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제52장 박멸(5)
CT 검사실에 들어간 유리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참을 만했던 현기증이 10배로 증폭됐다.
귀에서 쨍한 이명이 들려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내장도 빙글빙글 돌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신물을 가까스로 삼켜야 했다.
“우리 병원 간호사시네요. 근데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먼저 검사실에 있던 방사선사가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방사선사가 유리를 부축해 검사대에 눕혔다.
방사선사가 검사 시 주의사항을 몇 가지 말해주었지만 귀를 스쳐 갈 뿐이었다.
유리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뇌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제는 생각이라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몇 개의 단어들만 파편적으로 연결될 따름이었다.
준후 선생님…… 말이…… 맞아?
나 심각해?
아파, 이러다가 죽어.
싫어. 죽는 거.
위이이잉.
CT 검사기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유리가 누운 검사대가 원통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에 삼켜진 후.
유리의 의식은 짙은 안개처럼 뿌옇게 변해 버렸다.
같은 시각, CT 검사실 앞 벤치.
준후는 검사실 문을 바라보며 딱딱딱 이를 부딪치고 있었다.
눈빛은 불안했고 입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유리의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일단 유리는 뇌동정맥 기형 환자였다.
혈관은 크게 동맥, 정맥, 모세혈관이 있는데, 뇌동정맥 기형 환자의 경우.
동맥 → 모세혈관 → 정맥의 순서대로 혈류가 순환하지 않았다.
동맥 → 정맥으로 순환하여 모세혈관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혈류만 잘 흐르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니야?
누군가는 그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문제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혈압이 높은 동맥의 혈류가 모세혈관을 거치지 않고 정맥으로 바로 유입된다?
이러면 정맥에 출혈이 발생할 수 있었다.
지금 유리의 뇌실질에 뇌출혈이 발생한 것처럼!
30분 전, 준후는 ‘내공 뇌혈관 조영술’로 유리의 뇌에 발생한 출혈을 확인했다.
유리를 강제로 응급실로 끌고 간 이유.
응급의학의에게 무례하게 CT를 요구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드르르륵.
CT 검사실 문이 열리면서.
준후의 상념이 끊어졌다.
방사선사의 부축을 받아 복도로 나오는 유리를 보며 준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기어코 사고가 터졌다.
유리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검사실에 들어갈 때의 유리와 나올 때의 유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분,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요?”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맡을게요.”
준후는 비몽사몽 휘청거리는 유리를 벤치에 앉혔다.
환자의 의식을 평가하는 GCS 스코어 사정을 했다.
통증에 의해서만 눈을 떠서 2점.
이해 불가능한 신음 소리만 내서 2점.
회피 굴곡 반응이 있어서 4점.
총 점수는 8점이었다.
stupor(혼미) 상태로 발 빠른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응급실로 복귀하기 전 준후는 다시 한번 유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하듯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유리의 머릿속으로 침투시켰다.
출혈이 발생한 중대뇌동맥으로 집중시켰다.
내공을 통해 준후는 느낄 수 있었다.
터진 혈관 주변에 뭉쳐져 있는 작은 덩어리들, 혈종이라 불리는 것들을.
선풍공(仙風攻).
준후는 내공을 형상화하여 작은 동심원을 그렸다.
이윽고 생성된 유리 머릿속에 초소형 소용돌이.
내공의 소용돌이가 혈종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파쇄기를 통과하는 종잇장처럼 혈종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휴우.”
준후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는 어느새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1분 남짓했던 작업이 1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는데 이번 작업은 그만큼 고도의 컨트롤이 필요했다.
내공이 혈종 말고 다른 혈관이나 신경을 건드렸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준후는 의사가 아니라 살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최소한의 시간은 벌었어.
혈종을 내버려 뒀으면 점점 커져서 뇌를 압박하고 급기야 뇌탈출증이 발생했을 수도 있으니까.
두 팔로 유리를 안고 준후는 응급실로 복귀했다.
“으으으…… 으으으…….”
신음 흘리는 유리를 침상에 눕혔다.
문득 가슴이 아려왔다.
누구보다 열심이고 환자를 생각하는 유리가 뇌동정맥 기형으로 인한 뇌출혈로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하늘은 왜 항상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려고 할까.
하늘에서도 착한 사람은 귀하기 때문일까.
유리 씨는 절대 못 보냅니다.
아직 지상에서 할 일이 많아요.
오묘한 천도(天道)를 향해 준후는 속으로 선언했다.
결코 유리를 뺏기지 않겠다고.
“이거 참,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그쪽 말이 맞았네요.”
응급의학의가 침상으로 다가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민망해하는 걸 보니 CT 검사 결과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딱히 선생님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적어도 진료 당시에는 유리 씨를 심각하게 볼 근거가 없었으니까요.”
“제 편을 들어주는 겁니까?”
“아뇨.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준후의 대답이 담담했다.
만약 ‘내공 뇌혈관 조영술’이 없었다면 준후도 응급의학의와 똑같은 판단을 내렸으리라.
“당장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신경외과 콜 하셨죠?”
“네. 검사 결과 확인하고 바로 노티했어요. 금방 내려올 겁니다.”
“그 전에 수액도 달고 주사제도 연결하죠. 윤 선생님.”
“네. 지금 갑니다.”
응급의학과 간호사가 드레싱 카트를 끌고 침상으로 접근했다.
유리의 정맥 라인을 확보하고 하트만 용액을 연결한 후.
각종 주사제를 하트만 용액에 섞기 시작했다.
그제야 준후는 팽팽했던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은 잘 풀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잘 풀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것은 도무지 만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응급실로 헐레벌떡 내려온 신경외과의가 비보를 전했다.
“죄송한데 수술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야, 그게 무슨 개 소리야? 신경외과에서 뇌수술을 못 하면 정형외과에서 뇌수술을 하리?”
준후 대신 응급의학의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따졌다.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때려 죽어도 수술 T.O가 안 나와.”
“…….”
“뇌수술하는 교수님, 두 분이 세미나 가셨어. 다른 분들 정규 수술 스케줄 소화 중이고.”
신경외과의가 응급의학의에게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외과 나름의 울분이 담긴 대답이었다.
“신경외과 힘든 건 아는데 그래도 좀 심하지 않냐? 우리가 빅5 병원인데 응급수술을 못 한다고?”
“스케줄 꼬이면 못해. 설령 대통령이 와도.”
“구라 치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한담? 이분, 일반 환자도 아니고 우리 병원 간호사인데.”
응급의학의가 한숨 내쉬며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런 소식 전해드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신경외과의가 준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사과였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죠. 저도 신경외과 의사라 이해합니다.”
“네? 환자분의 남자친구 아니셨어요?”
“아뇨. 부탁을 받아서 잠깐 병원에 온 것뿐입니다. 전 서울 신원대 병원 레지던트 2년 차예요.”
준후는 동지를 향해 힘없이 웃어 보였다.
-빅5 병원인데 왜 수술을 못 해?
아까 응급의학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했는데.
신경외과나 흉부외과는 설령 빅5급 병원이라고 해도 응급 수술이 불가능할 수 있었다.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였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안 되는 일은 도태되기 마련이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말이다.
‘하…… 이제 어쩐다?’
준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음 같아서야 직접 수술을 하고 싶었다.
실제로 몇 개월 전의 준후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러니까 교수가 없어 수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집도해 환자를 살린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신원대 병원이 아니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타 병원 의사에게 수술 허가를 내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수술 가능한 다른 병원을 알아봐야 할까.
침상 분위기가 냉랭하고 무거워지는 가운데.
신경외과의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기. 제가 아까 교수님하고 통화를 해봤거든요?”
“네. 그런데요?”
“환자 상태를 노티 드려봤더니 보존적 치료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하셨어요. 수술 대신 보존적 치료로 전환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뇨제 투입하면서 혈종이 흡수되길 기다리자는 거죠?”
“역시 전공자라 말이 한 번에 통하네요.
유리의 뇌출혈은 뇌실질에 발생했다.
뇌실질에는 뇌척수액이 흐르는 통로가 있어서.
약물 투여만 잘하면 혈종이 뇌척수액에 희석되어 자체적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뇨제에 항고혈압제, 전해질제까지 섞으면 보존적 치료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죄송한데 전 반대네요.”
준후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희 교수님 판단을 무시하는 겁니까?”
신경외과의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목소리도 공격적으로 변했다.
“저희 병원에 왔으면 저희 병원 룰을 따라야 하지 않겠어요?”
“왜 갑자기 무시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전 단순히 의학적인 판단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쪽 판단이 저희 교수님 판단보다 나을 수 있냐고 묻는 겁니다.”
신경외과의의 대거리에 준후는 혀를 찼다.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빈정이 상한 준후가 치료를 무작정 반대한다고 신경외과의는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무림에서 준후의 별호는 ‘무결검’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데 결점이 없다는 뜻으로 바꿔 말하면 가슴과 감정으로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유리의 목숨이 달린 일인 만큼 현재 준후는 ‘무결검’의 상태였다.
얼음보다 차가운 상태였다.
“아까 본인이 교수님께 직접 노티했다고 했죠?”
“네. 맞아요.”
“노티할 때 GCS 스코어는 알려드렸나요?”
“그게…….”
“안 했겠죠. CT 찍기 전 환자는 의식이 멀쩡했으니까. 일단 거기서 첫 번째 오류가 있고요.”
준후가 속사포로 반격에 나섰다.
신경외과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준후에게 얻어맞기 바빴다.
공격과 수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CT를 보면 알겠지만 혈종 크기가 120cc가 넘습니다. 120cc가 넘는 혈종은 보존적 치료가 아니라 수술적 치료로 제거하는 게 원칙입니다.”
“…….”
“한 마디로 노티가 잘못돼서 교수님이 보존적 치료를 결정했다는 거죠. 어때요? 이래도 제가 그쪽 교수님을 무시한 것처럼 보입니까?”
“으…….”
“내 말이 틀린 것 같으면 교수님께 다시 연락해보세요. GCS 스코어랑 혈종 크기까지 노티해서. 그때에도 교수님이 보존적 치료가 좋다고 하시면 저도 순순히 보존적 치료에 동의하겠습니다.”
“그래요? 어디 두고 봅시다.”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는 듯.
신경외과의가 곧바로 가운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교수와 연결을 시도했다.
교수는 의외로 금방 전화를 받았다.
신경외과의의 두 번째 노티를 듣자마자.
교수는 쌍욕부터 박고 시작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노티 똑바로 안 할래? 애꿎은 환자 잡을 일 있어? 아니면 나 물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호랑이가 울부짖듯이, 교수가 호통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