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제51장 덤벼(4)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가는 길.
아영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최근 몇 주간 준후와 제대로 데이트를 즐기지 못했다. 1년 차 후배가 생기면서 후배를 가르칠 일이 많아졌던 탓이었다.
하지만 오늘, 짧게나마 준후를 만나고 나니 행복이 차올랐다.
텅 비어 있던 마음과 피곤에 절어 있던 육신에 활력이 돌았다.
아영의 몸과 마음에 최고의 피로회복제는 준후였다.
‘근데 평소의 준후답지 않아…… 왜 그런 부탁을 했을까?’
휴게실에서의 대화를 되뇌며 아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후의 부탁은 단순하면서도 어려웠다.
그리고 준후는 왜 이런 부탁을 하게 됐는지는 일이 끝나는 대로 자세히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부탁을 하는 동안.
준후의 눈동자에는 진지함을 넘어 비장미까지 풍겼다.
아영조차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두말없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
준후의 꿍꿍이를 몰라서 불안한 감은 있었다만, 아영은 준후를 믿기로 했다.
잡념을 따라 도착한 당직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창가 쪽 의자가 책상에서 뒤로 한껏 밀려나 있었다.
1년 차 후배가 급하게 자리를 비운 흔적이었다.
원칙적으로 당직실은 단 1초라도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됐다. 그러면 위급한 응급실 콜이나 병동 콜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흉부외과에서는 그 원칙을 지킬 수 없는데.
아영은 의자를 책상 앞에 끌어다 놓은 후 앉았다.
의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정면 모니터에 한 입원 환자의 퇴원 기록지가 떠올라 있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후배 대신 퇴원 기록지를 작성하고 아영은 수련을 시작했다.
준후에게 배운 양손 가위바위보였다.
“으…….”
가위바위보를 하는 동안, 짜증 섞인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내 손이, 내 손 같지 않고.
내 머리가, 내 머리 같지 않았다.
머리와 손이 뒤죽박죽 엉켜 버린 기분이었다.
왼손을 신경 쓰면 오른손이 버벅거리고, 오른손을 신경 쓰면 왼손이 버벅거렸다.
평소 가위바위보 하는 속도보다 10배는 더 느리게 해야 간신히 왼손으로 오른손을 이길 수 있었다.
아영은 답답했지만 참았다.
선천적인 심장병으로 저 하늘에 별이 되어버린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누나가 되고 싶었다.
한참 가위바위보 수련을 하던 중.
아영은 기묘한 느낌에 주변을 훑었다.
“……!”
1년 차 후배 현수가 어느새 당직실로 들어와 있었다. 아영이 가위바위보 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와…… 왔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아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양손 가위바위보는 딱히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싶은 수련이었다.
왜냐면…….
바보처럼 보일 테니까!
“맹세코 방금 들어왔어요. 근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내가 오른손잡이잖아? 이렇게 연습하면 양손을 다 잘 쓸 수 있대.”
“에이, 그런 방법으로 어떻게 양손잡이가 돼요?”
현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누가 선배 놀리려고 한 소리 아니에요?”
“준후한테 들었거든?”
“그럼 준후 선배가 아영 선배 놀리려고 한 거죠.”
현수의 미지근한 반응에 아영은 오기가 생겼다.
비록 양손 가위바위보 수련이 멋은 없더라도 확실한 효과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준후는 분명 이 수련법을 통해 양손잡이로 거듭났다고 했다.
“방금 뱉은 말 책임질 수 있어? 너 내년쯤에 내가 양손 다 쓰면 어떻게 할래?”
“그럼…… 일주일 동안 여장하고 근무 설게요.”
“그 말 꼭 지켜.”
아영의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
* * *
잠시 짬을 내서 준후는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주말 백화점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야 할 로비는 한산하고 조용했다.
외래 진료가 30분 전에 끝난 덕분이었다.
환자든, 보호자든, 직원이든.
이 시간이 되면 남을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다 떠나게 된다.
준후는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 적은 탓일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정장 입은 사내의 구두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아마도 사내는 보험 회사 직원일 것이다.
피보험자를 만나거나 피보험자의 차트를 발급받기 위해 병원에 들렀을 것이다.
준후는 아직 보험 회사 직원과 엮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외래 교수가 되면 사정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환자의 목이나 허리 수술을 집도하고 또 후유 장애 판정을 내리게 되면.
보험 회사 사람들과 지리멸렬한 다툼을 해야 할지 몰랐다.
뭐, 요즘은 보험 회사뿐만 아니라 환자가 사기를 치는 경우도 제법 있다만…….
대략 5분여를 걸어, 준후는 뇌혈관 질환을 진료하는 외래 진료실에 도착했다.
외래 진료가 끝났으므로 스테이션에 외래 간호사가 없었다.
환자의 진료 순서를 알려주는 전광판과 스테이션 위쪽에 달린 조명이 꺼져 있었다.
분위기가 스산했다.
「신경외과 신동훈 교수」
준후는 제1진료실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할 일은 시호를 물리치기 위한 세 번째 과정이었다.
첫 번째 과정은 동기 경수에게 협조를 부탁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과정은 아영을 쉬게 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 과정은 신동훈 교수를 포섭하는 일이었다.
오로지 레지던트의 생각만으로.
이번 일을 몰아붙였다간 나중에 뒤탈이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은 하얬다.
바닥부터 벽면, 천장까지 다 눈에 덮인 듯 하얬다.
방 한 켠에 책장이 놓였고 책장에 전공 서적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인체 해부도 그림이 벽에 붙었고 창가에 놓인 화분이 싱그러운 초록빛을 자랑했다.
“어? 왔니? 거기 앉으렴.”
책상에서 업무를 보던 동훈이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그 태도와 눈빛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동훈은 준후를 신뢰했고.
준후도 동훈을 신뢰했다.
둘 사이는 제법 끈끈했다.
“저녁에도 바쁘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다 퇴근하셨던데.”
“작성 중인 논문이 있어서 말이야. 그나저나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동훈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준후를 응시했다.
“매우 중요한 일을 노티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라…… 긴장을 해야 하는 일이니? 아니면 기대를 해야 하는 일이니?”
“죄송하지만 전자인 것 같습니다.”
“으음…… 그래? 어디 말해보렴.”
“심한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원, 녀석도. 걱정 말고 빨리 말이나 해 봐.”
“저희 과 치프 이시호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만…….”
준후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확 치고 나갔다.
단거리 육상선수가 신호를 받고 튀어나가듯.
“이시호.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동안 많은 환자를 죽였고 조만간 또 환자를 죽일 계획입니다.”
“뭐…… 뭐라고?”
동훈이 경악했다.
부릅뜬 두 눈을 한참 동안 깜빡거리고 입은 바보처럼 쩍 벌리고 있었다.
준후가 예상한 반응 그대로였다.
“아주 질 나쁜 농담이구나. 내가 시호를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시호는 결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친구가 아니란다.”
동훈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시호를 두둔했다.
이 역시 준후가 예상한 반응!
“그래서 이시호가 더 무서운 인간인 겁니다. 모두를 감촉 같이 속였으니까요.”
준후는 가운 주머니에서 인쇄물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시호의 수첩을 복사해놓은 것이었다.
“……!”
인쇄물을 읽는 동훈의 눈동자가 진도 8.0 강도의 지진처럼 흔들렸다.
뒤늦게 손도 함께 떨렸다.
“이것도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준후는 동훈에게 휴대폰도 내밀었다.
휴대폰 액정에는…….
이중 서랍장과 그 안에 담긴 프로포폴, 펜타닐, 주사기 등등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동훈은 모든 증거를 훑더니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충격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모습이었다.
“제가 단순히 악담을 하기 위해 교수님을 찾은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믿으시겠죠?”
“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그 착한 시호가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짓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인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언제 알았니?”
동훈이 화제를 돌렸다.
“심증은 6개월 전부터 있었고 증거는 오늘 찾았습니다.”
“굳이 날 찾은 이유는?”
“원래는 과장님께 먼저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과장님께 알려봐야 사건을 뭉개려고 하실 게 뻔하시니까요.”
“과장님 성격이라면 그랬겠지. 의국 평판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양반이니까.”
동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준후 네 계획은 어떻게 되니?”
“함정을 파서 이시호를 완전히 묻어버릴 계획입니다.”
“함정? 지금 확보한 자료로도 충분히 경찰에 넘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동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첩에는 살인 날짜와 수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굳이 함정 수사가 더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이시호가 감옥에서 아예 못 나왔으면 해서 그렇습니다.”
“아주 단단히 이를 갈았구나.”
“네. 더 이를 갈았다면 치아에 전부 임플란트를 박았어야 할지도 모르죠.”
준후는 시호를 물 먹일 작전을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동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두 사람 사이에 금방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교수님.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설명을 마치고 준후가 동훈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면 감사하고 죄송하면 죄송하지 감사하면서 죄송할 건 뭐니?”
“그게…….”
준후의 입술이 힘겹게 떼어졌다.
동훈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건 동훈이 준후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믿어주었다는 것.
동훈이 준후의 계획에 동참해 주었던 것 때문이었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이번 일로 동훈이 과장에게 찍힐 확률이 컸기 때문이었다.
시호가 범죄가 밝혀지는 순간.
서울 신원대학교 병원 신경외과의 위신은 당분간 땅바닥에 처박힐 게 분명했다.
그런데 준후의 설명을 듣고 동훈은 그저 웃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사람이라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켜야지.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란다.”
“……교수님.”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울 테니 넌 내 계획에 충실하렴.”
“감사합니다!”
준후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무림에서도.
또 현대에서도 정의는 아직 살아 있었다.
* * *
그 주 토요일.
드르르륵.
드르르륵.
준후는 캐리어를 끌며 신경외과 병동을 걷고 있었다.
다음 주부터 대전에서 근무를 해야 했기에 숙직실에 있던 짐을 챙긴 것이었다.
아영에게는 어제 대전 파견 소식을 전했다. 놀랍게도 아영 역시 다음 달쯤 대전에 파견을 가게 됐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다.
당직실 앞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들이 준후를 반겼다.
“고생하고 잘 갔다 와.”
민경의 말이었고.
“어휴, 환타가 떠난다니 속 시원하네.”
경수의 말이었고.
“대전 근무는 서울보다 몇 배는 더 힘들 거야. 아무쪼록 건강에 신경 써.”
사이코패스 시호의 말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오늘이 네 제삿날인지도 모르고.
준후는 속으로 시호를 비웃었다.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 뒤, 준후는 신경외과 병동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