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73화 (272/424)

273화

제52장 박멸(3)

“에이, X발!”

잔뜩 화난 욕지거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쾅!

그 뒤를 과장실 문 닫는 소리가 뒤따랐다.

과장은 콧김을 씩씩 뿜으며 소파에 앉았다. 과장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으며 턱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리 위원회와 징계 위원회를 잇달아 참석하고 막 과장실로 돌아온 길이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틀 전 시호가 난데없이 연쇄살인마에 살인미수자로 긴급 체포되었다.

곧 매스컴이 한바탕 뒤집혔다.

세상은 오로지 시호 이야기만 해대기 시작했다. 시호가 세상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지킬 박사는 실존했다, 두 얼굴의 외과 의사.]

[그 외과 의사는 사람을 죽였다.]

[대학병원 신경외과 의사, 수차례 환자를 살해하고 현장에서 살인미수로 체포됐다.]

이는 평소 과장이 좋아하는 가십거리였지만 이번 이슈만큼은 도무지 즐길 수가 없었다.

시호가 누구인가.

과장의 밑에서 일하던 레지던트 4년 차가 아니던가.

즉, 이번 일은 남 일이 아니라는 것. 그 탓에 시호의 불똥이 과장에게 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화살이 과장에게도 날아온 것이다.

뒷일을 수습하느라 과장은 그야말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여기저기 핑계를 대고,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언론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는 등등.

모멸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과장은 주먹으로 앉은뱅이 테이블을 거세게 내리쳤다.

쾅!

테이블이 요동쳤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신문과 잡동사니들이 겁먹은 듯 몸을 들썩거렸다.

-안 됐어. 자네.

-이번 일만 없었으면 내년에 진료부원장은 따놓은 당상이었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에…….

-재수도 없지.

회의 후 독대한 징계 위원장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랬다.

과장은 내년 승급 신사에서 진급을 약속받은 몸이었지만, 시호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똑.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들어오라고 하자 뇌종양 파트 교수 신동훈이 과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동훈이 헛기침을 했다.

평소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과장의 눈치만 봤다.

“신 교수.”

“네. 과장님.”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단 말이지.”

“…….”

“이렇게 큰일을 저지를 거면 나한테 미리미리 보고를 했어야지! 그래야 나도 대비를 했을 거 아니야?”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과장이 동훈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분노의 화신 같았다.

“죄송합니다. 미처 그 생각은 못 했습니다.”

“자네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이런 결과를 생각 못 했다고? 거짓말도 작작해.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잖아!”

과장은 동훈의 허점을 단번에 찔렀다.

“억울합니다. 과장님.”

“억울? 지금 내 앞에서 억울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와? 지구상에서 지금 나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어?”

“그야 과장님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시겠지만, 저도…… 할 말은 있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지껄여 봐.”

“말씀드리겠습니다.”

동훈의 설명이 이어졌다.

동훈은 본인의 가장 큰 목표가 내년에 부교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과장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도 했다.

“교수님께 잘 보여야 하는 제가 교수님을 엿 먹인다니요. 넌센스 아니겠습니까?”

“으음…… 그럼 단순히 경솔했다는 건가?”

“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시호가 연쇄살인마라는 걸 알고. 현장에서 살인미수로 붙잡혔는데도 그 여파가 이리 클 줄 몰랐다?”

“그렇습니다. 교수님이 매스컴 관계자를 많이 알고 계시니 유야무야 잘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동훈이 차분하게 말을 계속했다.

“과장님과 앙숙인 성형외과 과장이 이번 사태에 불을 지른 건 아닐까 예상도 됩니다.”

“양진호가?”

“네. 과장님을 밀어내고 본인이 진료부원장 자리를 날름 집어삼키려는 의도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야기군. 그건 그렇고…… 시호가 사이코패스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과장의 기습 질문에 동훈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달변으로 쏟아지던 말의 흐름이 뚝 끊겨 버렸다.

“왜 말을 못 해? 자네 최근까지도 시호를 엄청 좋아하지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시호를 의심했다고 하니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어…… 그게…… 언젠가부터 시호가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구체적인 계기는 뭐지?”

“뭐라고 설명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랬습니다.”

“단순히 그냥?”

“네. 그냥.”

동훈의 어정쩡한 답변에 과장의 왼쪽 눈썹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치솟았다.

슬슬 짚이는 곳이 있었다.

“슬슬 정리해 보지. 자네가 나를 엿 먹일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내가 지금 엿을 먹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야. 맞나?”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자네가 엄청난 논문을 발표하거나 엄청난 수술을 집도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

“그러니 자네의 부교수 임명은 없는 걸로 하겠어. 그래야 공평하겠지?”

“네. 알겠습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동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의 성격을 잘 알아서인지, 진급을 이미 포기했던 건지 동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됐어. 그만 가 봐.”

“다시 한번 사과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과장님.”

동훈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과장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동훈의 배후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단 동훈이 시호가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알아챘다는 사실이 말이 안 됐다.

시호를 사냥하기 위해 덫을 놓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둘 다 동훈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또한 동훈은 아까 이렇게 말했다.

성형외과 과장 양진호가 이번 사건의 배후라서 일이 커진 것이라고.

이 역시 동훈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동훈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남을 파는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스태프들을 살피다가 과장은 동훈의 배후로 가장 적합한 인물을 포착했다.

서준후, 레지던트 2년 차.

각종 고난이도 수술에서 활약.

시력은 무려 10.0.

얼마 전 수부외과 수술 어시스트까지 완벽하게 마친 자타공인 천재 외과의.

신경외과 스태프들이 대부분 물렁했으므로 과장은 준후의 존재를 일찌감치 눈여겨보았다.

준후는 의술만 출중한 게 아니라 정치적인 균형 감각도 갖춘 인재였다.

지금까지 신경외과가 겪은 큰 사건에, 알게 모르게 준후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걸.

과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준후의 정치력을 판단하기 위해 방관했을 뿐.

이거 완전히 호랑이 새끼였군.

확 찍어 누르든가, 단단히 목줄을 채우든가 해야지.

나중에는 나한테까지 송곳니를 들이대겠어.

준후를 경계하며, 과장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 * *

준후는 모처럼 집에 있었다.

서울 본원을 떠나고, 대전 신원대학교로 파견 가는 날은 오늘로부터 이틀 뒤였다.

그간 준후의 노고를 인정해서 서울 의국이 준후에게 4일의 휴가를 줬던 것이다.

모처럼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준후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시호에 관한 기사가 산더미 같았다. 시호 이름만 치면 기사가 화수분처럼 쏟아졌다.

칼럼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시호를 까고 있었다.

시호는 모두까기 인형이었다.

비록 희생자들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애석했지만.

시호가 드디어 죗값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준후는 통쾌했다.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손꼽았던가.

싱글벙글하던 준후는 이내 침대에 똑바로 누웠다.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호를 참교육했다고 해서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만사형통일 거라고 낙관할 수는 없었다.

어찌 보면 시호는 쉬운 상대였다.

명확한 증거만 잡으면 법의 심판대로 보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료계의 지저분하면서도 촘촘한 커넥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는 학연, 지연, 혈연.

무엇보다 개혁이 불가피한 부조리한 의료 시스템 등등.

남아 있는 적들은 시호보다 더 강력하고 광범위했다.

그래도 스승님과 함께라면 잘 이겨낼 수 있겠지, 난 혼자가 아니야.

준후는 문득 떠오른 불안을 물리쳤다. 그리고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다시 손에 쥐었다.

아영의 연락은 여전히 없었다.

돌멩이가 얹힌 것처럼 가슴이 무거웠다.

며칠 전 통화에서 아영은 준후를 맹비난했다.

시호의 형량을 더하기 위해 준후가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삼은 것을 알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런 위험한 행동을 상의도 없이 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고도 했다.

-당분간 연락하지 마!

눈을 감으면 아영의 단호하고 차가운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준후는 아영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한편 극도의 답답함도 느꼈다.

무림 출신인 준후는 총을 든 강도와 마주쳐도 손쉽게 상대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세계 격투기 챔피언 1위가 100명으로 불어나 한꺼번에 덤벼도 다 박살 낼 자신이 있었다.

메스를 든 시호?

그따위는 위협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갓난아이가 머리카락을 흉기랍시고 흔들어대는 수준으로밖에 안 보였다.

물론 아영은 이런 준후의 무력을 몰랐으니까 걱정했겠지만…….

안 되겠다.

오늘 저녁에 바로 오해를 풀어야겠어.

각오를 마친 준후는 외출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하늘은 푸르고 겨울바람은 쌀쌀맞았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들이 메마르고 앙상했다.

오후 2시.

점심시간이 지난 거리는 평온했다.

인도에는 인적이, 차도에는 차가 드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하철을 타고 준후가 도착한 장소는 서울 성우 병원이었다.

서울 성우 병원.

이곳은 흔히 말하는 빅5 병원 중 하나였다.

가장 최근에 빅5로 합류했던 만큼 병원 건물이 세련되고 웅장하고 현대적이었다.

빅5 병원답게 건물을 오고 가는 사람도 많았다.

가만히 병원 건물을 보고 있자면 건물이 사람을 와르르 삼켰다가 와르르 뱉어내는 듯했다.

준후는 본관 로비로 들어갔다.

병동 바닥과 벽면에 적힌 안내판을 따라 소아암 병동으로 이동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고유리 간호사님이 누구시죠?”

소아암 병동 스테이션에서 준후가 물었다.

준후의 등장에 업무를 보던 간호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쪽이야말로 누구세요? 혹시 유리 남자친구?”

“유리 남자친구 아니야. 이분은 신원대 병원 신경외과 선생님이자 100만 뉴튜버라고! 와! 미친 실물이 100배는 더 잘 생겼네. 서준후 선생님 맞으시죠?”

준후를 알아본 한 간호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 네. 맞습니다. 저를 알아봐 주시는 분이 계시니 괜히 쑥스럽네요.”

“쑥스러울 것까지야, 이젠 익숙해지셔야죠. 사실 유리한테 선생님 채널을 알려준 것도 저예요.”

“아. 그랬군요. 영업도 대신해 주시고 감사하네요. 이따가 커피라도 한 잔 사겠습니다.”

“저야 대환영이에요. 근데 사인받고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준후는 팬을 자처한 미현 간호사에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 촬영도 했다.

확실히 100만 뉴튜버가 되면서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나긴 했다.

아까 지하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리는 잠깐 라운딩 중이라 금방 돌아올 건데요. 저희 병원은 어떤 일로 오셨어요?”

미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다른 간호사들도 대답이 궁금하다는 듯, 빤히 준후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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