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66화 (265/424)

266화

제51장 덤벼(1)

똑. 똑. 똑.

당직실 앞에 서서 준후가 노크를 했다.

“들어 오거라.”

과장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음흉하게 들렸다.

준후는 과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과장은 예의 소파에 등을 기대앉은 거만한 자세였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입가에는 싱글벙글한 미소가 가득이었다.

불안함이 더 증폭되었다.

과장에게 좋은 일은 보통 의국이나 스태프들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준후는 과장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오늘따라 준후 네가 무척 보고 싶더구나.”

“아…… 네.”

“내가 준후 너를 오랫동안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구나. 각성 수술 때도, 소아 모야모야병 혈관 수술 때도 넌 엄청난 활약을 했지.”

과장이 다리를 꼬고 말을 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손가락 접합 수술에서도 대활약했다지?”

“성 교수님이 예쁘게 봐주신 것뿐입니다. 과장님이나 다른 교수님들의 꽁무니를 쫓아가려면 10년도 모자랍니다.”

“녀석, 겸손하기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까시나.

대외적인 칭찬은 100만 뉴튜버가 됐을 때만 했으면서.

준후는 직접 본론으로 뛰어들어 갔다.

“혹시 저를 호출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나랑 이야기하기 싫으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중환자실 라운딩을 가봐야 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거라면 다른 애들 시켜도 돼. 1년 차 후배도 있는데.”

과장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과장의 콧김에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탁!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요란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구나.”

“…….”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어. 좋은 쪽으로 말이야. 들어보면 너도 분명 기뻐할 거란다.”

과장의 눈동자가 과녁처럼 준후를 조준했다.

준후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막연했던 불안감이 실체를 드러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과장에게 선입견이 있어서 긴장했던 것인지.

아니면…….

육감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한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준후야.”

“네. 과장님.”

“너 이번 주까지만 근무하고 대전으로 내려가거라.”

과장의 일방적인 지시가 한 줄기 벼락으로 준후의 몸을 강타했다.

* * *

쿵.

문이 닫혔다.

준후가 과장실을 떠났다.

제법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준후는 자신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계급의 차이였다.

일개 병사가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똑. 똑. 똑.

준후가 떠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부교수 마석민이 들어왔다.

과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석민이 과장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암 좋은 일이 있고말고. 자네, 대전 분원에 이시덕 과장 알지?”

“모르면 간첩이죠. 얼마 전 따끈따끈하게 과장 단 친구 아닙니까? 친하지는 않지만 제 동기이기도 합니다.”

“그 친구가 말이야…….”

과장은 신명 나는 휘파람을 한 곡조 뽑고서 설명을 계속했다.

시덕이 한국 신경외과 협회 학술 이사직을 제안했고 자신이 그 자리를 냉큼 받아먹게 됐다고 말이다.

“확실히 시덕이가 능력은 있는 친구긴 합니다. 사람 관리를 워낙 잘하고 일머리도 빠른 녀석이라.”

“…….”

“근데 그 친구가 맨입으로 이사직을 주겠답니까? 그런 자리를 공짜로 제시할 위인은 절대 아닐 텐데요?”

석민이 의문을 제기했다.

과장 역시 시덕의 제안을 받았을 때, 석민과 똑같은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왜?

나한테 왜?

이사직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냐고 말이다.

과장 역시 잔머리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의국 사정이 안 좋아서 준후를 잠시 데려가고 싶다더군.”

“아…… 준후가 볼모였습니까? 어쩐지 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준후 표정이 좋지 않더군요.”

“표정이 안 좋으면 지가 어쩔 건데?”

과장은 껄껄껄 웃었다.

장기 말은 장기를 두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과장은 장기 말이 느끼는 감정에 1도 관심이 없었다.

“과장님.”

“왜?”

“그냥 준후를 데리고 있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석민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과장의 눈썹이 불편하게 꿈틀거렸다.

“이유는?”

“준후는 의국에 윤활유 같은 아이입니다. 수술방에서는 똑 부러지게 어시스트도 하고, 병동에서 환자관리나 스태프 관리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어요.”

“…….”

“준후가 없으면 의국이 삐걱거릴 수도 있습니다.”

“허…… 자네도 어느새 서준후 열성 팬이 다 됐구먼. 그 녀석 없다고 의국이 안 돌아간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과장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준후 없이도 자신이 맡은 의국은 5년 동안 별 탈 없이 굴러갔다.

석민의 걱정은 뻥튀기보다 과장되어 있었다.

“병원 규칙상, 레지던트는 무조건 우리 계열의 다른 병원으로 파견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생각해 보라고. 오늘이 아니더라도 준후는 언젠가 파견을 가야 했잖아?”

“과장님 말씀이 맞습니다만…….”

“맞습니다만?”

“뭐랄까요…… 타이밍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타이밍? 혹시 진료부원장 선출 건을 이야기하는 건가?”

“네.”

“그거라면 걱정 마. 내가 알아서 다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번에 협회 학술지 이사직을 맡게 되면 가산점도 받을 테고 말이야.”

올해 하반기에, 서울 본원은 새로운 진료부원장을 뽑는다.

과장이 진료부원장이 되고.

과장의 공석을 석민이 차지한다.

이것이 두 사람이 맺은 은밀한 계약이었다.

“근데 진료부원장 선출 건과 준후가 무슨 상관이지?”

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골똘히 생각해 보니 둘 사이에 접점이 보이지 않았다.

“과장님이 순조롭게 승진하시려면 의국에 별 탈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렇지.”

“근데 준후가 몇 번 의국에 큰일이 날 뻔한 걸 막았잖습니까? 각성 수술 때도 활약하고 소아 모야모야병 수술 때도 그렇고 말입니다.”

“…….”

“저는 이상하게 준후가 액운을 막아주는 부적처럼 느껴집니다.”

“차기 과장이 이렇게 맥이 없어서야 원.”

과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성격도 좋고, 수술 솜씨도 좋고.

다 좋은데 석민은 단 한 가지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새가슴이라는 것이었다.

고작 준후의 부재로 이렇게 긴장하고 불안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석민이 끌고 나갈 신경외과의 앞날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처럼 징징대는 소리는 그만해. 시덕 과장이랑 이미 딜은 끝났으니까.”

과장의 목소리가 칼처럼 단호했고 칼처럼 예리했다.

* * *

“하…… X발.”

준후의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맞닥뜨렸을 때도, 뱉었던 적 없었던 험악한 말이 흘러나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준후는 대전 파견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지금 의국에서 준후가 부재하게 되면 사이코패스 시호가 병동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의 힘만으로는 과장의 결정을 뒤집기 역부족이었다.

레지던트가 감히 과장과 맞선다?

이는 그 어떤 병원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대역죄였다.

과장과 다투는 순간 준후는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학병원 신경외과를 적으로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의료계만큼 좁고 소문이 빨리 도는 곳은 없었다.

대전 파견이 결정되면서 준후의 가슴에 빼낼 수 없는 거대한 돌이 얹혔다.

그래서 가슴이 묵직하고 답답했다.

“과장님이 뭐라냐?”

준후가 당직실로 복귀하자 경수가 물었다.

“대전 파견, 나보고 가란다.”

경수 옆자리에 앉으며 준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되도록이면 이번 주 안에 꺼져 달래.”

“응? 진짜?”

“응. 진짜.”

“그게 왜 그렇게 되지? 어제 치프한테 말해뒀거든? 내가 대전 파견 갈 거라고. 결정이 갑자기 손바닥처럼 뒤집혀 버리네?”

경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전 준후는 자신 대신 경수에게 파견을 가달라고 부탁했고 경수는 순순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가는 듯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파국을 맞고 말았다.

“나도 몰라. 그래서 더 답답해.”

“그럼 내가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볼까?”

“소용없을 거야. 과장이 보내겠다는데 그걸 누가 말려.”

“으음…… 곤란하게 됐네.”

경수가 턱을 쓸어내렸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당직실 문이 열렸다.

2개의 수술을 잇달아 마친 시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왜 이렇게 분위기가 안 좋아? 무슨 일 있니?”

“대전 파견, 결국 제가 가기로 했습니다.”

“준후 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시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더니 아주 희미하게 시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를 본 준후는 알았다.

최소한 이번 사건에 시호의 개입은 없었지만, 자신의 파견 소식에 시호가 쾌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준후가 없는 의국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시호를 생각하니 속이 쓰라렸다.

“이상하네? 난 분명히 과장님께 말씀드렸거든. 대전 파견은 경수가 가기로 했다고.”

“선배는…… 좋겠습니다? 몇 개월 동안 제 얼굴을 안 봐도 돼서.”

준후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섭섭한 소리 하지 마. 알잖아, 내가 준후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죠.”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잘 갔다 오고, 네가 없는 동안 의국은 내가 잘 맡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잘 맡겠다는 소리에 준후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 날 밤 11시.

당직실은 고요했다.

밤 근무자인 준후가 밤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활동 중이었다.

병동 콜은 없고.

응급실 콜도 없고.

밀린 차트 업무는 조금 전에 끝마쳤다.

앞으로의 시간은 온전히 자유시간이었다.

대전 파견은 돌이킬 수 없어.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

일주일 안에 시호를 찍어낸다.

목표를 설정한 준후의 눈동자에 비장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타다다닥.

준후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현재 입원 중인 환자의 데이터를 전부 뽑아서 출력해 보았다.

시호는 현재 살인에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준후가 파견을 떠난 즉시 살인을 저지를 확률이 높았다.

강용휘, 67세.

인쇄물을 훑던 준후의 눈이 한 환자에게 고정되었다.

강용휘는 교통사고로 입원해 뇌출혈 수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에서 1주일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시호의 먹잇감으로 딱 좋은 환자였다.

그리고 시호가 오랜만에 살인을 한다면, 본인이 가장 안전한 펜타닐 살인을 할 확률이 높았다.

중환자실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펜타닐만 슬쩍 주입하고 나오면 환자를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함정을 파야 잘 팠다고 소문이 날까.

약아 빠진 시호조차 홀딱 넘어갈 수 있는 함정은 뭐가 있을까.

준후는 팔짱을 낀 채 계략을 짜기 시작했다.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