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제53장 사제지간(1)
위이이잉.
위이이잉.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귀를 찌르는 자극적인 소리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네.”
-…….
“네. 많이 당황하시고 걱정되시겠지만 일단 병원으로 와주세요. 따님이 무사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준후는 유리의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으로 유리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잠금이 걸려 있지 않아 쉽게 보호자를 찾을 수 있었고, 유리의 어머니가 바로 통화를 받았기에 사정을 설명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보호자와 통화를 마친 후 준후는 유리의 휴대폰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초조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옆에서 달리는 다른 자동차들이 속속들이 앰뷸런스의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앰뷸런스는 그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준후는 유리가 근무하는 신경외과 의사를 설득해 뇌수술이 가능한 타 병원으로 유리를 이송 중이었다.
탑승한 앰뷸런스는 서울 우성 병원의 자체 앰뷸런스였다.
준후의 시선이 다시 유리를 향했다.
앰뷸런스 상단 철봉에 걸린 수액이 앰뷸런스의 움직임을 따라 거칠고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똑. 똑. 똑.
떨어지는 수액 방울이, 꼭 유리의 남은 생명을 표시하는 모래시계 같았다.
혼미(stupor)상태였던 유리는 반 혼수(semi-coma)상태로 악화되었다.
대화가 불가능했고 자발적인 움직임 또한 멎었다.
구급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준후는 유리의 이마에 손을 얹어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펼쳤다.
애써 혈종을 찢어놓았건만 그 자리를 새로운 혈종이 차지했다.
출혈이 멈추지 않은 탓에 새로운 혈종이 생긴 것이다.
만약 준후가 앞서 혈종을 없애놓지 않았다면 기존의 혈종이 200cc 크기로 커졌을 것이다.
뇌압이 치솟고.
치솟은 뇌압에 뇌가 두개골로 밀려났을 것이다.
‘한 번 더는…… 무리겠어.’
준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혈종을 제거하는 선풍공(仙風攻)은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쓸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자칫 준후가 내상을 입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준후는 모처럼 극심한 무기력감을 느꼈다.
무림에서부터 현대까지 준후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고문 같은 감정을.
그래서일까.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데도 사방이 어둡게만 보였다. 발목부터 천천히 끈적한 우울의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했다.
싫다.
정말 싫다.
이러려고 신경외과의가 된 게 아닌데.
적어도 내 앞에서 죽어가고 고통스러워하는 환자 앞에서만큼은 멋지고 떳떳하게 치료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잔잔한 파도와 같았던 무기력감이 거대한 해일로 변했다.
준후의 몸과 마음을 한바탕 휩쓸어 준후를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언젠가 아영이 해주었던 말이 등대처럼 환하게 준후의 마음에 떠올랐다.
-준후야, 난 네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게 많이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걸.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자책감과 죄책감은 버리기로 하자.
돌이켜보면 준후는 유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내공을 이용한 진료와 치료, 응급 수술을 위한 앰뷸런스 이송까지.
신이 아닌 준후가 현 상황에서 유리를 위해 더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할 수 없는 일로 고통받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거야.
평정을 되찾으면서 준후의 눈빛이 맑아졌다. 유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긴장과 공포도 서서히 물러갔다.
“기사님.”
“네. 선생님.”
“앞으로 제원대 병원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한 20분 정도 보시면 됩니다.”
당연히 더 빨리 도착하면 좋겠지만, 20분 정도면 골든 타임은 맞출 수 있을 듯했다.
“그나저나 별일이네요. 빅5 병원인 서울 우성 병원이 수술을 못 해서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보낸다니.”
기사도 현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혀를 찼다.
“그나저나 제원대 병원 가면 수술할 수 있는 겁니까? 우리 병원도 수술 못 하는데 그쪽도 못하는 거 아니에요?”
“수술 가능하답니다. 먼저 통화했어요.”
앰뷸런스 탑승 직전.
준후는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수술 가능 여부를 물었다.
‘그 사람’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100퍼센트 가능한 것이었다.
이윽고 앰뷸런스가 영동대교에 들어섰다.
진짜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6차선 도로가 서로 맞물린 테트리스 조각처럼 꽉 막혀 있었다.
빵! 빵! 빵!
사방에서 클락션이 울려댔다.
저 멀리서 하얀 연기가 불길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아…….”
“아…….”
준후와 기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탄식했다.
앞에서 교통사고가 터진 모양이었다. 도로 상황이 개판인 걸 보면 연쇄추돌로 보였다.
응급 후송 중 최악의 악재가 터진 것이다.
“에이! 내비게이션을 바꾸든가 해야지. 안내를 해도 꼭 이런 쪽으로 할 게 뭐야?”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내비게이션을 툭툭 쳤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불평과 불만.
유리에 대한 걱정.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쳐드는 무기력감 등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치솟는 것을 준후는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감정을 느끼되 거기에 흔들리지는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준후는 더 이상 무기력감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감에 노예로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을 때가 됐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답이 없네요. 내려서 환자 안고 가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절대 무리예요. 그건!”
준후의 돌발적인 발언에 기사가 언성을 높이며 반대했다.
“차야 10분 거리지만 환자를 안거나 업고 가면 최소 1시간 거리라고요.”
“…….”
“그럴 바엔 차라리 사고 현장이 수습되기를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아요?”
“지금 도로 상황 보이세요?”
“당연히 보이죠.”
“이 난장판을 수습하려면 1시간도 모자라지 않겠어요?”
준후가 냉정하게 말했다.
도로에 차가 적었으면 모를까, 현재 대교는 자동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인근에서 행사가 있었던 것이다.
준후의 짐작으로는 다리가 정상화되는데 2시간은 필요해 보였다.
“그거야 모르죠. 앞에 사고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고.”
“…….”
“무엇보다 이송을 한다고 해도 선생님 체력이 못 버틸 거예요. 체력이 떨어지면 속도는 더 떨어질 거고요.”
“…….”
“환자분을 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직접 이송하는 건……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기사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차 안에서 대기하는 것이 가장 옳다는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기사는 의견을 바꿀 의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기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준후는 평범한 외과의가 아니었다.
남들이 모르는 힘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 이뤄낼 수 없는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
“가끔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인간을 구하기도 하죠.”
“선생님! 진짜 안 된다니까요? 무모한 행동하지 마세요. 나중에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어요.”
기사는 준후를 협박하는 게 아니었다.
혹시나 준후가 열심히 노력하고도 안 좋은 일에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의견은 극과 극이었다.
회색지대가 없었다.
그러므로 앰뷸런스 문을 여는 것으로 준후는 대답을 대신했다.
휘이이잉.
쌀쌀한 겨울바람이 기다렸다는 얼굴을 때렸다.
준후는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유리의 몸을 감싸 주었다.
유리의 팔뚝과 연결된 수액팩을 입에 물었고, 마지막으로 유리를 두 팔로 안았다.
착!
유리를 양팔로 안은 준후가 도로 지면을 디디고 섰다. 차들이 움직이지 못했기에 안전하게 인도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한강은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며 생선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인간사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인도는 인적이 드물었다. 런닝을 하는 사람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구경하기 힘들었다.
지금부터 경공을 펼쳐야 할 준후에게는 호재였다.
준후는 가볍게 다리를 풀었다.
그러면서 단전에 응축되어 있던 내공을 다리로 끊임없이 흘려보냈다.
현대에서 처음으로, 준후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경공의 최고 속도를 내보기로 했다.
경공을 제대로만 펼친다면…….
10분 안에 제원대 병원까지 도착하는 일은 우스울 것이다.
내가 달리는 게 웬만한 차보다는 빠르겠는데?
그런 발칙한 생각을 예전부터 종종 해왔기 때문이다.
서씨세가의 최강의 경공.
무림의 10대 경공 중에 하나로 꼽히는 천광신보.
이것을 준비하면서 준후는 눈동자에도 내공을 담았다. 그러자 모겐족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때처럼 시야가 확 트였다.
50미터 떨어진 곳에 풍경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해졌다.
혹시나 모를 충돌 사고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파바바밧!
준후의 신형이 한줄기 탄환이 되어 인도를 가로 질렀다.
두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교차했다.
준후가 지나간 자리에 흐릿한 환영이 남았다.
쎄에에엑.
쎄에에엑.
거센 바람 소리마저 준후에게 추월을 당하는 듯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
그것은 준후가 기적과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준후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준후는 내공으로 몸을 감싸 맞바람의 저항을 흘려내고 있었다.
이것이 천광신보를 무림의 10대 경공의 반열에 올린 비법이었다.
그래서일까.
고작 눈을 몇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준후는 어느새 대교 끝자락까지 도달해 있었다.
* * *
같은 시각 영동대교.
두 명의 사내가 손을 비비며 꽉 막힌 도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교통 단속반 직원이었다.
인도에 과속 측정 장치를 설치한 후 과속으로 달리는 차가 있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하…… 진짜 겨울에 과속 단속은 못 할 짓이다.”
안경을 낀 선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오늘은 그래도 좀 낫지 않습니까? 사고가 터져서 최소한 차 바람은 안 맞으니까요.”
선표의 부사수이자 도로교통청에 최근 입사한 태용이 말했다.
말을 하는 태용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넌 쓸데없이 긍정적이더라? 우리는 짬 당해서 끌려 나온 거라고. 짜증도 안 나?”
“짜증을 내서 뭐합니까? 짜증을 내봐야 어차피 저만 손해인데.”
“정신 승리를 하시겠다? 난 정신 승리에는 관심 없다.”
“산다는 것의 본질은 본래 정신 승리를 하는 게 아닐까요? 세상을 못 이기겠으면 적어도 정신으로라도 승리해야죠.”
“1절만 해, 새꺄. 넌 성실하고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아.”
선표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모처럼 부사수 태용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교통청에서 태용의 별명은 수다맨이었다. 민원인마저 태용에게 질려서 먼저 통화를 끊을 정도니 말 다했다.
“전에는 같이 있으면 안 심심하다고 좋아하시더니. 그새 마음이 변하셨습니까?”
“그건 그냥 한…….”
선표는 말을 하다가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삐비비빅!
과속 단속 장치에서 과속 신호가 울린 것이다.
하지만 선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연쇄추돌 사고로 도로는 마비 상태였다. 정체된 도로에서 과연 누가 과속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선배. 스피드건에 130킬로미터 찍혔는데요?”
“엥? 130킬로미터? 그게 말이 되냐? 스피드건 고장 난 거 아니야?”
선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피드건이 달린 과속 장치를 조작했다.
황당하게도 장치가 고장 난 건 아니었다.
그럼 대체 왜……?
“카메라 영상 뒤져 봐.”
“넵!”
스냅 영상을 확인하자 한 사내가 한 여자를 끌어안고 달리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사내의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다.
“설마 이 사람이 130킬로미터로 뛴 건 아니겠지?”
“우사인 볼트가 시속 40킬로미터로 뛴다는데 130킬로미터는 절대 불가능이죠. 게다가 130킬로미터면 자동차급인데요?”
“그거야 나도 아는데…… 이 화면만 보면 남자가 130킬로미터로 달린 것 같잖아.”
“다리 근처에서 새가 활공할 때 같이 찍힌 거 아닐까요? 매는 순간적으로 시속 390킬로미터까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에 뭔 매인가 싶지만…… 그래도 그게 가능성이 제일 높긴 하네.”
선표는 볼을 긁적거리면서도 정지 영상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수없이 과속 단속을 나왔지만 오늘처럼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