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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67화 (266/424)

267화

제51장 덤벼(2)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새까만 하늘에 넉넉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조명처럼 은은한 달빛이 창틈을 통과해 당직실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휘이이잉.

초겨울 차가운 밤바람이 커튼을 뒤흔들었다.

커튼이 바람과 뒤엉켜 한바탕 춤을 추었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당직실.

준후는 시호를 물리치기 위해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현대는 다 좋았지만 악인을 단죄하기에는 불편한 곳이었다.

현대의 법은 착한 사람을 보호했지만 동시에 악한 사람도 보호했다.

만약 무림에서 시호를 만났다면 준후는 주저 없이 시호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그것도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의 목숨을 고의적으로 빼앗은 흉포한 놈에게 자비는 필요 없었다.

드르르륵.

느닷없이 문이 열리고 민경이 당직실로 들어왔다.

“아휴. 추워! 준후 너 창문 열어놨어? 이 겨울에?”

민경이 얼굴을 찌푸리며 팔을 끌어안았다.

“뭔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어서요. 벌써 자정인데 안 주무셨어요?”

“안 잔 게 아니라 못 잤어. 내일 케이스 발표 나잖아.”

“아. 그걸 깜빡했네요.”

“넌 뭐 하고 있었어? 세상에 고뇌란 고뇌는 다 짊어진 표정이던데.”

민경이 커피포트에 물을 받으며 물었다.

공부 도중 야식이 생각나서 당직실을 찾은 듯했다.

“생각이 많은 밤이네요. 대전 파견 건 때문에 그런 가 봐요.”

“그거라면 인정. 과장님이 널 콕 찍었다면서?”

“네. 솔직히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분이에요. 과장님은…….”

준후의 한탄에 민경이 깔깔깔 웃었다. 준후가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처음 들었다고 덧붙였다.

준후는 민경이 컵라면을 꺼내서 포장 뜯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쓰라렸다.

준후의 계획이 완성된다면 시호는 병원이 아니라 감방에 처박힐 것이다.

시호를 짝사랑하는 민경에게 이는 커다란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동안 짝사랑했던 사람이 사이코패스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장차 민경이 느낄 감정의 폭풍을, 준후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냥…… 선배도 오늘 피곤했나 싶어서요. 평소에 없던 쌍꺼풀이 보이길래.”

“역시 서준후, 관찰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민경이 빙긋 웃었다.

팔팔 끓는 포트 물을 컵라면 용기에 부었다. 컵라면 뚜껑을 덮고서 그 위를 다이어리로 한 번 더 덮었다.

“다이어리는 뭐예요? 못 보던 것 같은데?”

“오늘 택배로 받았어. 앞으로 틈틈이 일기나 써볼까 해서. 당직이라고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요령껏 잘 자.”

“네. 선배.”

준후는 손을 흔들며 민경을 떠나보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금까지 바보처럼 놓치고 있었던.

강력한 증거가 뇌리를 스쳤다.

[1월 30일: 결(結)]

[4월 10일: 결(結)]

[7월 3일: 결(結)]

메모임을 감안해도 내용이 너무 간결했다. 적힌 거라고는 날짜와 한문으로 된 결자뿐이었다.

시호를 처음 만났던 날.

준후는 우연치 않게 시호의 수첩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

이제 보니 수첩 속에 적힌 결은 아마 살인을 완결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모든 정황이 착착 맞아떨어진다.

만약 그 수첩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호가 그동안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해 방법은 무엇인지, 또 다음 타켓은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가 활짝 펼쳐지면서 준후는 전율을 느꼈다.

살갗에 솜털이 우수수 돋아나고 머리카락은 삐죽삐죽 솟아올랐다.

계획은 계획대로 진행하되.

수첩도 반드시 찾아보자.

수첩을 찾으면 계획은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 없을 테니까.

각오를 다진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직실을 샅샅이 뒤져 나갔다.

* * *

자정이 넘은 시간.

시호는 컨퍼런스 룸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언제까지 굶주리고 갈증을 느껴야 해?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고 말겠어. 근데 내 성격 알지? 난 절대 혼자는 안 죽어. 너도 같이 죽일 거야.

뚝!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간 탓일까.

연필심이 부러졌다.

부러진 연필심이 책상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다 쓰지 못한 글자 끝에 검은 점이 생겼다.

뭉개진 점을 보고 있자니 꼭 검은 우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미리 탁자에 올려놓았던 연필깎이의 손잡이를 돌리며, 시호는 연필을 깎았다.

시호는 연필이 좋았다.

그 끝이 뾰족해서 좋았다.

뾰족한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쓰면 사람의 피부에 문신을 새기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같은 맥락에서…….

시호는 뭉툭한 연필이 싫었다.

그 무엇에게도 상처를 주지 못하는 둥글둥글함이, 또 매끈함이 싫었다.

연필을 다 깎은 시호의 공허하고 퀭한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요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준후 녀석 때문에 살인의 참맛을 보지 못한 지가 어언 6개월 가까이 되었다.

역대 가장 긴 시간이었다.

그로 인해 살인을 부추기는 제2의 인격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안간힘을 쓴다고 한들.

이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열흘이 한계일 것이다.

열흘이 지나는 순간.

시호는 병동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든 붙잡아서 메스로 난도질할 것 같았다.

시호가 경멸해 마지않는 저급한 쾌락 살인마들처럼.

그래도 괜찮아.

조금만 더 참자.

준후 녀석, 이번 주만 지나면 대전으로 파견 갈 거야. 그 녀석만 없으면 난 얼마든지 환자와 보호자를 요리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 고통받은 것도 있으니.

아영이라고 했나?

준후 녀석 여자친구를 건드려 봐도 괜찮을 것 같군.

마침 흉부외과에 동기도 있고.

시호는 그동안 준후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아영에게 풀기로 결심을 굳혔다.

아영의 고통이 곧 준후의 고통이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준후 같은 타입의 약점을 시호는 아주 잘 알았다.

본인이 괴로운 건 초인처럼 참아내지만, 본인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고통은 손톱만큼도 못 참는 게 준후 같은 타입이었다.

흐흐흐. 아영을 어떤 식으로 괴롭혀줄까.

내가 눈물을 흘렸으면.

서준후, 너는 피눈물을 흘려야 마땅해.

아영을 괴롭히는 십여 가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호의 속이 뻥 뚫렸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시호는 새로 깎은 연필로 산뜻하게 다시 필기를 시작했다.

준후가 파견을 떠난 즉시 저지를 살인에 관한 것이었다.

희생자의 이름은 강용휘, 67세였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환자였다.

모처럼의 살인인 만큼.

깔끔하게 펜타닐을 사용할 작정이었다.

중환자가 중환자실에서 죽었으니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죽을 사람이 결국 죽었구나 생각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부검도 없을 테고 시호는 범죄를 자연스럽게 완전범죄로 마무리할 수 있다.

살고자 숨을 헐떡거리는 환자.

그런 환자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 쳐댈 스태프들.

거기에 살인자인 자신이, 마치 구원자인 것처럼 CPR에 동참하는 모습 등등.

머지않은 미래를 그려보고.

시호는 황홀경을 느꼈다.

아랫도리가 충만하고 빳빳하게 솟구쳐 올랐다.

살인 일기를 다 쓰고 시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직실로 이동했다.

숙직실은 캄캄했다. 천장에 달린 수면등이 안개처럼 희뿌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라앉은 적막 속에는 1년 차 인철의 코 고는 소리만 요란했다.

시호는 창가에 위치한 원목 서랍장에 1층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필기구가 잔뜩 들어 있었다.

하지만 시호가 주목한 건 따로 있었으니…….

바로 비밀 공간이었다.

시호는 서랍 바깥쪽에 위치한 합판을 뒤로 눕혔다.

철컥!

경첩 소리가 시원했다.

그 상태에서 서랍장을 한 번 더 잡아당기자 서랍 안에서 또 다른 서랍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 서랍장에는 펜타닐이 담긴 약병.

프로포폴이 담긴 약병.

주사기와 알콜 패드가 들어 있었다.

시호는 비밀 서랍장에 수첩을 꽁꽁 숨겼다.

그리고 주사기로 프로포폴을 적당량 빼낸 후 정맥에 직접 투여했다.

의료 폐기물은 폐기물 함에 버린 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오늘은 꿀잠 예약이었다.

* * *

다음 날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난 후 준후는 곧장 스테이션을 찾았다.

“윤 선생님. 어제 오전 근무셨죠?”

“네. 근데 왜요?”

“어제 차트를 훑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요. 604호실 하영실 환자 때문에 그런데요.”

“말씀하세요.”

“삼차 신경증 때문에 펜타닐 처방 났잖아요. 펜타닐 처방을 치프가 한 걸로 아는데. 투여를 윤 선생님이 직접 하셨나요?”

“아뇨. 제가 안 했어요.”

윤태진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시호 선생님이 직접 투여하신다길래 감사하다고 했죠. 하여간 시호 선생님은 치프가 돼서도 참 친절하고 배려 깊은 분인 것 같아요.”

“제 생각도…… 그러네요. 참 대단한 선배죠. 말씀 감사합니다.”

스테이션을 등지면서 준후는 억지로 지었던 미소를 풀었다.

시호의 이미지 메이킹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시호는 그저 펜타닐 강도였다.

간호사의 일손을 거들어 주기 위해 펜타닐 약통을 챙긴 게 아니었다.

그 위선과 위악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준후는 외롭고 쓸쓸했다.

펜타닐을 챙긴 걸 보니 확실히 내가 파견 나가는 즉시, 살인을 저지를 모양인가 보네.

그나마 다행이야.

내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으니까.

숙직실로 향하던 도중 준후는 시호와 마주쳤다. 서로가 서로를 인식한 순간,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수축되었다.

먼저 한 마디를 건넨 사람은 준후였다.

“치프, 오늘은 유독 표정이 밝아 보이네요?”

“어제는 잠을 잘 잤거든.”

“제가 파견 가서 속이 후련한 건 아니고요?”

“그런 섭섭한 소리를. 준후 너야말로 표정이 밝아 보이는데?”

“저도 좋은 일이 있어서요.”

“무슨 좋은 일?”

“예전부터 골머리 썩었던 일이 있는데 조만간 그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 다행이네. 파견 전에 해결할 수 있어서 말이야.”

“그러게요.”

대화는 짧게 끝났다.

두 사람이 서로를 교차해 걸었다.

각자의 복잡한 속셈도 교차하고 있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아무도 없이 텅 빈 숙직실에 도착한 준후는 양손을 비볐다.

어젯밤, 시호의 수첩을 찾기 위해 당직실과 컨퍼런스 룸을 샅샅이 뒤졌다.

안타깝게도 수첩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준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수첩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약아빠진 시호가 수첩을 아무 데나 방치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 99퍼센트의 확률로.

수첩은 숙직실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병동에서 수첩을 숨길 곳은 당직실, 컨퍼런스 룸, 숙직실 세 곳밖에 없었으므로.

우우우웅.

우우우웅.

준후는 단전을 끌어올려 전신을 휘어 감았다. 무색, 무취, 무형의 기운이 준후의 육신 주변에서 일렁거렸다.

오감을 5배로 증폭한 상태에서.

준후는 숙직실의 먼지 한 톨까지 살펴나갔다.

시호는 분명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수첩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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