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제54장 파견(1)
“…….”
준후를 발견한 아영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아영은 고개를 휙 하고 돌려 업무 중인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옆모습에서 얼음장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아영을 알고 지낸 이후로 아영이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걸 준후는 오늘 처음 깨달았다.
“아영아.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준후가 아영에게 다가갔다.
아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만 두들겼다.
아영의 마음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네가 나한테 화난 거, 충분히 이해해. 내가 아영이 네 입장이라도 그랬을 거야.”
“…….”
“살인자가 칼을 들고 설치는 현장에 뛰어들었으니 무모하게 보이고 걱정도 되고 바보 같아 보이기도 했겠지.”
“근데…… 그걸 다 알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어? 대체 생각이 있는 거니?”
아영이 의자를 돌려 준후를 마주했다.
매서운 눈빛으로 준후를 쏘아보았다.
“나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허락 안 할 것 같아서 네 멋대로 저지른 거잖아? 맞지?”
“응. 맞아.”
“어이없어. 진짜. 준후, 넌 네 목숨이 달린 일을 나한테 숨겼어. 너한테 나는 대체 뭐니?”
아영이 따져 물었고 준후는 고개를 숙였다.
무림에서 겪었던 비슷한 에피소드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무림에서 약혼했던 천 소저.
그녀와도 지금과 비슷한 실랑이를 벌인 적이 있었다.
천씨세가를 괴롭히는 녹림의 일부 잔당이 있었는데, 준후가 혼자 산채로 쳐들어가 녹림도들을 싹 쓸어버렸었다.
-왜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은 혼자서만 감당하려고 하나요? 그게 멋있어 보여요?
-…….
-착각하지 마세요. 서 공자는 단지 주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주변 사람들이 못 미더우니까 자기 혼자 일을 처리하려는 거라고요.
그 당시 준후는 천 소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 소저가 과민반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같은 패턴이 현대에서 반복되고 있다면, 문제는 준후에게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준후의 문제는…….
분명 주변 사람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리라.
“준후 너랑 할 말 없어. 그러니까 나가줘. 그리고 우리 잠시 떨어져서 마음을 식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아영아, 내 말 좀 들어봐.”
“늦었어. 할 말이 있었으면 그 사건 전에 했었어야지.”
“잠깐이면 돼. 아영이 넌 날 오해하고 있고 난 그 오해를 풀 수 있어.”
“오해? 그러니까 이 상황도 결국 다 내 탓이란 거지?”
아영의 목소리가 앙칼졌다.
뒤틀어진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준후에겐 아직 비장의 무기가 남아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는.
가슴 속에 꽁꽁 숨겨 놓은 비밀 이야기.
“아영아.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쉽게 말하면…… 외계인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
준후의 깜짝 고백에 아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농담 받아 줄 기분 아니거든?”
“농담할 상황도 아니지.”
준후는 창가에 있는 책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손바닥에 담았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책 한 권이 순식간에 준후의 손바닥으로 날아들었다.
턱!
준후의 손에 책이 들렸다.
마법과 같은 무공에 아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아영이 자신의 눈을 비볐다.
“이…… 이게 뭐야?”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
준후는 반(反)자 결을 사용해 책을 책장에 도로 꽂았다.
“그동안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니?”
“…….”
“당직을 서도 피곤한 줄 모르고, 500원짜리 동전을 구부리고, 어렵다고 하는 안무를 한 번 보고 단번에 외우고…… 예전에 조폭들을 혼자서 물리치기도 했었지.”
“…….”
“난 다른 사람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칼을 든 시호 선배와 맞선 것도 같은 이치야. 그 인간에게 결코 당할 일이 없으니까 맞상대를 했던 거지.”
준후는 차분히 자신의 능력을 고백했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능력을 고백했다.
아영의 실망과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솔직히 두렵기는 했다.
진실을 고백했을 때 아영이 자신을 괴물 취급할까 봐.
하지만 준후는 아영이 자신을 오해하는 것이 더 싫었다.
“그러니까 그때의 일은 절대 아영이 널 무시해서 벌인 일이 아니야.”
“…….”
“내 특별한 능력을 고백할 자신이 없어서 숨겼던 거지. 중요한 진실을 숨겼다는 맥락은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
“내용은 완전히 달랐어. 그것만을 알아줬으면 해.”
준후가 말을 마치자 당직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충격을 받은 아영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아영은 과연 자신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준후는 활을 쏘았으나 그 활이 과녁에 제대로 명중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아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영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고마워. 용기 내서 고백해 줘서.”
준후에게 다가온 아영이 준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손바닥으로 준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순간 준후는 눈시울이 뜨겁고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현대에서 단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던 무림인으로서의 준후.
그 또 다른 정체성이 아영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 * *
아영은 준후의 고백이 황당했다.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감당이 안 되는데 준후가 하는 변명이 어처구니없었다.
본인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능력자가 염력을 사용하듯 책에 손을 대지 않고 책을 조종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준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조금 이상하긴 했어.’
돌이켜보면 준후는 말도 안 되게 비범한 능력으로 말도 안 되게 비범한 활약을 해왔다.
그 근거가 초능력 같은 것이라고 하면 얼추 아귀가 맞았다.
그래서 아영은 준후의 고백을 사실로 믿었다.
힘든 결정을 한 준후를 끌어안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본인의 비밀을 숨기는데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싶었던 것이다.
오해가 해결된 후.
아영은 준후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평소와 달리 준후는 수다스러웠다.
무림에서 겪었던 일들, 갑자기 현대로 돌아오게 된 믿지 못할 경험 등등을 열 띤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준후 네 말을 100퍼센트 믿기는 하는데…… 아직도 당황스럽긴 해. 뭔가 소설 한 편을 들은 느낌이야.”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서 나도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까.”
“지금 얼굴, 속 시원해 보인다?”
“오해를 풀었으니까.”
준후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준후의 고백을 들은 후 아영은 준후와 한결 가까워졌음을 실감했다.
교제를 시작한 후에도 자신과 준후 사이를 단 하나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고 느꼈는데, 그 장벽이 허물어진 기분이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나한테 해주던 마사지도 무공과 관련 있어?”
“물론이지. 추궁과혈이라고 혈맥과 혈도, 근육과 신경을 풀어주는 수법이 있어.”
“와, 무공은 만능이네?”
“사실 그렇다고 봐야지. 작년에 미세 현미경이 고장 났을 때, 루뻬만 쓰고 수술을 했던 것도 비슷한 이치고.”
“그 능력으로 더 편하게 살 생각은 안 했어?”
아영이 화제를 돌렸다.
무공의 정체를 알고 나니 준후가 외과의를 선택한 것이 의아했다.
“뭐가?”
“적당히 힘을 숨기고 운동선수 했으면 어떤 종목이든 세계적인 선수가 됐을 텐데.”
“무림에서 사람 죽는 걸 많이 봤는데…… 그게 트라우마로 남았어. 트라우마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더라고. 덕분에 아영이 너도 만났고. 외과의를 택한 건 절대 후회하지 않아.”
준후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영아, 나 한심해 보이지 않아?”
“응? 갑자기 왜?”
“뭔가, 초능력빨로 잘난 척했던 느낌이잖아…….”
준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아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환자를 살리고 싶어 하는 네 간절함과 의지는 언제나 멋져. 그리고…… 그 초능력 같은 힘도 어쨌거나 네가 무림이란 곳에서 노력으로 일군 거잖아?
“…….”
“그럼 문제가 될 게 있나?”
“역시 솔로몬이네.”
준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아영은 알고 있었다.
준후는 모든 사람에게 안식처가 되려고 하지만 정작 준후 본인이 안식처로 삼는 곳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늘 외롭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이번 칼부림 사건도 어쩌면 준후의 그런 성향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었다.
“나 무림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데. 앞으로 틈틈이 무협지 열심히 읽어볼게.”
아영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고 준후는 그저 웃었다.
“뭐야?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거야?”
* * *
이튿날.
준후는 캐리어를 끌고 KTX 열차에서 내렸다.
역 로비에 도착하자 출근하는 사람들로 역이 붐볐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서 생기와 활력이 느껴졌다.
[대전역]
준후는 역에 걸린 표지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오늘부터 준후의 근무지는 대전으로 권역 외상센터로 지정된 대전 신원대학교 병원이었다.
준후에게 대전은 아픈 상처가 있는 장소였다.
준후가 착용하고 있는 팔찌의 주인공.
성호가 대전 신원대 병원에서 뇌사 판정을 받았고, 새 생명들에게 장기를 나눠 준 후, 하늘의 별이 되었기 때문이다.
준후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구로 내려갔다.
어디선가 고소한 빵 냄새가 흘러왔다. 고개를 돌리니 대전의 명물 선심당이 보였다.
아영도 준후처럼 대전 파견이 결정됐다는데, 빵순이인 아영에게 선심당은 천국일 것이다.
지이이잉.
때마침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하니 아영이 메신저를 보냈다.
[가주님. 오늘도 아침 문안 인사 올립니다. 오늘도 강녕한 하루 보내십시오. ㅁ/.]
아영의 메신저에 준후는 피식 웃었다.
준후가 무림 출신임을 고백하자 아영은 무협지를 열심히 읽더니 급기야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여기서 ‘ㅁ/’이란 기호는 포권지례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무림인끼리는 주먹에 손바닥을 대어서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좋은 아침이구려. 이 소저. 소저도 수련을 늘 게을리하지 말고 곧 대전에서 봅세.]
아영의 장난을 받아주고 준후는 택시에 탑승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휴대폰으로 시호에 대한 기사를 검색했다.
시호는 여전히 매스컴에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의 그 어떤 중요한 이슈도 시호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밀려났다.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가 오히려 환자들을 남몰래 살해하고 심지어 메스로 동료 의사를 위협했다?
이만큼 자극적이고 관심을 끌 수 있는 소식이 어디 또 있을까.
반대로 말하면 이번 사건이 유야무야 넘어갈 일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이코패스 살인마야.
그동안의 죗값을 달게 받아라.
시호라는 위협이 사라져 준후는 홀가분하게 대전에 파견을 나올 수 있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검색을 마치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가 택시를 추월해 앞으로 나아갔다.
구급차의 목적지도 준후처럼 신원대학교 병원일 것이다.
설마 신경외과 환자려나?
잠시 느슨했던 의식이 뾰족하게 곤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