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제53장 사제지간(5)
“방금 끝난 신(新) 뇌동정맥 기형 수술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해 보렴. 너라면 뭔가 깨달은 바가 있겠지?”
재현이 준후의 대답을 요구했다.
그리고 준후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는 이미 할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는 사실…… 수술보다 교수님의 마음가짐에서 압도적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마음가짐?”
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후의 대답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몸짓이었다.
신 수술을 보았다면 응당 수술의 기술적인 면모를 언급할 줄 알았거늘…….
“구체적으로 말해보렴.”
“교수님은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로 인정받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본인의 발전에 힘쓰시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나이가 있는 교수님 중에서는 아직도 내시경 수술 같은 비침습적인 수술을 꺼려하거나 회피하시는 분도 있는데…….”
“…….”
“교수님은 항상 환자를 위해서 더 나은 치료법을 고민하시고 계시는 것 같아 존경스럽습니다.”
“허허.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질문했던 게 아닌데.”
깜빡이를 켜지 않고 들어오는 제자의 칭찬에, 재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는 그저 느낀 대로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그래. 네가 내게 배울 게 있다고 하니 어쨌든 고맙구나.”
재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준후를 바라보았다.
준후의 눈빛이 진지했고 목소리는 묵직했다.
준후가 조금 전 했던 대답은 단순히 재현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를 알았기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는 진심 어린 존중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까.
“교수님. 저 수술에 대해 몇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신 수술의 적응증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이어지는 재현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1) 뇌동정맥 기형이 6cm 이상일 때.
2) 기형 혈관이 뇌 심부에 있을 때.
3) 정맥 유출이 심할 때.
이 3가지 조건이 맞아야만 신 수술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준후는 재현의 설명을 뼛속에 새겼다.
수술 과정은 초식으로 만들어서 미리 암기해 두었고 수술 조건도 기억했기에.
이제 신 수술은 준후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타인의 무공을 훔치듯 다른 외과의의 무공을 훔치는 것은 준후의 특기 중 하나였다.
이렇게 모방하다 보면 준후도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건 멋진 신(新) 수술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
준후는 벌써 그날이 기대됐다.
그날을 상상하면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준후, 네 어시스트도 무척 훌륭했어. 이제 펠로우도 찜 쪄 먹을 수준이더구나.”
재현이 화제를 준후로 돌렸다.
“저야 아직 갈 길이 멀었죠.”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다른 레지던트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지 않겠니?”
“…….”
“오늘뿐만 아니라 네 활약상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단다.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났을 때, 루뻬만 착용한 채 수술하고.”
“…….”
“수부외과 접합수술까지 도왔다며?”
“아…… 네.”
대답하는 준후가 고개를 숙였다.
전부 본인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였지만 스승의 입을 통해 들으니 어쩐지 쑥스럽고 민망했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너무 겸손한 것도 보기 안 좋을 수 있어.”
“…….”
“적어도 친한 사람들과는 네 업적을 나눌 필요가 있단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
“네가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어서 기쁘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재현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은퇴 시기를 조금 앞당겨도 되겠어.”
‘은퇴’라는 단어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준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눈을 치켜뜨고 긴장의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재현은 농담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의술과 의료행위에 관해서는 고지식의 끝판왕이었다.
스치듯 하는 말이라도.
그 무게감이 여타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이니? 내가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시기를 앞당기신다는 이야기는 방금 처음 들었습니다.”
준후는 선뜻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강제로 열었다.
“은퇴를 단축하신다면 혹시 그 기간이 얼마나…….”
“한 6년 후면 되지 않을까?”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교수님은 전성기이실 텐데. 더 오래오래 일해주세요!”
준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준후를 위해서라도.
재현이 좀 더 신경외과에 남아 봉사해 줬으면 하는 게 준후의 욕심이었다.
큰 별이 지고 찾아올 어둠이 준후는 두려웠다.
“65세까지 수술을 하는 교수님들도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은 더 오래 하실 수도 있습니다.”
“준후야.”
재현이 나지막이 준후를 불렀다.
“네. 교수님.”
“네가 오늘 이송한 환자를 생각해 보렴.”
“고유리 간호사 말씀이십니까? 그 건은 갑자기 왜…….”
“빅5병원 간호사가 자기 병원에서 수술을 못 받고 다른 빅5병원으로 이송됐단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너도 잘 알지?”
준후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쓰라린 현실에 가슴도 쓰라렸다.
준후가 가장 싫어하는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상황은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유리는 교통사고로 병원 응급실을 전전하다가 세상을 떠난, 의대 동기생 성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준후 너나 내가 아무리 애써도 사람을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단다. 의료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결국 같은 참사가 반복되겠지.”
“…….”
“솔직히 내 생각에는 6년도 길어. 그 사이에 신경외과 특유의 지긋지긋한 패턴으로 죽는 사람들이 몇백 명은 될 테니까.”
재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재현의 아버지도 지방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재현과 준후는 동일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에게 쉽게 공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빨리 성장해서 내 자리를 물려받으렴. 스타 서전은 반드시 있어야 해. 상징성이라는 건 무시할 수가 없거든.”
“네. 교수님.”
“이런이런.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져 버렸구나.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재현이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이전에 선물한 발가락 양말은 잘 신고 있냐.
대전으로 파견 가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언제 파견을 가냐 등등.
하지만 준후는 대화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 * *
재현은 과장실 창가에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창가 아래로 펼쳐진 병원 풍경을 굽어보고 있었다.
외래 진료가 끝나고 병원 스태프들이 하나둘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본관 건물에서 와르르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개미처럼 바쁘게 움직이며 어딘가로 향했다.
제자인 준후도 지금쯤 저 사람들의 대열에 섞여 있으리라.
예상을 항상 뛰어넘는 녀석이란 말이지.
다음엔 또 어디까지 성장해 있을지 궁금해.
준후가 혈종 제거술을 펼치던 모습을 떠올리며 재현은 흡족하게 웃었다.
고작 레지던트 2년 차가.
발칙하게도!
재현의 시그니처 수술 기법을 전부 소화하고 사용하는 기적을 선보였다.
감탄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뇌동정맥 기형 수술을 할 테도 비범한 어시스트를 선보였다.
근 1년 내에 재현은 준후만큼 신들린 어시스트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치 반대편에 또 다른 자신이 서 있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똑. 똑. 똑.
불청객 같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이 파사삭 깨졌다.
재현은 들어오라고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료 교수 박명관이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와 재현 곁에 섰다.
“청승 떠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군. 그래.”
“보자마자 놀리는 건가?”
“아니? 진심인데. 사색에 잠긴 모습에서 뭔가 인간미가 느껴져. 수술방에서의 자네는 인간 같지가 않단 말이야.”
“수술방에 내가 어때서?”
“로봇이고 냉혈한이지.”
명관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오늘이라도 좀 쉬지 그랬어. 이번 달 내내 휴무가 없지 않았나?”
“제자가 환자를 데리고 왔는데 모른 척할 수가 있어야지.”
준후에게 근무 날이라고 속였지만 사실 재현은 오늘 쉬는 날이었다.
모처럼의 휴무라 미리 잡아 놓은 약속들이 있었지만, 물거품이 되었다.
“제자라면 그 서준후라는 친구 말이지?”
“그래. 또 경악할 만큼 성장했어. 쉬는 날을 반납한 게 아깝지 않을 정도였지.”
“…….”
“아, 참. 자네, 대전 신원대학교 병원 신경외과 과장하고 친분이 있지 않나?”
“그건 왜?”
“아니 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말끝을 흐리는 재현.
진짜 속내는 준후가 파견을 간다는 곳의 근무 분위기가 어떤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준후의 능력이면 어디서든 어련히 잘하겠지만.
제자 걱정을 멈출 수 없는 게 자고로 스승이었다.
“시덕이가 나보다 3년 후배거든? 사람은 야심도 있고 정말 괜찮은데…….”
“괜찮은데?”
“지금 대전 의국이 개박살 나서 힘들어 죽으려고 한다. 레지던트도, 교수도 맘대로 해서 통제가 안 되나 봐.”
명관의 말에 재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슨 사정인지 자세히 말해봐.”
* * *
재현과 헤어진 후 준후가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신원대학교 병원이었다.
웅장한 본관 건물을 올려다보며 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라면 올 일이 없어야 하는 곳이었다.
앞으로 최소 6개월간.
준후의 근무지는 서울이 아니라 대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준후에겐 서울 본원에 들러야 할 무지막지하게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준후의 등을 떠밀었다.
준후는 못 이긴 척 로비로 입장했다.
외래 진료가 끝나고 직원들도 하나둘 퇴근한 시각이라 로비는 한산했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이동하던 도중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상대는 카페에서 커피를 포장해서 나오는 길이었다.
“경수!”
“뭐야? 너 왜 여기 있냐?”
경수가 뒤를 돌아보며 준후를 확인했고 준후는 경수에게 다가갔다.
“집에서 쉬다가 대전 내려가는 거 아니었어? 짜식, 설마 내가 보고 싶었냐?”
“끔찍한 농담 하지 마. 닭살 돋으려고 하니까.”
“그럼 왜 왔는데?”
“아영이가 단단히 화났어. 기분을 풀어줘야 할 것 같아.”
“아영이가 화났다면 문제 제공은 무조건 네가 했겠네. 아영이 보살이잖아. 뭐가 됐든지 간에 무릎 꿇고 싹싹 빌어라.”
“안 그래도 무릎에 보호대라도 찰까 생각 중이다.”
경수와 잡담을 나누다가 준후는 곧장 흉부외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흉부외과 병동 스테이션을 지날 때는 간호사들과 인사도 했다.
당직 데이트를 할 때 몇몇 간호사와 얼굴을 텄던 것이다.
흉부외과 당직실 앞에 서서.
준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정리했다.
며칠 전 벌어진 시호 사건 때문에 아영은 준후에게 크게 실망하고 화를 냈다.
시호의 습격을 예측했기에 준후는 사건 당일 아영에게 연차를 내고 쉬라고 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시호가 칼부림을 벌였다는 사실을 아영이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칼부림이 벌어질 걸 알고 나를 미리 대피시켰다는 거잖아. 그치?
며칠 전 통화할 때, 아영이 준후를 쏘아붙이며 물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럼 준후 너도 대피를 해야 했던 거 아니야? 칼 든 사람을 직접 상대하면 어떻게 해? 위험하잖아! 그러다가 크게 다쳤으면 어떻게 하려고?
평소 아영답지 않은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영은 준후가 칼부림을 예상하고도 시호와 맞상대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준후가 무림 출신으로 지구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한 착각이었다.
하지만 준후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영이라고 해도 무림 출신이라는 것을 털어놓는다면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을 게 분명하니까.
“칼부림까지 엮어야 그 인간을 완전한 지옥으로 빠뜨릴 수 있었어. 그래서 좀 욕심을 부렸던 것 같아.”
-그걸 말이라고 해?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넌 어쩜 그렇게 네 생각만 하니? 널 걱정하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지?
“아니…… 아영아…… 그런 게 아니라…….”
뚝!
변명할 겨를도 없이 통화는 끊어졌다.
이후 준후가 통화를 연결하고, 문자를 보내고, 심지어 직접 찾아가도 아영은 준후를 아는 체도 안 했다.
아예 투명인간 취급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를 것이다.
준후는 아영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실망과 화를 잠재울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 왔다.
이 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준후와 아영의 관계는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에 접어들 것이라고.
준후는 확신했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가 당직실 문을 옆으로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