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제50장 선 넘네(4)
장장 7시간에 달했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규식이 앞장서고 그 뒤를 혜선과 준후가 뒤따랐다.
지이이잉.
수술방 문이 열렸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수술방 문은 천국의 문이 될 수도, 지옥의 문이 될 수도 있었다.
오늘은 천국의 문이었다.
상황실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준후는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셨다.
잘해냈다, 준후야.
그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보람이 있었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면 돼.
넌 절대 무력하지 않아.
그 어떤 위기와 고난이 닥쳐도 이겨낼 힘을 가지고 있어.
준후는 속으로 스스로를 북돋아주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정맥을 봉합하는 일은 위험부담이 컸다.
만약 봉합에 실패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스태프들에게 괜히 나댔다고 욕을 먹었을 테고, 그 욕이 과장에게 전해져 징계를 받았으리라.
하지만 말이다.
설령 봉합에 실패했다고 해도.
준후는 그 사실을 달게 받고 책임까지 졌을 것이다.
애초부터 실패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선 게 아니었다.
즉 ‘성공할 자신’이 아닌.
‘실패로 인한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나선 것이었다.
환자를 위한다는 일념.
그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일념이야말로 준후의 가장 크면서도 강력한 무기였다.
수술방을 나온 후.
준후는 스태프들과 의료물 페기함 앞에 섰다
수술 가운, 수술모, 마스크, 장갑 등을 휙휙 벗어던졌다.
정맥 봉합술을 완벽하게 완성시킨 덕분일까.
수술 복장을 벗어 던지는 행동이 마치 곤충이 허물 벗는 과정 같다고 준후는 느꼈다.
그러므로 허물을 벗기 전과 벗은 후.
준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전보다 한 단계 성장한 사람이었다.
“조슈아도 고생 많았어요.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죠?”
준후는 곁에 서 있는 조슈아에게 물었다.
“확실히 수술이 끝나니까 피로가 몰려오네요. 하지만 선생님들이 더 고생하셨죠. 저는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원래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어요.”
“그런가요?”
준후의 말에 조슈아가 빙긋 웃었다.
손가락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그의 얼굴에 은은한 여유가 깃들었다.
조슈아는 어깨에 의료용 팔걸이를 걸고 있었다. 팔걸이에 수술받은 오른손을 지탱하고 있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난 손가락에는 80도로 굽은 손가락 부목이 대어져 있었고.
부목 위에 하얀 붕대가 돌돌 말렸다.
준후는 수술 후 치료 계획을 알지 못했다. 준후의 근본은 신경외과였지, 수부외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규식이 수술에 대만족했던 것을 떠올리면.
수술 후라고 해서 큰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선생님, 빨리 오세요. 교수님 혼자 두면 안 되잖아요.”
“아. 네 지금 갑니다.”
혜선의 재촉에 준후는 바삐 걸었다. 저만치 규식이 혼자 걷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 진짜 멋있었어요. 무슨 드라마 주인공 같았다고요.”
혜선이 준후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정맥봉합술 제가 하겠습니다라니…… 진짜 드라마 대사 아니에요?”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됐네요. 근데 저 혼자 잘해서 수술이 마무리된 건 아니죠.”
“…….”
“혜선 쌤 역할도 엄청 중요했어요. 덕분에 살았죠.”
준후는 혜선을 치켜세웠다.
오른손으로 따봉을 치켜들었다.
수술의 마침표를 찍는 단계에서 준후는 집도의, 혜선은 퍼스트 어시스트의 역할을 맡았다.
만약 혜선의 실력이 형편없었다면 어땠을까?
준후도 감히 수술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준후의 정맥 봉합 실력은, 속 썩이는 동료의 멱살까지 잡고 갈 수준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것도 준후 쌤 오더가 있어서 가능했어요. 가만 보니까 오더에도 소질이 있던데요?”
“오더에 소질이라…… 있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준후가 웃었다.
-지금부터 딱 10초만 숨 참으면서 혈관 잡아주세요. 손 떨리면 안 됩니다. 바늘 헛돌아요.
-손을 조금만 뒤로 빼주세요. 손가락이 수술 시야를 가려요.
-더. 더. 네. 바로 거기요. 그 위치에서 봉합사를 끊어주세요. 한 번에 톡!
정맥봉합술을 하는 동안.
준후는 자신이 규식을 도왔던 요령을 혜선에게도 전수했다.
무림맹 교관으로 활약했던 덕분일까.
준후의 가르침은 친절하고 꼼꼼했고 혜선은 그런 준후의 가르침을 광속으로 흡수했다.
순식간에 일류 어시스트로 거듭났다.
스스로 활약하는 것만큼이나.
남을 성장시키는데도 재능이 탁월한 준후였다.
이 재능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최소한 부 교수는 되어야 할 텐데.
대체 어느 세월에 교수가 될까.
잡념을 물리치며, 준후는 규식 옆에 섰다.
규식은 조슈아의 공장 동료이자 보호자인 중년인과 대화 중이었다.
수술이 잘 끝났으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호자는 조슈아가 무사히 귀환했고 손가락이 잘 붙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돌아온 조슈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매우 불길한 발상이 준후의 뇌리를 스쳤다.
피부가 싸늘하게 식고.
머리카락은 쭈뼛쭈볏 솟아올랐다.
접합 수술이 잘 끝난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아직 미완성의 숙제가 남았다.
그 숙제가 마무리되지 않으면…….
이번 수술은 결론적으로 베드 엔딩이 아닐까.
“보호자분, 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규식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준후가 대화에 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준후에게 쏠렸다. 다들 이제 와서 또 무슨 할 말이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조슈아가 공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렸잖아요.”
“그게 왜요? 당연히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본론은 지금부터입니다.”
준후는 차분하게 운을 뗐다.
“설마 조슈아, 산업 재해 보험 처리 안 되는 건 아니겠죠?”
* * *
비슷한 시각, 참관용 수술방.
짝. 짝. 짝.
우렁찬 박수 소리가 참관용 수술방을 뒤흔들고 있었다.
대전 신원대학교 병원 과장, 시덕이 손뼉을 치는 소리였다.
“아주 미쳤는데? 이 친구 계속 기대를 뛰어넘는단 말이지. 모형으로 8-0 봉합사로 봉합을 한 것도 모자라서 실전에서 혈관을 봉합해 버리다니.”
시덕은 준후를 언급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웃음소리 역시 박수 소리만큼이나 요란했다.
사실 준후를 손가락 접합 수술에 꽂은 사람이 바로 시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준후가 이렇게까지 활약할 거라고는 미처 몰랐다.
설마 교수 대신 봉합을 할 줄이야.
가능만 하다면.
시덕은 준후가 봉합하는 장면만 따로 녹화해서 두고두고 감상하고 싶을 정도였다.
준후의 봉합술은 그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대단하긴 하네요. 각성 수술 때부터 싹수가 보이긴 했는데.”
곁에 있던 동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선배. 저는 그래서 준후가 더 걱정입니다.”
“너무 잘나서 걱정이라고?”
“네. 환자를 생각하는 것도 좋고 실력이 뛰어난 것도 좋은데. 윗대가리한테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까 봐요.”
“설마 너…… 지금 나 저격하니?”
“아뇨. 선배는 빼고요. 어쨌든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산 증인이 옆에 있는데.”
시덕의 눈빛이 동훈에게 머물렀다.
동훈은 시덕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정치질이야 내 밑에서 배우면 그만이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전 수술보다 정치질이 더 숨 막히던데요?”
“성품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준후는 케이스가 조금 달라.”
“어떤 점에서죠?”
“그 전에 역으로 내가 물으마. 가장 최고 수준의 정치질이 뭔지 아니?”
“티가 안 나게 이간질하는 게 아닐까요?”
동훈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건 이류야. 일류 정치질은 따로 있어.”
“뜸을 들이지 말고 말해주세요.”
“최고의 정치질은 말이야…… 바로 ‘실력’이야. 실력이 있으면 정치질 따위는 초월해 버릴 수가 있다고.”
“…….”
“지금처럼만 성장하면 준후는 외과의 탑 정치가가 될 거다.”
“지금 저 저격하시는 거죠? 제 실력이 모자라서 정치질이 필요하다는 거 아닙니까?”
“말이 그렇게 되나?”
시덕이 피식 웃었다.
어쨌거나 시덕은 서울 본원을 찾아서 준후라는 놀라운 보물을 발견했다.
이 반짝이고 빛나는 보물을 못 본 척하고 돌아간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휴. 몸이 찌푸둥 하네.”
자리에서 일어나, 시덕이 기지개를 켰다.
수술 참관이 끝나자 잊고 있었던 피로가 몰려왔다.
“너도 고생 많았다. 쉬는 날에 내 가이드도 해주고 옆에서 수술 참관도 해주고.”
“아셨으면 됐어요. 저녁이나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암. 당연히 그래야지.”
시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통화 상대는 서울 본원의 신경외과 과장이었다.
“아. 네. 과장님 접니다.”
-…….
“네. 네. 그렇게 하시죠. 서 교수랑 뭉치기로 했는데 오랜만에 제가 한우로 사겠습니다.”
-…….
“네. 그럼 로비에서 뵙겠습니다.”
“저 체하는 꼴 보고 싶으세요? 저녁 식사에 과장님은 왜…….”
시덕이 통화를 끊자 동훈이 툴툴거렸다.
“그걸 몰라서 물어? 준후 녀석, 훔쳐가야지.”
* * *
손가락 접합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서.
준후는 규식, 혜선과 지하 식당을 향하고 있었다.
반나절 짜리 수술을 하는 동안, 스태프들은 한 끼를 걸렀다.
꾸르륵~ 꾸르꾸꾸~
뱃속의 개방 거지가 밥을 달라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규식이 점심 겸 저녁을 사기로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당으로 내려가던 중.
준후는 창가를 응시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하늘이 벌써 어둑어둑했다.
석양보다 가로등과 병원 건물이 뿜어내는 빛이 훨씬 더 밝게 보였다.
외래진료 시간이 끝났기에.
로비는 다소 한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교수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현기증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젠 참을 만한 수준이구나.”
규식이 준후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평소에도 바쁘시죠?”
“오늘 정도면 차라리 양호한 편이지. 두 끼를 거르고 수술에 들어간 적도 많아.”
규식의 말이 비수처럼 준후의 가슴을 찔렀다.
수부외과는 신경외과나 흉부외과만큼 바쁘고 인력이 부족한 과였다.
교수도 레지던트처럼 빡세게 일하는 과였다.
그래서일까.
수술모와 마스크를 벗은 규식은 준후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늙고 지쳐 보였다.
외과의의 안식처는 어디일까.
몰락하는 외과계의 구원자는 누가 될 것인가.
또 구원자는 언제 올 것인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에도.
준후는 생각이 많아졌다.
어쩌면 스승 재현의 판단이 맞는 걸지도 모른다.
외과의 개개인이 고군분투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결국 시스템이 바뀌어야 모두가 산다는 지적이.
잡담을 하며 도착한 곳은 중식당이었다.
손님이 적어 한적했다.
각자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동 콜이라도 왔니?”
준후의 돌발 행동에 규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교수님께 간단하게 마사지를 해드리려고요.”
“됐다. 마음은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안 받으면 후회하실 걸요?”
준후는 웃으며 규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 마사지는 신세계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