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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74화 (273/424)

274화

제52장 박멸(4)

“아…… 듣고 보니 이해가 되네요. 유리, 걔 오죽하면 병동에서 별명이 천사겠어요.”

“유리라면 인정이죠.”

“우리 유리, 진짜 멋있네. 여자가 봐도 반하겠어.”

준후의 설명에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납득한다는 반응이었다.

덕분에 준후는 고유리 간호사에 대한 주변의 평판을 확인했다.

준후가 갑작스레 병동을 찾은 이유.

그것은 한 통의 메일에서 시작되었다.

대략 나흘 전쯤이었다.

병동에 몸과 마음이 지친 혈액암 환자가 있다. 그 환자가 준후의 팬인데 준후가 혹시 병동을 찾아와서 환자에게 용기를 줄 수 없겠냐고, 유리가 메일을 보냈다.

준후가 흔쾌히 허락하면서 오늘 자리가 만들어졌다.

“유리야! 여기야! 여기! 서준후 선생님 오셨어.”

한 간호사가 병동 복도를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준후도 고개를 돌렸다.

유리가 드레싱 카트를 끌고 스테이션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유리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머리망으로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으며 피부가 말끔하고 고왔다.

눈이 동그랗고 컸고 웃을 때 앞니가 드러나 토끼 같은 인상을 풍겼다.

“와, 선생님. 진짜 와주셨네요?”

유리가 준후 곁에서 활짝 웃었다.

생일 선물을 받아서 기쁜 아이처럼 제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댔다.

“아휴. 좋은 일 하는데 당연히 와야죠.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요.”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신경외과에서 근무하고 뉴튜브 촬영까지 하면, 쉬는 날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으실 텐데.”

“그럼 메일을 대충 보내셨어야죠. 감동해서 안 올 수가 없었거든요.”

준후는 유리가 보낸 메일의 글을 떠올렸다.

유리는 글을 잘 썼다.

준후의 마음을 취향 저격했다.

환자의 사연.

환자가 병동에서 겪는 고초.

그런 환자를 바라보며 느끼는 유리의 안타까움과 비애 등등.

감성적인 글에 준후는 응원차 병동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평소 일기 쓰는 습관이 있는데 그게 도움이 됐나 봐요.”

“저도 글 잘 쓰고 싶으면 일기를 써야 할까 봐요.”

“네. 강추해요. 대신 나중에 실력 안 늘었다고 따져도 책임은 못 집니다?”

농담하는 유리의 미소는 눈부셨다.

웃음이 기본이고 웃음이 진심이구나.

유리의 별명이 왜 ‘천사’인지 준후는 피부로 느꼈다.

짧은 대화 후.

유리가 반보 앞서서 걸었고 준후가 유리 곁에서 걷기 시작했다.

소아암 병동은 한산했다.

거동이 불가능한 환자가 많아서 그런지 복도에 사람이 귀했다.

성인 병동과 달리 소아암 복도 벽에는 각종 캐릭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펭귄, 토끼, 공룡 등등.

화려한 색감에 잠시나마 눈이 즐거웠다.

“여기에요. 혜인이가 있는 병실이.”

유리가 복도 끝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균 병실이네요.”

“네. 벌써 웅웅 소리 들리시죠?”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균 병실은 24시간 에어 필터가 작동하고 있었다.

“소독하고 장비 착용하고 입장해야 하나요?”

“아니요. 저희는 환자 병실을 격리실로 만들어 놔서요. 그냥 들어오셔도 돼요.”

드르르륵.

유리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균 병실은 1인실이었으며 꼭 교도소의 면회실처럼, 환자가 생활하는 공간과 면회자가 있는 공간이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다.

준후는 불투명한 창 너머를 응시했다.

비구니처럼 머리가 푸르스름한 학생이 침대에 누워 무기력하게 TV를 보고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강나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입원 치료 중인데 이틀 뒤 조혈모이식세포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나은이가 겪었던, 또 겪고 있는 아픔을 준후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자 무례였다.

지금이 딱 그런 때였다.

휙!

급하게 허리를 낮추는 준후.

그런 준후를 보고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갑자기 뭐 하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뇨. 나은이를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요. 그냥 등장하면 재미없잖아요.”

준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저한테 메일 보낸 거 나은이가 알고 있나요?”

“네. 알아요.”

“잘됐네요. 그럼 이렇게 말씀해 주세요. 원래 제가 오늘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일정 때문에 갑자기 방문이 취소됐다고.”

“이야, 즉석에서 이벤트도 할 줄 아시네요?”

“원래 삶이란 게 이벤트의 연속 아니겠어요?”

“나은아. 나 왔어.”

유리가 칸막이 쪽으로 다가가 나은을 불렀다. 준후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

“괜찮아요. 워낙 바쁜 선생님인데 직접 보는 게 더 이상하죠.”

“그럼 실망 안 했니? 어쨌든 준후 선생님이 온다고 했다가 안 오신 거잖아.”

“바쁜 분인데 그 정도는 이해해야죠. 사람 일이란 게 다 그런 건데…….”

나은의 논리는 쿨했지만 나은의 목소리는 전혀 쿨하지 못했다.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이해하긴 뭘 이해해? 하나도 이해 못 한 것처럼 보이는데?”

준후가 허리를 펴며 대화에 껴들었다.

준후를 확인한 나은의 두 눈이 부엉이처럼 동그래졌다. 메두사에게 석화 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몸이 굳었다.

나은은 뒤늦게 두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렸다.

“서…… 선생님?”

나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이윽고 나은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준후의 방문에 감격한 모습이었다.

준후도 괜히 눈시울이 뜨겁고 코끝이 찡했다.

경제적으로 곤란한 환자나 보호자를 돕기 위해 시작한 뉴튜브.

그 뉴튜브 영상이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감동이 된다는 사실을 왜 이제 깨달았을까.

“괜찮아. 나은아. 더 울어도 돼.”

준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은을 위로했다.

* * *

드르르륵.

준후가 무균 병실에서 나왔다.

면회를 시작한 지 무려 1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은과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준후는 나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었다.

끔찍한 백혈병 투병 속에서.

창살 없는 감옥 속에서.

16세 소녀에게 쌓인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준후는 일부러 입을 닫고 귀를 열었다.

대신 대화 중간중간 뉴튜브 영상에서 나왔던 개인기 몇 가지를 선보였다.

동전 구부리기라든가 아이돌 댄스 챌린지 등등.

나은은 꺄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나은이 좋아해서 준후도 좋았다.

면회를 끝내고 나올 때, 준후는 구부러진 동전과 사인한 종이를 그 자리에 두고 갔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타다다닥.

준후는 빠른 걸음으로 유리에게 다가갔다.

병실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유리가 다리를 휘청거렸던 것이다.

“아. 네. 멀쩡해요. 걱정해 주신 건 고마운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유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 쳤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넘어질 뻔했는데?”

“다이어트 하느라고 점심을 걸러서 그런가 봐요. 진짜 별거 아니에요.”

“거짓말 마세요. 귀신은 속여도 저는 못 속입니다.”

준후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용의자를 취조하는 것처럼 눈빛이 매서웠다.

목소리는 서릿발 같았다.

“제…… 제가 왜 선생님한테 거짓말을 해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유리가 어색하게 따지듯 물었다.

“거짓말을 한 이유라면…… 당연히 저한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겠죠. 다이어트는 그냥 핑계 아닙니까?”

“선생님이 뭘 몰라서 그래요. 여자는 평생 다이어트 한다구요.”

“근데 왜 다이어트 이야기할 때 제 눈을 피했어요? 눈동자가 왜 천장을 향했죠? 그건 이야기를 지어낼 때 하는 반응이거든요.”

준후는 유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근거를 구체적으로 댔다.

그리고 유리의 휘청거림에는…….

뭔가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준후는 생각하고 있었다.

“휴우. 졌어요. 선생님 눈썰미는 당할 수가 없네요.”

유리가 입술을 뾰족 내밀며 말했다.

“사실을 어제부터 현기증이 있고 속이 메스껍더라고요. 두통약을 먹었는데 별로 호전은 없고…….”

“…….”

“분명 피곤해서 그런 걸 거예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무슨 뜻이에요?”

“선생님. 잠깐 가만있어 보세요. 간단하게 머리 마사지해드릴게요.”

준후는 유리의 등 뒤로 돌아갔다.

손가락으로 유리의 관자놀이를 대충 마사지하는 시늉을 하다가, 유리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준후는 너무 많은 사건을 겪었기에 항상 최악을 걱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리의 말처럼 단순히 피로로 현기증을 느끼고 그로 인해 휘청거렸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다른 원인도 검증해 볼 필요가 있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손바닥으로 손바닥에서 다시 유리의 머리 안쪽으로 침투했다.

내공은 물결처럼 파동 쳤으며 두개골과 뇌막을 통과해 삽시간에 유리의 뇌혈관으로 퍼져나갔다.

그 속도가 가히 전광석화였다.

벌모세수를 한 후 준후의 내공 운용은 더욱 정교하고 빨라졌다.

준후는 내공에서 전해지는 감각을 마치 자신의 감각처럼 느끼며 유리의 뇌신경과 뇌혈관을 더듬고 끌어안았다.

마침내 준후의 손이 유리의 정수리에서 떨어졌다.

병원에서 뇌혈관 조영술을 받았다면 최소 40분은 걸렸을 텐데…….

준후는 고작 20초 만에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실시하고 검사 결과까지 확인했다.

이 지구에서 오로지 준후만 가능한 신기였다.

“와. 선생님이 머리 마사지해 주시니까 머리가 뜨끈하네요. 마치 조영제가 투입된 것 같았어요.”

마사지가 끝난다고 생각한 유리가 준후에게 감탄했다.

하지만 준후의 표정은 어둡고 딱딱하기만 했다.

“고 선생님.”

“네.”

“저랑 같이 응급실 가시죠. 1초가 아깝습니다.”

* * *

“선생님. 진짜 왜 이러세요?”

유리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현재 유리는 준후에게 잡힌 채 응급실로 끌려가는 도중이었다.

그저 약간의 현기증과 두통.

메스꺼움을 느꼈을 뿐인데, 준후는 이를 마치 죽을병처럼 과대해석하고 있었다.

무조건!

그리고 지금 당장!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었다.

“선생님들. 죄송한데 유리 씨, 잠깐 빌릴게요. 응급실 진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

“중요한 일이니까 이해해 주세요. 아, 그리고 배달 앱으로 커피랑 디저트 주문했으니까 맛있게 드세요.”

아까 전 스테이션을 통과하며 준후가 간호사들에게 양해를 구할 때 한 말이었다.

준후의 일 처리는 야무졌다.

“저 할 일 많아요. 응급실에서 진료받을 시간 없어요.”

“방금 할 일 많다고 했죠?”

“네.”

“그 일. 본인 손으로 하고 싶으면 내 말 따라요.”

준후의 눈빛이 비장미마저 감돌았다.

준후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웠다. 하지만 아무래도 현 상황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선생님. 너무 무례하시네요? 지금 제가 힘이 없다고 막 대하시는 거잖아요.”

유리는 준후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준후의 손아귀 힘은 천하장사였다.

부드러운 외모와 호리호리한 체구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악력이었다.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면 무례하다고 욕먹어도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제가 마치 시한부 환자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네. 그럴 확률이 커요.”

준후의 확답에 유리는 혀를 찼다.

준후가 신경외과의라는 건 알았지만 고작 머리 마사지를 1분 해놓고 무슨 진료가 가능하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잠시 후 억지로 도착한 응급실.

운 좋게 20분만 대기해서 응급의학의의 진료를 받게 되었다.

유리는 준후의 눈치를 보며 증상을 말했다.

문진하는 응급의학의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업무 중에 고작 그 정도 두통으로 응급실에 왔냐고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유리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준후 때문에 괜히 자신만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두통약 괜찮은 거 처방해드릴 테니까 먹고 푹 쉬세요. 아마 금방 좋아질 겁니다.”

“아. 네.”

“저기요. 죄송한데 고 선생님 CT 촬영해 주시죠.”

난데없이 준후가 대화에 껴들었다.

와…… 기어이 또 사고를 치는구나.

유리는 낭패라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고, 응급의학의는 불쾌하다는 듯 준후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뭔데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입니까?”

“서울 신원대 병원 신경외과 의사 서준후입니다. 두통약으로 해결이 안 되는 환자니까 최소한 CT 찍고 결과를 보죠.”

“이봐요. 여기가 신원대 병원인 줄 알아요? 조폭처럼 막 나가면 곤란하지.”

“제 장점이 뭔지 압니까?”

“뜬금없이 뭔 소리예요?”

“바로 돈이 많다는 거죠. 비보험 처리돼도 검사비까지 다 수납할 테니까 일단 촬영부터 해주시죠.”

“수납은 당연한 거고…… 만약 환자한테 이상 없으면 그쪽이 근무하는 신경외과에 전화해서 지금의 무례를 단단히 따질 겁니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응급의학의의 도발에 준후는 싱겁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을 대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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