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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78화 (277/424)

278화

제53장 사제지간(3)

덜컹!

서울 제원대학교 병원 수술실의 문이 열렸다.

병원은 달랐지만 수술실의 풍경은 비슷했다.

출입구 옆에 간호사들이 근무 중인 스테이션이 있었고 수많은 수술방이 꽃잎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수술방을 로젯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수술실 가장 좌측에는 물품실이 있었으며.

가장 우측에는 스태프들의 환복에 필요한 갱의실이 있었다.

인테리어와 구조만 조금 다를 뿐 제원대 병원 수술실은 신원대 병원 수술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쿵. 쿵. 쿵.

풍경이 익숙함에도 준후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굵직한 마른침이 목젖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긴장감으로 양손이 차갑고 축축했다.

준후는 졸지에 도둑이 된 기분이었다.

명백하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으니까.

“과장님! 3번 로젯에 환자 들어가 있습니다. 선혜 선생이 수술 도구 준비 중이에요.”

스테이션에서 근무 중이던 간호사가 재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재현 곁에 있는 준후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곁에 있는 분은 누구죠? 못 보던 얼굴인데.”

“우리 과 레지던트하고 인턴이 없어서 타과 인턴을 호출했어요.”

재현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스케줄표 보니까 뇌동정맥 기형 수술이던데. 인턴이면 아무래도 어시스트가…….”

“에이스로 잘 뽑았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래도…….”

간호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준후를 바라보았다. 뭔가 의심 가는 게 있다는 듯.

여기서 정체를 들킬 순 없었기에 준후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준후가 오히려 선수를 쳤다.

“아뇨.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 진짜 잘 생겼기셨네요. 의사가 아니라 배우 같아서요.”

“별말씀을. 선생님도 미인이십니다.”

“근데 선생님 정도 외모면…… 선생님이 수술방에 왔을 때 인상이 남았을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안 나네요. 이상해서요.”

“제가 인턴 근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싱거운 질문이라는 듯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과에서 수련하다가 최근에 성형외과에 수련 시작했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자주 볼 수 있겠네요?”

간호사가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도 그렇겠죠?”

“왜 아마도예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중간에 수련을 그만둘 수도 있는 거고.”

나중에 얼굴이 안 보여도 이상하지 않도록.

준후는 미리 떡밥을 던져 놓았다.

단순히 무공에 가려졌지만, 준후의 지략과 책략은 수준급이었다.

이전 삶에서는 무림맹의 총관 제갈태선이 준후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할 정도였다.

“시간이 부족하니 슬슬 들어가지.”

“네. 교수님.”

재현으로 인해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은 합동수술의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갱의실로 이동했다.

준후는 옷을 갈아입는 재현이 빤히 쳐다보았다.

“긴장하고 당황할 법한데 즉석에서 말을 잘 지어내더구나. 조금 감탄했는걸?”

재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재현은 준후가 단순히 착하고 환자와 의술에 열정적인 의사인 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제지간이라고 해도 정작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댄 채 보낸 시간은 거의 없었다.

일상을 함께 보낸 시간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서로를 잘 몰랐다.

하지만 조금 전 에피소드로 재현은 준후를 달리 보게 되었다.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보니 준후는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났고, 눈치가 있고, 적당히 뻔뻔할 줄도 알았다.

외과의로서는 드물게.

육각형 스탯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술 못지않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순발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수술을 예로 들자면…….”

준후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른 스태프들과 의사소통을 잘해야 처치나 술기가 일사불란하게 진행될 테고요. 순발력이 있어야 응급 상황에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어서입니다.”

“대답 한 번 야무지구나. 평소에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야.”

준후의 대답이 흡족하다는 듯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준비 다 됐습니다.”

준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수술복 착용이 끝났다.

신원대 병원 수술복은 초록색인데 제원대 병원 수술복은 파란색이었다.

그래서일까.

파란 수술복을 입으니 진짜 제원대 병원 스태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세면대로 이동해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시작했다.

벅. 벅. 벅.

억세고 거친 솔이 손가락과 손목, 팔뚝을 긁어댔다.

솔과 피부가 마찰하면서 주홍빛 거품이 일어났다. 솔에 묻은 소독액 때문에 생기는 거품이었다.

스승과 함께하는 첫 수술.

타 병원에서 하는 첫 수술.

긴장되거나 불안하다기보다, 준후는 오히려 설렜다.

상대의 무공이 고강할수록 무인의 피는 더욱 뜨겁게 끓는 법이고.

수술이 위급하고 어려울수록 외과의의 피는 더욱 뜨겁게 끊는 법이었다.

준후는 천생 외과의였다.

생과 사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위기 속에 발버둥 치다가 발견하는 뜻밖의 재능과 잠재력.

사람을 향한 존귀한 사명감 등등.

그 모든 것을 준후는 사랑했다.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부디 지켜봐 주세요.

스크럽을 끝내고 앞서가는 재현을 뒤따르며, 준후는 각오를 다졌다.

* * *

지이이잉.

3번 수술방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쎄에에엑.

천장에서 새하얀 에어샤워 연기가 폭포로 쏟아져 내렸다.

2차 소독까지 마친 후에야.

준후는 수술방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알싸한 알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술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수술대에 누운 환자에게 환자감시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기계음이 박자를 맞춰 규칙적으로 울려왔다.

체온은 37도.

혈압은 100mmHg/70mmHg로 다소 낮았고.

반대로 맥박은 분당 150회로 높았다.

출혈이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바이탈 사인이었다.

수술대 양옆으로는 수술 도구와 용품이 수북하게 쌓인 드레싱 카트가 주차되어 있었고.

전신 마취를 한 지 3분이 되었다는 타이머도 작동 중이었다.

준후는 자연스럽게 제1어시스트 자리.

그러니까 재현의 맞은편에 섰다.

몇 년은 더 지나야 재현과 함께 수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기회는 의의로 빨리 찾아왔다.

본격적인 수술에 앞서 준후는 유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유리가 이 지경이 됐다는 사실에 슬펐고.

신경외과의 비참한 현실에 한 번 더 서글펐다.

수술대에 누운 유리.

정확히 말하면 유리를 수술하는 이 상황은 타인의 육체를 개조하고 이어 붙인 프랑켄슈타인과 다름없었다.

‘서울 우성 병원’ 간호사가.

‘제원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는데.

그 수술을 ‘신원대’ 병원 어시스트가 돕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이런 끔찍한 혼종과 촌극이 또 있을까.

더욱 참담한 것은…….

유리조차 사실은 운이 무척 좋은 편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유리가 준후에게 발견되고 준후가 인맥과 무공을 총동원하며 발악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유리의 생과 회복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드르르륵.

물품실 쪽에서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소독 간호사가 한 대의 드레싱 카트를 더 끌고 수술대로 다가왔다.

“준후야, 인사하렴. 이쪽은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신서현 간호사란다.”

“인사를 어떻게…….”

준후가 말끝을 흐렸다.

신분을 속이고 어시스트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성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던 것이다.

“신원대학교 서준후 선생님 맞죠?”

“……그걸 어떻게 아세요?”

“과장님이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거든요. 처음엔 아들인 줄 알았다니까요?”

“신 선생. 난 아직 미혼인데 벌써 아들 운운해도 되는 거야?”

“그럼 평소에 말씀을 아끼시던가요.”

서현이 새침하게 대답하고 준후를 응시했다.

“과장님하고 저는 비밀이 없어요. 그래서 서 선생님이 어시스트를 한다는 사실도 미리 알고 있었죠.”

“아. 그랬군요. 그럼 마음이 놓이네요. 신원대 병원 레지던트 2년 차 서준후라고 합니다.”

“수술방에서 6년간 뇌수술 파트만 어시스트 하는 신서현이에요.”

통성명은 짧게 끝났다.

그리고 서현은 준후 곁에 자리를 잡았다.

“신 선생님. 교수님 옆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여간 과장님도…… 아직 이야기 안 하셨어요?”

“이제 하려고 했지. 뇌동정맥 기형 수술은 내가 하겠지만 혈종 제거술은…… 준후, 네게 맡기마.”

재현이 선언하듯 말했다.

* * *

사각. 사각. 사각.

기분 좋은 소리가 수술방에 번져나가고 있었다.

면도칼을 손에 든 준후가 환자의 우측 측두부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중이었다.

준후의 손목이 현란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거침없이 면도칼이 움직였다.

툭. 툭. 툭.

바닥에 깔린 하얀 수술보에 까만 머리카락이 춤추듯 흩날리며 떨어졌다.

절단면은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깔끔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부위가 파르스름했다.

이는 수술 전후 머리카락으로 인한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작업으로 삭두라고 불렸다.

재현이 1차 수술을 맡기겠다고 했을 때.

준후는 퍽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환자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삭두는 신경외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처치였는데.

준후의 삭두 솜씨만으로도 재현은 준후의 수준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준후는 손에 떨림이 없었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으며 두피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손길이 섬세했다.

이 정도면 당장 웬만한 뇌종양 수술을 집도해도 될 수준인데…….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내 밑에 있었으면 더 좋은 기회를 줬을 텐데.

신원대에서 준후를 어떻게 취급할지 알았기에.

재현은 준후의 처치가 더욱 아쉬웠다.

“교수님.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상념을 마치고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이 떨어진 수술포를 치우면서 본격적인 수술의 막이 올랐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머리카락이 잘린 측두부를 빨간약으로 소독하고 그 위에 방포가 덮였다.

“10번 블레이드요.”

서현이 스칼펠에 칼대를 꽂아 준후에게 건넸다.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재현은 마치 KTX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엄청난 속도감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빙그르르.

준후의 손목이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그 움직임을 따라 환자의 머리에 지름 3센티미터 크기의 동그란 절개창이 만들어졌다.

컴퍼스를 대고 그린 듯 절개창이 완벽한 원의 형태를 띠었다.

두피 절개에 뒤를 잇는 두개골 절개 또한 환상이었다.

준후는 숙련된 기술공처럼 환자의 두개골에 4개의 구멍을 뚫었다.

위이이잉.

드릴의 굉음이 요란했다.

귀가 먹먹했다.

드릴로 인해 두개골에 구멍이 생기고 구멍 주변에 하얀 뼛가루가 수북이 쌓였다.

재현이 썩션으로 뼛가루를 빨아들이려고 했지만.

준후의 처치가 한 박자 빨랐다.

양손의 대가답다고 해야 할까.

준후는 드릴을 쥔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셀프 썩션까지 끝냈다.

뼛가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는 절삭기를 이용해 두개골에 생긴 4개의 구멍을 정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연결했다.

큐렛으로 두개골을 들어내자.

뇌막의 최전선.

달걀흰자의 막처럼 불투명한 경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후가 견인기로 절개창을 좌우로 당겼다.

수술 시야가 단번에 확보되었다.

준후의 거침없는 집도에 재현은 크게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무언가 당혹스러움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 복잡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

재현은 문득 서현과 눈이 마주쳤다.

서현이 오른손 검지로 준후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억지를 척 치켜세워 올렸다.

준후가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이어지는 수술.

경막과 지주막, 연막이 삽시간에 절개되고.

거대한 호두처럼 생긴 말랑말랑하고 주름이 가득한 뇌가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와중에도 준후는 잊지 않고 환자의 뇌압을 측정했다.

센서가 포함된 탐침을 환자의 Kocher’s point에 찔러 넣었다.

환자의 뇌압은 25mmHg였다.

정상 뇌압이 5mmHg-15mmHg라임을 감안하면 꽤 높은 수치지만.

뇌동정맥 기형이라는 원발 질환.

출혈 부위와 이송 시간 등등을 고려하면 반대로 꽤 준수한 뇌압이었다.

“곧바로 혈종 제거술 진행하겠습니다.”

준후의 목소리가 당찼다.

준후는 뇌실질에 접근해서 썩션기로 혈종을 싹 빨아당겼다.

그런데 혈종이 사라진 자리에 실처럼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출혈이 아직 멎지 않은 것이다.

“신 선생님. 2X2 거즈에 트롬빈(지혈제) 묻혀주실래요?”

“아. 네.”

서현이 지혈제를 적신 거즈를 준후에게 건넸다.

준후가 포셉으로 거즈를 잡아 출혈이 발생한 중대뇌동맥 혈관에 살포시 얹었다.

그렇게 3분쯤 지나고 거즈를 제거하자 출혈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한편 준후의 혈종제거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한 재현은…….

그제야 자신이 느끼고 있던 복합한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놀랍게도!

준후가 자신의 수술 스타일을 완벽하게 복제했던 것이다.

준후가 재현의 논문으로 공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똑같이 따라 할 줄이야…….

재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착각인지 몰라도.

한순간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준후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 당돌한 녀석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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