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제53장 사제지간(4)
“준후야.”
재현이 그윽한 목소리로 준후를 불렀다.
“네. 교수님.”
“혈종 제거술. 아주 훌륭했다. 네가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기대 이상이었어.”
“아닙니다. 교수님에 비하면…….”
재현의 칭찬에 준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혈종 제거술은 신경외과 수술 중에서 난이도가 보통 수준이었다.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고.
이 정도에 극찬을 받을 수도 없었다.
“넌 종종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구나.”
“제가 말입니까?”
“그래. 넌 아직 2년 차에 불과해. 그런데 벌써 나나 다른 교수들과 너 스스로를 비교한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
“기준이 높은 건 좋은 일이지만 그 기준에 짓눌리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
재현은 준후의 심리를 꿰뚫어 보았다. 마치 무림맹의 맹주 천태룡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야말로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룬 일인자가 가질 수 있는 품격처럼 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준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고, 잠자코 있던 서현도 준후를 치켜세웠다.
“과장님이 서 선생님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줄 알겠네요. 저는 눈을 의심했어요.”
서현의 목소리가 들떴다.
“서 선생님 수술하는 모습이 과장님을 꼭 닮았더라고요. 과장이 하는 시그니처 절개법과 지혈법을 따라 하는 것도 그렇고.”
“근데 신 선생님도 보통내기가 아니시던데요?”
화제를 돌리는 준후의 눈매가 초승달로 휘어졌다.
“오잉? 갑자기 제 칭찬을?”
“수술 과정을 완전히 꿰찬 게 느껴졌어요. 수술 도구를 착착 건네는 걸 보면.”
재현이 서현을 신뢰하는 이유를 준후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까지 만나 본 소독 간호사 중에서 가장 센스 좋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준후는 주저 없이 서현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텔레파시로 마음을 읽은 것처럼 수술 도구를 먼저 건네고.
상황에 따라서 썩션이나 이리게이션(세척) 같은 처치를 거드는 등등.
서현의 어시스트는 다른 소독 간호사와 달리 능동적이고 생기가 넘쳤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처음으로 같이 수술하는 스태프에 대한 욕심을 가져 보았다.
서현 같은 소독 간호사가 탐났다.
무림의 전투는 혼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령 여럿이 작전을 수행하더라도 전투 단계에서는 일대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외과 수술은 달랐다.
집도의, 어시스트 의사, 간호사, 마취의.
최소 4명이 팀을 이뤄야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자신의 실력을 상승시키는 것만큼 주변에 실력 있는 스태프들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서현을 만나면서 준후의 머리가 새로운 방향으로 트이기 시작했다.
“자, 잡담은 여기까지. 수술부터 마무리 지어야지.”
“네. 교수님.”
“네. 교수님.”
재현이 주위를 환기시켰다.
준후 곁에 있던 서현이 재현 곁으로 돌아갔고 준후는 수술 부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중대뇌동맥에 우측 뇌혈관들이 나뭇가지처럼 산만하게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동맥이 있었다.
해당 동맥은 다른 동맥들과 달리 실타래가 엉킨 모양으로 둥글게 뭉쳐 있었다.
저 혈관이 바로 문제의…….
‘뇌동정맥 기형’이었다.
눈금자처럼 정확한 준후의 눈대중으로 봤을 때.
해당 기형 동맥의 크기는 6.5cm.
뇌동정맥 기형 중에서도 대형 사이즈에 속하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한 마디로 적수를 만난 것이다.
쿵. 쿵. 쿵.
기형 동맥이 박동할 때마다 주변 혈관이 같이 요동쳤다.
아니, 움찔거렸다.
그래서일까.
마치 기형 동맥이 불량배처럼 주변 혈관을 겁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맥 → 모세혈관 → 정맥.
보통 혈류는 이런 3단계에 걸쳐 이동하는데.
뇌의 선천적인 문제가 발생하면서 모세혈관이 생기지 않고 동맥이 모세혈관의 자리를 차지하면, 지금과 같은 구조가 형성된다.
즉, 해당 동맥만 기형적으로 커지는 것이다.
모세혈관을 거치치 않고 부풀어 오른 동맥에서 바로 정맥으로 혈류가 유입되면 압력 차이로 뇌출혈이 발생한다.
유리가 해당 케이스였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준후는 재현을 힐끔거렸다.
마침 재현이 서현과 대화를 나누며 필요한 수술 도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수님.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혈종 제거술을 했으면 수술 부위를 닫는 게 맞지 않습니까? 교수님이 제게 보내주신 논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
“뇌동정맥 기형 수술은 위험부담이 크니 감마 나이프 수술이 더 효과적이라는 설명과 함께요.”
준후는 참고 참았던 질문을 기어이 던졌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위화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예전에는 그랬고 지금은 아니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기형 동맥이 6cm 이상이면 수술로 제거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얼마 전에 말이야.”
“…….”
“그리고 이 환자는 혈종 제거 때문에 벌써 머리를 연 상태지. 여기에 감마 나이프 수술을 추가하는 건 오히려 번거로워.”
재현의 설명은 깔끔했다.
역시 스승님다운 화법이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수술 난이도가 너무 올라가지 않을까요? 수술 후 뇌혈류 개통도 걱정되고요. 애초에 교수님도 수술이 위험해서 감마 나이프를 추천하셨던 건데…….”
“준후야.”
“네. 교수님.”
“넌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어. 실력이 성장하고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란다.”
재현의 눈이 빙긋 웃었다.
“지금부터 보여주마. 내가 얼마나 레벨업 했는지.”
* * *
지이이잉.
3번 수술방 문이 열렸다.
문 상단에 수술 중이라고 적혀 있던 빨간 글씨가 팍 꺼졌다.
수술방을 가장 먼저 나온 재현이 수술 가운, 수술 모자, 장갑 등을 허물 벗듯 벗었다.
의료 폐기물 수거함이 언덕처럼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준후도 재현을 뒤따라 나와 수술 복장을 탈의했다.
감탄의 눈빛으로 스승을 우러러보면서.
재현이 왜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라고 칭송을 받는지.
준후는 모처럼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재현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괴물이었다.
과거 본인이 꺼려하던 수술을 이제는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둘 다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수술이 순조로웠습니다.”
“고생이야 과장님하고 서 선생님이 다했죠.”
“저도 과장님을 살짝 거든 것밖에 없습니다.”
“겸손하기는…….”
재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수술 스케줄이 있었기에 서현은 수술방실 남고 준후는 재현과 수술실을 나왔다.
유리의 회복을 기대하던 보호자에게 재현이 수술이 잘 끝났다고, 천천히 회복만 기다리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수술 들어가기 전에 울었던 보호자는 수술이 끝나고 난 후에도 펑펑 울었다.
하지만 두 눈물은 의미가 달랐다.
보호자처럼 준후도 수술 전후로 마음이 2번 울컥했는데 그 2번의 울컥임도 각각 의미가 달랐다.
“식사는 했니?”
“네.”
준후는 거짓말을 했다.
점심을 안 먹었지만 먹었다고 했다.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이상하게 허기를 배가 아닌 머리로 느끼고 있었다.
“그럼 과장실에서 간단하게 커피라도 한잔하자꾸나.”
재현을 따라 도착한 신경외과 과장실은 평소 재현의 성격을 반영하듯 단출했다.
신원대 병원 과장실이 각종 미술품이나 골프채, 고급 가구를 과시하듯 진열했다면.
재현의 과장실에는 벽에 전공 서적이 꽂힌 책장이 늘어섰다.
업무용 책상 앞에 손님을 맞을 수 있는 소파 3개와 아담한 티 테이블만 놓여 있었다.
준후는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리는 재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예술과도 같았던, 방금 끝난, 뇌동정맥 기형 제거 수술을 머릿속으로 복기해 보았다.
“환자 복와위(엎드려 누운 자세)로 돌리고. 수술방 온도를 20도로 낮추자꾸나. Co2 농도도 지금보다 1.5배로 높이고.”
본격적인 수술에 앞서 재현이 내린 오더였다.
오더의 의미는 간단했다.
환자를 저혈압 상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기형 동맥을 제거하는 동안 생길 출혈을 미리 최대한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준후는 일사천리로 오더를 수행했다.
그동안 재현은 헤모 스탯(혈관 겸자)으로 기형 동맥의 위아래를 잠갔다.
딸칵! 딸칵!
동맥으로 유입되는 혈류가 일시적으로 차단되었다.
“11번 블레이드.”
10번 블레이드보다 정교한, 성형외과에서 즐겨 쓰는 뾰족한 블레이드가 재현의 손에 들렸다.
무영등 빛에 메스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재현의 손속은 망설임이 없었다.
메스로 기형 동맥의 최상단 부분을 거침없이 베어냈다.
단 한 번 손목을 움직여서.
툭.
동맥이 실처럼 끊어졌다.
끊어진 자리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중대 뇌동맥에 빨간 홍수가 터졌다.
피가 범람하고 있었다.
준후는 기다렸다는 듯 혈액을 썩션기로 빨아들였다.
과연 스승다운 섬세한 손놀림!
기형 동맥을 절제하면서 주변에 있던 미세 혈관과 신경은 손톱만큼도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과정만 놓고 보면 스승의 수술은 다른 뇌동정맥 기형 수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스승이 대체 무슨 비법을 터득했는지.
재현이 기세를 몰고 갔다.
기형 동맥의 하단부터 똑같이 잘라냈다.
두 번째 피의 홍수가 발생했다.
다만 사전에 출혈 대비를 잘해 놓은 덕분에 뇌압은 정상 수치를 유지했다.
바이탈도 마찬가지였다.
저혈압 상태가 정상 혈압 상태가 되었고 거칠게 뛰던 맥박도 정상 맥박으로 돌아왔다.
재현의 마법은 그다음에 펼쳐졌다.
본디 기형 동맥을 제거하면 수술이 끝나는데 재현만의 독특한 후속 조치가 있었던 것이다.
재현은 기형 동맥 주변에 있던 정상 모세혈관까지 다듬었다.
“이번 수술의 핵심은 기형 동맥과 근접한 모세혈관을 미리 정리해 주는 거란다.”
“…….”
“안 그러면 남은 모세혈관이 기형 동맥처럼 포식 동맥이 될 수 있지. 그뿐만이 아니야.”
“…….”
“나중에 혈류를 개통했을 때 기형 동맥에 근접한 동맥들이 출혈을 일으킬 확률도 있거든.”
준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재현이 설명했다.
그리고 기형 동맥 인근의 모세혈관을 절제하거나 소작기로 지져 버렸다.
치이이익.
소작기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직이 타는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거렸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재현은 얼마나 고생했을까.
준후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환자에게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경과를 확인하며 마음을 졸이고.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평판에 금이 가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등.
재현은 이미 최고였지만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눈물겹고 고독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
재현이 자신의 스승이라는 사실이 준후는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30분이 지난 후.
재현의 신(新) 뇌동정맥 기형 수술도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딸칵!
딸칵!
뇌혈류를 차단하고 있던 혈관 겸자가 풀렸다.
동맥 혈관 초입부가 울컥하며 피를 쏟아냈다. 혈류가 개통되면서 혈관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준후는 잔뜩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정맥 혈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술이 잘 끝났다면 정맥 혈관이 파란빛을 띠어야 했다.
왜냐하면…….
동맥 → 모세혈관 → 정맥.
위와 같은 혈류의 흐름에 따라 동맥이 모세혈관에 산소를 공급하면 파란색을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
잠시 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탄식.
그것은 기쁨의 탄식이었다.
정맥 혈관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재현은 다시 한번 압도적인 실력을 준후 앞에서 증명했고.
또 유리를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준후는 마치 오늘이 생일인 것 같이 벅찬 느낌을 받았다.
탁!
재현이 커피잔을 준후 앞에 내려놓으면서 준후의 상념이 깨졌다.
재현이 준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준후야.”
“네. 교수님.”
“방금 끝난 신(新) 뇌동정맥 기형 수술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해 보렴. 너라면 뭔가 깨달은 바가 있겠지?”
재현이 준후의 대답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