게 다행이네요.”
동훈은 다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시덕은 폭주 기관차였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시덕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시덕뿐이었다.
그러니 일찍 체념하는 게 속 편했다.
“근데요. 선배.”
“응. 왜?”
“준후는 무슨 수로 빼돌릴 겁니까? 요즘 우리 과장도 슬슬 준후에게 눈독 들이고 있어요. 대전에 보내달라고 순순히 내줄 리가 없을 텐데요?”
동훈이 호기심에 물었고.
시덕은 별거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넌 아직도 뭘 모르는구나. 세상에 너희 과장만큼 다루기 쉬운 사람이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