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71화 (270/424)

271화

제52장 박멸(1)

“선생님은 누구세요?”

흉부외과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업무 중이던 간호사가 시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늦은 저녁.

타과 의사가 병동을 찾아오니 퍽 놀란 눈치였다.

“신경외과 시호라고 합니다.”

시호는 목걸이에 걸고 있던 명찰을 가볍게 흔들었다.

간호사가 명찰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쩐 일로…….”

“컨설턴트(협진)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협진이면 전화로 하셔도 되지 않나요? 번거롭게 병동까지 안 오셔도 되는데.”

간호사의 질문이, 시호는 번거롭고 귀찮았다.

가뜩이나 살심(殺心)이 충만해서 미칠 것 같은데 별 같지도 않은 게 훼방을 놓고 있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거늘.

메스로 입을 찢어버릴까?

시호는 가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메스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늦은 시간에 저희 병동까지 와달라고 하면 민폐지 않습니까? 그래서 찾아왔죠.”

“와! 선생님 정말 따뜻한 분이시네요. 당직실은 저쪽에 있습니다.”

“고마워요.”

시호는 곧바로 간호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이동했다.

흉부외과 병동은 고요했다.

병실은 어두컴컴했고 복도를 걷는 사람은 없었다.

환자들은 대부분 꿈나라에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면 준후의 여자친구인 아영도 비슷한 곳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꿈나라는 아닌 저승 세계로.

시호는 흉부외과 당직실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아영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아영의 시체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준후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정도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감방에서 썩어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호는 당직실 문을 반쯤 열었다.

그 순간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 자리에 실망감이 채워졌다.

당직자는 남성이었다.

즉, 아영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 시죠?”

흉부외과 당직자도 앞선 간호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호를 응시했다.

“신경외과 이시호라고 합니다. 아영 선생님을 뵙기로 했는데, 어디 계시죠?”

“…….”

“선생님?”

“아. 네. 컨퍼런스 룸으로 가시면 돼요.”

당직자의 표정이 오묘했다.

뭔가 비밀을 감춘 듯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렸던 시호는 별일 아닐 것이라 무시하고 컨퍼런스 룸으로 직진했다.

드르르륵.

쾅!

빠르게 컨퍼런스 룸에 도착한 시호는 이번에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영이 없었다.

대신 준후가 회의실을 지키고 있었다.

환영인가 싶어서 눈을 비볐지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준후였다.

준후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팔짱을 끼며 시호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멸시하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간 준후의 눈깔을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시 만나니 반갑네?”

“너 이 새끼……! 대체 네가 왜…….”

빠드드득, 시호가 이를 갈았다.

“왜긴 왜겠어? 네 허튼짓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 막으러 왔지.”

“…….”

“교수님 앞에서 감성 좀 팔아주고 아영이한테 바로 달려올 줄 알았거든.”

“…….”

“넌 아영이를 살해하는 게 내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복이라고, 분명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준후의 지적에 시호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준후가 자신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크으으윽.

지금까지 줄곧 서준후의 손아귀에서 희롱당했단 말인가.

“그럼 아영인 어디 있지?”

“병원에는 없어. 내가 미리 부탁했거든. 오늘은 집에서 푹 쉬라고.”

“한 방 먹었군.”

“먹은 게 한 방뿐일까, 두세 방은 먹은 것 같은데?”

“크크크큭.”

준후와 대화를 나누던 던 중.

시호가 미치광이처럼 웃어댔다.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컨퍼런스 룸을 뒤흔들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감옥에 갈 생각만으로도 벌써 그렇게 즐거운가 봐?”

“아니. 차라리 잘 됐다 싶어서. 아영이보다 널 죽이는 편이 훨씬 더 뜻깊을 것 같아서 말이지.”

스으으윽.

가운 주머니를 빠져나오는 시호의 손에 메스가 들려 있었다.

회의실 조명을 반사하며.

메스가 날카로운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시호는 칼날의 끝을 준후에게 겨누었다.

당직실의 공기가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휘이이잉.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는 귀곡성처럼 스산했다.

날실과 씨실처럼 엇갈렸던 두 사람의 악연이,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결판나려 하고 있었다.

“다 좋은데 네 계산에 오류가 있군.”

“오류? 뭐지?”

“아마 이쯤 되면 경찰이 들이닥쳐야 했을 텐데 경찰이 없잖아? 즉, 널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거지.”

시호가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메스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준후의 피지컬이 남다르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메스 앞에서는 얄짤 없었다.

이곳, 흉부외과 컨퍼런스는 반드시 준후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래. 어디 마음 놓고 날뛰어 봐. 여기는 녹음기도 없고 카메라도 없어. 너랑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준비한 공간이지.”

“끝까지 까부는구나.”

더 이상 주둥이는 필요 없었다.

타다다닷.

빠른 걸음으로, 시호는 준후를 향해 돌진했다.

원형 테이블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에 반원을 그리며 준후에게 다가가야 했다.

준후는 어느새 팔짱을 풀고 달려오는 시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시호의 심장이 난폭하게 뛰어댔다.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며 몸속을 도는 피가 뜨거워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호는 준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환자와 주변을 챙기는 고운 마음씨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고.

인간은 이득에 움직이는 존재인데 준후는 그런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태도를 보였다.

성악설을 신봉하는 시호에게는 준후의 존재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서 준후를 괴롭혔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준후는 모든 면에서 시호보다 몇 발자국 앞에 있었다.

따라잡으래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미세 현미경을 고장내놨더니 루뻬(광학안경)만 쓰고 혈관을 문합해 버리는데…….

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리라.

메스를 손에 쥐고 미치광이 모드에 들어선 시호는 세상 그 누구라도 시체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넌 죽어야 해! 너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돌연변이라고.”

쎄에에엑!

쎄에에엑!

메스가 준후의 가슴팍을 잇달아 맹렬하게 찔렀다.

하지만 준후는 허리로 S자를 그리며 여유롭게 피해냈다.

시호는 바짝 독이 올랐다.

가로로 베고, 세로로 베고, 대각선으로 베고, 사정없이 찌르고 등등.

메스로 준후를 수십 차례 난도질했지만 그때마다 메스는 허공을 갈랐다.

준후는 유령이었다.

보이긴 하는데 만질 수가 없었다.

시호는 어느 순간부터 지치기 시작했다. 팔이 파르르 떨리고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서준후…….

이 녀석은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메스를 전부 회피하면서 단 한 번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이 괴물은…….

“역겨운 새끼.”

“뭐라고?”

“넌 인간 말종이야.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쓰레기지.”

시호의 메스를 피하며 말하는 준후의 목소리가 난폭했다.

“넌 아무것도 몰라. 죽고 죽이는 게 인간의 본성이야. 난 본성에 충실한 것뿐이라고!”

시호는 준후의 목덜미를 향해 메스를 대각선으로 내리그으면서 발악하며 말했다.

후우우웅.

그러나 메스는 이번에도 허망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아니. 넌 쾌락 살인을 즐기는 저급한 변태일 뿐이야. 내가 너 같은 인간을 한두 번 상대한 줄 알아?”

“…….”

“여기가 현대가 아니었으면 너는 진작 내 손에 죽었어.”

준후의 살벌한 고백에 시호는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곳이 현대 아니었으면’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고.

착해 빠진 준후가 자신을 죽인다고 하는 말은 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준후에게 뭔가 비밀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드르르륵.

쾅!

“이봐 거기! 당장 칼 내려놓지 못해!”

당직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시호가 소리가 나는 쪽을 힐끔 쳐다보자 경찰이 보였다. 두 명의 경찰은 다급하게 시호의 등 뒤를 선점했다.

한 명은 진압봉을 들고 다른 한 명은 총을 빼 든 상태였다.

“서준후, 너 설마 여기까지 계산한 거냐?”

시호가 허망하게 웃었다.

“물론. 콩밥 오래오래 드시라고 작전을 하나 더 짜 봤지. 살인미수가 2개면 허리가 꼬부라질 때쯤은 되어야 감방에서 나올 거다.”

시호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준후가 말했다.

“선생님. 다친 데는 없습니까?”

“네. 다행히 없습니다.”

“이봐요. 당장 칼 내려놓고 말로 합시다. 의사면 알 건 다 알 만한 양반이 왜 그래요?”

경찰이 시호를 다독였다.

하지만 이 상황이 시호에겐 진퇴양난이었다.

정면에는 준후가 있고 등 뒤에는 무장한 경찰이 있었다.

어느 한쪽으로도 오갈 데가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은 거짓말이었다.

원통하군.

결국 서준후는 죽이지도 못하고.

이 모양 이 꼬라지라니…….

자괴감이 커다란 해일이 되어 시호의 마음을 덮쳤다.

준후를 겨누고 있던 메스를 시호는 땅바닥으로 축 늘어뜨렸다.

“그래요. 생각 잘했습니다. 근데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볼까요?”

“…….”

“쥐고 있는 칼, 손에서 놓으세요. 살짝 힘을 빼면 됩니다. 살살.”

“미친 새끼. 애새끼 취급도 정도가 있지.”

시호는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나이든 경찰을 노려보았다.

그 섬뜩한 눈빛에 경찰이 몸을 움찔거렸다.

“서준후. 뭐 하나만 묻자.”

“왜?”

“넌 아까부터 내가 네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고 했지?”

“맞아. 놀아 본 놈이 놀 줄 안다고. 너도 이미 질릴 정도로 놀아보지 않았어?”

준후의 입가에 얄미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맞춰 봐. 내가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지. 나는 구석에 몰린 너를 다시 공격할까?”

“…….”

“아니면 가해자가 무서워서 다리나 벌벌 떨고 있는 경찰들을 공격할까?”

시호의 말에 경찰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호의 지적은 옳았다.

경찰들은 시호를 제압하기 위해 진압봉과 공포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왜 말을 못 해? 이번에는 자신 없나 보지?”

“…….”

“정답은 이거다!”

파바바밧!

시호가 달렸다.

목적지는 창가까지 밀려난 준후의 코앞이었다.

“멈춰! 안 그러면 쏜다!”

“배짱 있으면 쏴 보시던가!!”

경찰을 무시하고 달려나간 시호.

이제 시호와 준후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결정의 순간!

메스를 쥔 시호의 손이 향한 곳은 준후가 아니었다. 정면으로 뻗어 나가던 메스는 반원을 그리며 오히려 시호 자신의 목덜미를 향했다.

그랬다.

시호는 준후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계획이었다.

감옥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할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게 백 번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기왕 목숨을 끊는다면.

자신의 피를 준후에게 흠뻑 뿌려주고 싶었다.

준후의 꿈속에서라도 나타나 준후를 괴롭히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의 경동맥을 끊어버리려던 시호의 팔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시호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이이이익!”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었다.

손목에 무쇠 족쇄가 채워진 것 같았다.

“당연히 난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줄 알았어.”

준후가 속삭이듯 말했다.

“뭐…… 뭐라고?”

“너 같은 부류는 중간이 없거든. 남을 못 죽이면 본인이라도 죽어야지.”

“…….”

“근데 궁금하지 않아? 네 팔이 왜 안 움직이는지?”

“…….”

“지금 내가 허공섭물이라는 무공을 쓰고 있거든. 내공에 흡자결을 사용해 네 손목을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단 말이지.”

“그게 무슨 개소리인데?”

시호가 당황해서 되물었고 준후는 씽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감옥에서 무협지 좀 열심히 읽어 봐.”

“…….”

“그럼 알게 될 거야. 네가 감히 메스를 들이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감당할 수 없는지.”

말을 마친 준후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시호의 손에 들렸던 메스가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준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 초능력자 같은 모습을 경찰은 보지 못했다.

오로지 시호만 볼 수 있었다.

시호의 등이 경찰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으므로.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만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지?

시호는 더 경악할 겨를도 없었다.

쿵!

준후가 다리를 걸어서 뒤로 나자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심적인 충격이 커서 몸의 아픔은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준후. 넌 대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