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제53장 사제지간(2)
“하아…… 하아…… 하아…….”
벌어진 입에서 쉴새 없이 하얀 입김이 토해지고 있었다.
심장의 박동이 전신에 울렸다.
두 다리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영동대교의 끝에서, 준후는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피지컬이 무림 때와 같지 않았다.
무림이었다면 이렇게 짧은 시간 경공을 밟고 골골 대지 않았을 텐데…….
뭐, 어쩔 수 없지.
이젠 칼 밥을 먹고 사는 게 아니니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한편.
준후는 저 멀리 보이는 제원대 병원을 응시했다.
정오의 햇살을 반사하는 병원 건물이 등대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시각적인 착각이 아니었다.
준후는 뇌동정맥 기형으로 뇌출혈이 발생한 유리는 양팔로 안고 있었다.
유리의 회복.
나아가서 유리의 목숨이 제원대 병원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제원대 병원은 준후에게 등대였다.
‘젠장! 이래서는 곤란한데…….’
눈 앞에 펼쳐진 길로 시선을 좁히며 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입에 물고 있던 수액팩 모서리를 질끈 깨물었다.
주말 오전.
지역 축제가 있어서 그런지 인도와 거리가 사람들로 넘쳐났다.
영동대교를 건널 때처럼 쾌속으로 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비의 움직임을 본뜬 경공.
호접보로 사람들을 절묘하게 피해 달릴 수는 있겠지만 그게 최선으로 보이진 않았다.
“으으…….”
유리의 입에서 흐르는 한줄기 신음.
유리가 반 혼수상태에서 혼수상태로 접어드는 것 같았다.
무림 최고의 살막들이 뒤를 쫓는 것처럼, 준후는 마음이 급했다.
이젠 선택을 해야 했다.
무림 출신이고 자시고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난 사람을 살릴 거야.
급성 백혈병 환자를 기쁘게 해주고.
급성 백혈병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자신에게 직접 용감히 연락했던.
마음씨 착한 간호사를 살릴 거야.
지금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각오를 마치기 무섭게 다시 발이 움직였다.
파바바밧.
준후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차도 옆에 붙은 인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택가 쪽이었다.
그것이 병원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루트였기에.
쿵!
두 발로 땅을 단단하게 디디는 발경을 펼친 후.
준후는 반(反)자결을 운용해 점프를 뛰었다.
탄성 좋은 용수철을 밟은 것처럼 준후의 육신이 허공을 날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구식 빌라의 옥상까지 단번에 올라갔다.
조금이나마 하늘과 가까워지면서.
빽빽하게 늘어선 주택가의 풍경, 산만하게 주차된 자동차,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제원대 병원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하늘길.
그랬다.
준후가 목표로 한 길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인도가 아닌 건물 사이를 넘나드는 하늘길이었다.
건물 지붕을 넘나들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면 준후는 괴상한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연구소 같은 곳에 잡혀가 실험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깟 두려움보다 준후는 유리를 잃는 두려움이 더 컸다.
무공이라는 미지의 힘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두려워하는 삶.
위독한 환자를 살리는 삶.
둘 중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타다다닥!
준후가 내달렸다.
지붕의 펜스를 밟고 다시 한 마리의 새가 되어 건너편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쿵!
착지하는 순간, 충격을 줄이고 하체의 균형을 잡기 위해 발바닥에 내공을 담아 천근추를 펼쳤다.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같은 방식으로 준후는 몇 번이고 하늘을 달렸다.
3-4층의 건물을 건너뛰다가 10층짜리 빌딩까지 도약해서 올라간 적도 있었다.
현대의 사람들이라면 기적이라며 까무러칠 일이었지만 무림을 경험한 준후에게는 별 감흥 없는 일 중 하나였다.
건물들 옥상을 뛰어넘는 도중.
실제로 몇몇 사람들이 준후를 발견하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휴대폰으로 준후를 촬영하려고 시도도 했다.
“와! 파쿠르 진짜 잘한다! 너무 멋있어요!”
한 청년의 말은 준후에게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만약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어도 파쿠르라고 핑계를 댈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척!
제원대 병원과 가장 가까운 주택에서 준후는 지상으로 착륙했다.
근처를 지나고 있던 앳된 외모의 학생에게 물었다.
“저기 죄송한데. 지금 시간이 몇 시죠?”
“12시 30분이요.”
“감사합니다.”
경쾌한 경공으로 준후는 제원대 병원으로 달려나갔다.
차로 15분 걸렸을 거리를, 준후는 고작 7분 만에 주파했다.
차보다도 압도적으로 빠른 속력이었다.
* * *
이제 코앞에 제원대 병원 응급실이 있었다.
‘EMRGENCY’라는 빨간 간판이 오늘처럼 반갑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준후는 감격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늦췄다.
제원대 병원 응급실 앞은 주차장이었는데 구급차 한 대가 먼저 와 있었다.
환자 후송이 끝났는지 구급 대원들이 스트레쳐 카를 정리하고 있었다.
지이이잉.
응급실 출입문이 열리고 때마침 익숙한 얼굴.
준후가 가장 보고 싶었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재현.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
해외 신경외과의들마저 그 솜씨에 혀를 내두르고 참관을 아끼지 않는 신경외과의.
그리고 준후의 스승.
세월을 비껴간 재현은 여전히 20대 후반 같은 날렵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교수님!”
준후가 다급하게 재현을 불렀다.
그런 준후를 발견하고 재현이 준후에게 다가왔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모양이구나. 왠지 이쯤이면 도착할 것 같아서 내려와 봤는데.”
“교수님과 저는 천생연분인 것 같습니다.”
“녀석. 오랜만에 만나서 처음 하는 소리가 닭살 돋는 소리라니…… 전화로 노티했던 환자가 이 환자니?”
“네!”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우성 병원에서 앰뷸런스를 타기 직전.
준후가 휴대폰으로 SOS를 보낸 사람이 바로 재현이었다.
재현이라면 유리를 살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던 것이다.
과연 스승을 만난 것만으로도 준후는 그동안 겪었던 긴장과 괴로움을 눈 녹듯이 사르르 녹여낼 수 있었다.
과거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준후는 무림맹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혈교의 함정에 빠져 혈강시들에게 둘러싸인 적이 있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때 무림맹주가 어디선가 나타나 준후를 구원해 주었는데, 그 당시의 감격이 되살아난 느낌이 들었다.
무림맹주는 압도적인 정파에서 두 2명뿐인 현경의 고수였고, 재현은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였으니까 말이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준후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급실로 들어가자꾸나.”
“네. 교수님.”
준후는 응급실로 들어가 유리를 침상에 눕혔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뇌출혈로 인한 반 혼수상태 때문인지 유리의 안색이 창백했다.
핏기가 돌지 않아 밀랍인형 같았다.
딸칵!
재현이 펜 라이트를 켜고 유리의 눈동자를 살폈다.
동공 반사를 확인하는 재현의 모습이 침착하고 매서웠다.
“동공의 가장자리가 불규칙하고 빛 반응이 거의 없구나. 좌측보다 우측 동공이 큰 걸 보니까 중대 뇌동맥, 그것도 우측 뇌동맥에 문제가 있어.”
CT 촬영을 하지 않았음에도.
단순히 동공 반사만으로도 재현은 유리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재현의 신들린 진찰에 준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최소한 브레인 CT는 찍어보고 수술에 들어가는 게 좋겠어. 뇌동정맥의 기형 여부와 출혈량에 따라서 수술 방침이 달라질 테니까.”
“…….”
“준후야.”
“네. 교수님.”
“일단 환자 접수부터 하고 오거라.”
“알겠습니다.”
준후는 군말 없이 응급실 접수대로 이동했다.
미리 챙겨 두었던 유리의 지갑 속에 주민등록증을 꺼내 접수를 했다.
응급실로 돌아오자.
유리와 유리가 누워 있던 침상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CT 검사실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앰뷸런스를 타고 왔는데 땀이 흠뻑이구나.”
뒤늦게 준후의 상태를 알아보고 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니?”
“중간에 차가 막혀서 달려왔습니다.”
“하긴 주말인 데다가 지역 축제가 있어서 차가 많이 막혔을 거야. 힘들었을 텐데 고생이 많았다.”
“아. 네.”
준후는 머쓱하게 웃었다.
재현은 영동대교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차로 이동했을 때보다 병원에 더 빨리 도착한 이유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됐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빅5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자기 병원에서 수술을 못 받고. 다른 병원으로 이송을 가야 한다니…….”
“…….”
“세상에 이런 넌센스가 또 있을까?”
재현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재현의 말에 준후도 동의했다.
이번 유리 사건은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과 계통의 열약함과 취약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빅5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못 받는다면 환자는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저도 이제야 좀 이해할 것 같습니다.”
“뭐를?”
“교수님이 하루라도 빨리 은퇴해서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고 싶다고 하셨던 포부를요.”
“그래. 분명 가시밭길이겠지만 하지만 포기할 순 없단다. 비극은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재현이 빠드득 이를 깨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 의미에서 준후 너도 각오 단단히 하렴.”
“저는 왜…….”
“내 자리를 네가 물려받아야 하니까.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 곧 의사라는 본분을 누군가는 지켜야 한단다.”
“…….”
“그리고 내 생각에 그 적임자는 바로 너야.”
“제가 감히 교수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 아니, 꼭 해내야만 한단다. 그게 너와 나의 사명이니까.”
스승의 말에서 준후는 묵직한 울림을 받았다.
음절과 단어 하나하나 사이에서 스승의 진심이 묻어났기에.
그래.
혼자라면 불가능할지 몰라도 스승님과 함께라면 해낼 수 있을지 몰라.
어느새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환자의 CT 결과가 나왔다.
준후가 경공을 밟아가며 응급실에 도착했음에도 유리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당장 수술이 필요했다.
우측 중대뇌동맥에 120CC 크기의 혈종이 뭉쳐 있었고,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인 뇌동정맥 기형의 상태도 처참했다.
혈관이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때마침 준후가 앰뷸런스에서 연락했던 유리의 어머니도 응급실에 도착했다.
“선생님. 제발 우리 유리 좀 살려주세요. 어렸을 때부터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착하게만 살았던 아이입니다. 이대로 허망하게 죽을 순 없어요.”
보호자가 흐느껴 울며 애원했다.
준후도 괜히 울컥했다.
소중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을 때.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기어이 죽었을 때 얻은 상처들이 망령처럼 되살아났던 것이다.
물론 재현이 집도를 맡은 이상 그런 비극은 절대 벌어지지 않겠지만.
“어머니. 따님은 반드시 무사히 회복될 겁니다. 저를 믿으세요.”
재현이 따스한 눈빛으로 보호자와 눈을 마주쳤다.
보호자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출력해두었던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받았다.
“준후야 따라오렴.”
“네. 교수님.”
준후는 재현을 따라 수술실로 이동했다.
모처럼 병원에 왔으니 수술을 참관시켜주려고 하는 건가 싶었건만…….
상상도 못 한 제안이 들어왔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네가 수술을 좀 도와줘야겠다.”
“제가요?”
“우성 병원은 집도의가 없었지만 우리 제원대 병원은 쓸 만한 어시스트가 없단다.”
“…….”
“뇌동정맥 기형은 어려운 수술이라 아무나 보조하게 둘 수 없거든.”
“…….”
“3-4년 차가 지금 다 실습하고 정규 스케줄 어시스트 중이란 말이지.”
재현의 말에 준후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니까 상황이 처참한 것은 제원대 병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교수님 수술을 도울 수 있다면 저야 영광이죠. 하지만 타 병원 출신인 제가 멋대로 제원대 병원 수술에 들어가도 됩니까?”
준후의 질문에 재현은 빙긋 웃었다.
“당연히 안 되지. 원칙적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