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68화 (267/424)

268화

제51장 덤벼(3)

준후는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숙직실을 뒤지고 있었다.

첫 번째 타겟은 공용 옷장이었다.

옷장 문을 열어 옷걸이에 걸려 있는 의사 가운들의 주머니를 모조리 살폈다.

뭔가가 나오긴 했다.

편의점 영수증, 간식 포장지, 처치 물품 포장지처럼 쓸데없는 것들이라 맥이 빠졌지만.

두 번째 타겟은 책장이었다.

준후는 책장 첫 번째 칸에 있는 전공 서적들을 쓸어내렸다.

책들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책장 뒤에 비밀 공간은 없었다.

책 사이에 수첩이 숨어 있지도 않았다.

이윽고 준후의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향했다.

두둥실.

요술처럼 허공에 떠오르는 서적들!

허공섭물을 펼친 것이다.

준후가 손바닥으로 책장을 가리키자 책들이 차례차례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이 너무 부족하단 말이지…….

인철이나 민경 선배가 들이닥칠 수도 있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준후는 초조함을 느꼈다.

수첩을 탐색하는 도중 다른 스태프가 숙직실에 들어올 위험이 있었다.

그 스태프가 준후의 행동을 의심하고, 준후의 행동을 시호에게 일러바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시호는 수첩을 준후가 전혀 예상치 못할 장소에 숨길 것이다.

그래서 탐색은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끝내야 했다.

준후는 같은 방식으로 책장을 전부 살폈다.

책을 바닥에 쏟아 훑고.

허공섭물로 다시 꽂아 넣기를 반복했다.

안타깝게도 수확이 없었다.

숙직실에 수첩을 숨겼다면 책장이 가장 만만했을 텐데…….

냉장고 아래.

옷장 아래.

옷장 위 짐칸 등등.

시간이 지날수록 준후의 수고는 헛수고가 되고 있었다.

시호의 수첩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수첩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유니콘처럼.

있기는 하되 존재하지 않는.

‘이렇게 된 이상 끝을 본다!’

준후는 개인 철제 락카룸에도 손을 댔다. 락카룸에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미리 챙겨온 주삿바늘로, 준후는 자물쇠의 열쇠 구멍을 쑤셨다.

달각. 달각.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자물쇠는 해체되었다. 자물쇠 따는 법은 무림에서 익힌 소소한 잡기 중 하나였다.

준후는 시호의 개인 락카룸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

입술 사이로 탄식이 빠져나왔다.

락카룸마저 준후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신하고 말았다.

사복과 지갑, 세면도구 등등.

락카룸 안에는 자질구레한 생필품만 존재했다.

수첩은 역시 보이지 않았고 수첩에 관련된 단서 또한 찾을 수 없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수첩이 있어야 시호를 철저하게 뭉개 버릴 수 있는데…….

자물쇠를 다시 잠그면서 준후는 실망했다.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마지막 남은 서랍장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위치한 공용 서랍장.

수첩이 숨어 있을 확률이 가장 낮은 곳이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준후는 서랍장에 다가갔다.

드르드륵.

서랍장 첫 번째 칸을 열자 잡다한 필기구들이 보였다. 평범,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시호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병동 바깥에 수첩을 숨긴 듯했다.

그렇다면 수첩은 포기하는 게 맞으리라.

준후가 제아무리 무림 출신이라도 병원 어딘가에 꽁꽁 숨은 수첩을 찾을 만한 능력은 없었다. 찾을 만한 시간 또한 없었고.

첫 번째 서랍이 닫히고.

두 번째 서랍이 열리고.

두 번째 서랍이 닫혔다.

자포자기하며 아쉬움을 느끼던 바로 그때였다.

만화공을 유지하고 있던 준후의 손과 귀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준후는 오른손으로 첫 번째 서랍을 열고 닫은 후, 다시 오른손으로 두 번째 서랍을 열고 닫았다.

첫 번째 서랍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손에 묵직하면서도 속이 텅 빈 감촉이 전해졌고.

귀에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본능이 먼저 알아차렸다.

첫 번째 서랍에 비밀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림에는 기관진식이라는 게 존재했다.

침입자를 막기 위해 함정을 설치한다거나 방석 위에서 절을 하면 그 무게를 인식해서 숨겨진 장소가 나온다거나 등등.

무림 나름의 과학 기술(?)로 만든 장치들이 바로 기관진식이었다.

무림에서 수많은 기관진식을 경험했기에, 준후는 서랍의 비밀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 인간 아주 맹랑한 인간일세?’

시호에게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준후는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첫 번째 서랍에 있는 필기구들을 싹 꺼냈다.

서랍장에 손바닥을 올리고 내공을 발산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호수 위에 생긴 파문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내공들.

그런데 내공의 흐름이 딱 막히는 공간이 있었다.

바로 서랍장 안에 붙어 있는 나무 판넬이었다.

나무 판넬을 눕히듯이 뒤로 젖혔다.

드르륵.

비밀 공간이 해체되는 소리가 들렸다.

준후가 서랍장을 한 번 더 뒤로 당기자 마침내 보물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착각인지 몰라도.

서랍장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펜타닐 약병.

프로포폴 약병.

각종 주사기와 알콜솜이 담긴 알콜솜 통.

혈관을 묶는 노란 토니켓(고무줄) 등등.

뛰는 시호 위에 나는 준후 있다고.

준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것만으로도 시호의 범죄를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적당한 처벌이 준후의 성에 찰 리 없었다.

준후는 금지 서적처럼 위험한, 시호의 수첩을 손에 쥐어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경악, 혐오, 분노.

갖가지 부정적 감정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시호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미치고, 더 잔인하고, 더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의사가 되기 전부터 동물을 죽이거나 사람을 해치고 다녔던 것이다.

만약 이번 기회에 손을 안 봤다면 환자와 보호자는 물론이고 아영이까지 큰 해를 당할 뻔했다.

‘개자식. 넌 절대 용서 못 한다.’

준후는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러면서 수첩의 나머지 부분을 살폈다.

전혀 의외인 부분도 있었다.

-내가 안 죽였다고. X발 놈아!!

시호의 평정심이 처음으로 무너지면서 준후의 멱살을 움켜쥔 날이 있었다.

식물인간 환자가 사망한 후 준후가 그 배후로 시호를 지목했던 때였다.

수첩을 보니 시호는 식물인간 환자의 사망과는 무관했다. 준후로서는 드물게 헛다리를 짚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시호가 왜 그렇게 억울해했는지, 준후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런다고 시호가 쌓은 죄악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첩에 뒤적거리는데 뒤늦게 당직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집중해서 기척을 잊어버린 것이다.

순간 낭패감이 찾아왔다.

등 뒤에 있는 게 만약 시호라면?

아니면 시호를 연모하는 민경이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불안을 느끼며 뒤로 돌아가는 준후의 몸.

“거기서 뭐 하냐?”

상대의 얼굴과 목소리를 확인하고 준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공은 경수였다.

“너답지 않게 왜 숙직실에 농땡이 치고 그래? 오늘은 좀 센티한가 보지?”

“센티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지. 한참 경악하고 있던 중이니까.”

“아침부터 경악할 게 있…….”

준후 곁으로 다가온 경수가 눈을 부릅떴다.

프로포폴과 펜타닐 약통을 확인했던 것이다.

“미친…… 이게 다 뭔데? 너 설마…….”

“오해하지 말고 귀 쫑긋 열어 둬. 지금부터 다 설명해 줄 테니까. 그리고 경수 너, 나 좀 도와줘야겠다.”

준후가 수첩을 흔들며 말했다.

* * *

그 날 오후.

뇌혈관 수술 어시스트가 끝난 직후.

준후는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서랍 속 비밀 공간을 발견하고.

시호의 수첩을 확인한 후.

시호를 물리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몰랐다.

오후 3시쯤에야 제정신이 들었다.

캔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휴게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영이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나를 다 보자고 하고?”

아영이 빙긋 웃으며 준후 곁에 앉았다.

“애인이 보고 싶은데 이유가 필요해? 오늘은 좀 어땠어?”

“바빴지. 2년 차가 되니까 수술방 들어가는 횟수가 훨씬 많아지더라. 피곤하기는 한데 그래도 나름 재미있어. 준후 너는?”

“나도 정신없었지. 뭐 마실래?”

“나는…… 닥터 페페.”

“닥터 페페가 맛있어?”

준후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준후 입맛으로, 닥터 페페는 화장품 맛이 나는 음료수였다.

인공적인 향이 거북했다.

“한 번 맛 들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먹다 보면 중독될걸?”

“아닌 것 같은데…….”

피식 웃으며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 자판기에서 닥터 페페를 뽑아서 아영에게 건넸다.

다시 아영 곁에 앉았다.

아영은 닥터 페페를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아영을 향한 사랑의 콩깍지는 아직도 단단하게 쓰인 것 같았다. 음료수를 마시는 아영의 모습조차 사랑스럽고 어여뻐 보이는 준후였다.

“요즘은 뭐가 제일 힘들어?”

“으음…… 딱 하나만 꼽자면 내 실력이 문제 같아.”

“실력? 아영이 네가 뭐가 모자라서?”

준후가 반문했다.

인턴 시절, 인턴 배 봉합 대회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손이 야무진 아영이었다.

준후가 지금까지 본 스태프들의 잠재력 순위를 나열하자면 이랬다.

시호 >>> 아영 >>> 경수.

“교수님들 수술하시는 거 보니까 적당히 잘하는 걸로는 안 될 것 같아…… 지금보다 실력이 월등히 성장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준후 너 양손 다 쓰잖아. 양손 훈련하는 방법 알려주면 안 될까?”

아영의 부탁에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뭐든지 퍼주고 싶은 법이거늘.

준후는 인턴 때 익혔던 양수 호박 기술을 아영에게 알려주었다.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엽기적인 수련 방법을.

“아. 맞다! 듣고 보니까 기억나네. 준후 너, 예전에 양손으로 가위바위보 했던 거.”

“바보 같아 보이지만 효과는 확실해. 나를 보면 알 수 있지.”

준후는 양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이기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이기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컨트롤 했다.

반면 준후를 따라 하는 아영의 손은 자주 엉켰다.

얼핏 머리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부품이 고장 난 기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히이잉. 너무 어렵다. 머리가 배배 꼬이는 것 같아. 손도 엉망진창이 된 것 같고.”

아영이 귀엽게 투덜거렸다.

“처음이라 그래. 하다 보면 괜찮아져. 가위바위보면 따로 도구를 준비할 필요 없이, 틈틈이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마스터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한…… 1년 정도?”

“쉽지 않네. 그래도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줘서.”

준후는 아영의 손을 감싸 쥐었다.

살갗이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스크럽(수술 전 소독) 할 때 솔로 손을 박박 문질렀던 탓이었다.

외과의 피할 수 없는 숙명 때문이었다.

“아영아.”

“응.”

아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준후는 본론을 준비했다.

사실 아영을 보자고 했던 건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였다.

악마에게서부터 아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네가 꼭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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