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제50장 선 넘네(3)
지난 1년간 눈부신 성취를 이뤘지만 정맥문합술은 가시밭길이었다.
준후도 알고 있었다.
연습이 아닌 실전이었고.
다소 두꺼운 인대나 힘줄을 꿰매는 것이 아닌 혈관을 꿰매야 했다.
그것도 실오라기처럼 얇은 정맥을.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규식의 컨디션으로는 수술을 이어갈 수 없었다.
다른 교수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사방이 낭떠러지인 위태로운 상황.
수술을 매듭지을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준후뿐이었다.
“안 돼! 네 실력이 아무리 빼어나도 정맥문합술은 무리야.”
규식이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매서웠다.
“다른 부위면 몰라도, 정맥은 문합에 실패했을 때 뒷감당이 너무 어려워.”
“…….”
“조금만 더 쉬었다가 내가 마무리 지으…….”
규식의 말끝이 흐려졌다.
다시 두통과 현기증이 찾아왔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규식이 휘청거렸다.
“저보다 교수님의 몸 상태가 더 위태롭지 않습니까?”
“그래도 네게 맡기는 것보단 100배 나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부디, 제게 기회를 주세요.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준후는 애원하듯 말했다.
무림에서 지낼 때부터, 준후는 이런 상황이 죽도록 싫었다.
최악의 사고가 빵 터졌는데.
자신은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말이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절망감은 뼈에 스며들어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준후가 맥을 못 췄던 사건이 잘 풀렸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 사건은 대부분 배드 엔딩이었다.
그래서 준후는 불안과 초조를 물리치기 힘들었다. 환자가 이대로 손가락을 잃을까 봐.
비극이 되풀이되는 건 싫어.
내가 나를 구원하고 더불어 환자도 구원하겠어.
그것만이 살길이야.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맥문합술을 포기할 수 없다고, 준후는 결심했다.
극한의 의견 대립 후.
수술방에 무겁고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필리핀 환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스태프들의 갈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한국말은 몰라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환자는 아직 다 붙지 않은 자신의 손가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저 손가락이 잘 붙기를.
잘 붙은 손가락으로 나중에 만날 아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잠자코 있던 소독 간호사가 운을 뗐다.
팽팽하게 맞서던 규식과 준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인공 혈관을 구해서 준후 선생님에게 문합을 시켜보면 어때요? 미리 실력 테스트를 해보는 거죠.”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교수님도 제 실력을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준후가 화색을 띠었다.
왜 이런 단순한 생각을 못 했을까?
규식과의 ‘싸움’에 몰입한 나머지, 규식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일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해보나 마나야. 2년 차가 정맥문합술이라니 어림도 없다고. 일반 봉합도 아니고 락킹 수쳐를 해야 하는데…….”
규식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출입 불가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준후가 봉합을 한다고 치지. 그럼 어시스트는 누가 할 건데?”
“제가 하겠습니다!”
소독 간호사 혜선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자네는 또 왜 그래?”
“이래 봬도 접합 수술만 3년 차입니다. 웬만한 보조는 할 수 있어요.”
“후우. 어쩔 수 없지. 준후 넌 어서 인조 혈관 가져와.”
“네. 교수님.”
드디어 기회를 잡았구나!
준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수술대를 벗어났다.
수술방 냉장고로 이동해 포장지에 보관되어 있는 인조 혈관을 챙겨서 돌아왔다.
투명한 비닐 포장을 벗겼다.
환자의 정맥보다 0.5mm미터 정도 더 두꺼운 인조혈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관 중인 혈관 중에서 가장 얇은 걸 가져왔습니다.”
“인조 혈관은 자연 혈관보다 더 탄성이 좋지. 쉽게 말해 파열이 잘 안 된다는 뜻이야. 그 점까지 감안해서 솜씨를 보겠어.”
“물론입니다.”
대답하고 준후는 오른손에 니들홀더를 쥐었다.
왼손에는 포셉을 쥐었다.
긴장이나 불안.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는 없었다.
삶과 죽음이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어지는 전장이, 준후가 지내던 장소였으니까.
감정이 바위처럼 굳건했으므로.
눈빛이 흔들리거나 손이 떨리지 않았다.
지금의 준후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냉정했다.
본격적인 실력 테스트에서 앞서.
준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 막, 따끈따끈하게 초식으로 저장해둔 봉합술을 떠올렸다.
그 봉합술은 다름 아닌…….
1시간 전, 규식이 펼쳤던 락킹 수쳐였다.
준후는 다른 무사의 무공을 분석해서 암기하듯,
규식의 락킹 수쳐를 분석해서 암기해두었다.
규식 앞에서.
규식의 락킹 수쳐를.
규식만큼 완벽하게 카피해서 선보인다?
교수의 마음을 열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스킬은 없다고, 준후는 감히 자부했다.
“준후 너도 꽤 불안해 보이는구나. 시험 전에 눈이나 감고 있고 말이야.”
규식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마취의도 어느새 마취방을 빠져나와 있었다.
규식 곁에서 매의 눈으로 준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설쳐댔던 준후가 내심 못마땅했다는 듯.
오로지 혜선만이 준후편이었다.
준후와 눈이 마주치자 혜선이 파이팅하라는 의미로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이에 화답하듯 준후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웃었다.
증명해 보이겠어.
내가 무력하지 않다는 걸.
내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인조혈관에 대한 락킹 수쳐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 * *
스태프 포지션에 대격변이 생겼다.
준후는 규식 대신 집도의 자리를 꿰찼다. 준후 맞은편에는 혜선이 위치했다.
지금으로부터 5분 전.
락킹 수쳐를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준후는 환자의 정맥 혈관을 봉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당하게!
참 나, 믿을 수가 없군.
대체 사람을 몇 번이나 놀라게 하는 거야.
감탄하는 규식의 시선이 인조 혈관에 머물렀다.
준후는 락킹 수쳐로 총 7바늘을 꿰맸는데 그 퀄리티가 상상초월이었다.
봉합사의 완벽한 좌우 대칭.
상처를 지나치게 헐렁하게 당기지도, 그렇다고 상처를 지나치게 빡빡하게 당기지도 않는 황금 비율의 장력.
매듭의 견고함.
기계 같은 매듭 간의 간격 등등.
준후의 락킹 수쳐는 그야말로 무결점이었다.
‘ㄴ’자로 상처를 잇달아 봉합해야 하는, 락킹 수쳐의 난이도를 감안하면.
봉합 부위가 혈관임을 감안하면.
그 성과는 기적에 가까웠다.
“락킹 수쳐면 펠로우들도 고생하는 봉합법 아닙니까? 근데 레지던트 2년 차가 이걸 소화할 수 있나요?”
마취의가 혀를 차며 물었다.
“교수님?”
“아. 미안합니다. 잠시 정신이 팔려서.”
규식은 뒤늦게 현실로 돌아왔다.
방금 벌어진 일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넋을 잃고 말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2년 차가 락킹 수쳐를 펼치는 게 정상이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비정상이죠. 저도 기습에 당한 것처럼 얼떨떨할 따름이에요.”
“어영부영 흉내만 내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깔끔하게 성공해 버렸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규식의 시선이 봉합 준비 중인 준후에게 머물렀다.
착각인지 몰라도.
규식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혹시 준후가 자신의 락킹 수쳐를 고스란히 복사한 것은 아닐까 하고.
왜냐면…….
락킹 수쳐를 할 때.
규식은 일반 서전들과 다른 운침법과 매듭법을 사용하는데.
준후가 자신의 수법을 데칼코마니로 따라 했기 때문이다.
손이 아닌 기술만 놓고 보면.
인조 혈관을 자신이 봉합했는지, 준후가 봉합했는지 분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제 분야가 아니라서 감히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지만 말입니다.”
마취의가 규식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친구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봉합은 교수님이 직접 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아무래도 불안을 멈출 수 없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전 정맥봉합술을 펼칠 상태가…….”
규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잊고 있었던 현기증이 거친 파도로 몰려왔다.
발바닥에 힘을 주어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버텼다.
역시 이 상태로 수술을 속행하는 건 무리였다.
“교……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참을…… 만 해요. 이 나이를 먹고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수술만 했더니 몸이 감당을 못하는 모양입니다.”
규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체력과 정신력과 집중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규식은 갈수록 뭉툭해지고 있었다.
황갈색으로 녹이 슬고 있었다.
나이와 세월은 결코 속일 수 없었다.
“이런 교수님께 봉합을 부탁드리다니…… 제가 괜한 소리를 하고 말았군요.”
“…….”
“어쨌거나 지금은 저 친구를 믿어봐야겠죠?”
“그래요. 그게 유일한 희망이죠. 부디 마지막까지 바이탈 관리 부탁드립니다.”
“네. 교수님. 교수님도 몸이 더 불편해지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마취의가 커튼 뒤에 있는 마취방으로 복귀했다.
수술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규식도 수술대로 돌아왔다.
혜선이 서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준후에게 필요한 수술 도구를 건네는 것이 규식의 역할이었다.
“준비는 다 됐니?”
“네. 교수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짱 한번 두둑해서 좋구나. 하긴 외과의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그런데…….”
규식이 말끝을 흐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해결하고 싶은 궁금증이 있었다.
“준후 너, 혹시 내 락킹수쳐를 따라 했니?”
“네. 실전에서 락킹 수쳐를 보는 건 처음인데 인상이 깊어서 기억해두었습니다.”
“허……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구나. 어시스트하기도 바빴을 텐데 내 봉합법을 암기하다니…….”
“과찬이십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많았어. 수술을 속행하자꾸나.”
수술용 벽시계가 걸린 시계가 ‘6:20:30’을 지나고 있었다.
6시간 20분 동안 손가락 접합 수술을 했다는 뜻이었다.
시간만 놓고 보면.
속도는 꽤 빠른 편이었다.
준후의 어시스타트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정맥 봉합이 지연된 시간만 따로 놓고 보면, 수술 시간은 촉박했다.
봉합이 늦으면 그만큼 회복도 늦어지기에.
“받거라.”
“네. 교수님.”
규식은 포장지를 벗긴 봉합사를 준후에게 내밀었다.
8-0 nylon이었다.
0.04 밀리미터로 얇은 봉합사는 지독하게 연약해 보였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힘을 주면 끊어질 듯했다.
끼기기긱.
딸칵!
준후가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쥐었다.
대망의 첫 바늘을 떴다.
푹!
봉합침이 혈관의 표피를 뚫었다. 혈관 표피에서 이슬처럼 앙증맞은 혈액이 맺혔다.
꿀꺽!
규식은 마른침을 삼켜가며 준후의 봉합을 지켜보았다.
봉합은 준후가 하고 있는데.
벼랑 끝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건 자신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긴장과 두려움은 솜사탕처럼 녹아버렸다.
지금 봉합하고 있는 사람을 준후가 아니라 규식 본인으로 느꼈던 것이다.
준후가 자신의 락킹 슈처를 경이롭게 복사하고 있었기에…….
아…….
다시 현기증을 느끼는 규식.
하지만 그 현기증은 피로가 쌓여 생긴 현기증이 아니었다.
준후의 눈부신 활약으로 생겨난 현기증이었다.
준후가 이제 막 정맥을 한 바늘 꿰맸건만, 규식은 벌써 알 수 있었다.
정맥봉합술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예지는 칼같이 맞아떨어졌다.
그로부터 5분 후.
환자의 찢어진 정맥은 퍼펙트하게 복구가 되어 있었다.
마치 규식이 직접 봉합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