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제54장 파견(2)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는 과장실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업무용 책상 위에 놓인 신경외과 과장 이시덕이라는 명패였다.
명패에서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면…… 서 선생이겠군…….”
일을 보고 있던 시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준후에게 다가왔다.
5 대 5로 잘 정돈된 헤어 스타일.
뾰족한 턱과 날렵한 몸매.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안경.
과장이라는 직함에 비해 시덕은 젊어 보였다.
스승 재현이 얼핏 겹쳐졌다.
“반가워요. 이시덕이라고 해요. 우리 구면이죠?”
“네. 과장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시덕이 악수를 청했고 준후는 시덕의 손을 잡았다. 힘이 담긴 짧은 악수가 시덕의 호방한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거기 앉아요. 커피라도 한잔하겠어요?”
“챙겨주신다면 잘 마시겠습니다.”
준후는 소파에 앉아서 과장실을 둘러보았다.
시덕의 과장실은 본원의 과장실처럼 화려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재현의 과장실처럼 단출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멋을 부린 느낌이 났다.
특히 노란 꽃이 핀 난초가 인상적이었다.
“난초 관리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꽃이 필 때까지 잘 관리하셨네요.”
“원예를 알아요?”
“아주 조금 압니다.”
“무릇 가치 있는 물건은 다루기 까다로운 법이에요. 왜인 줄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말 속에 답이 있는데. 역설적으로 다루기 까다로워서 가치가 생긴 거예요.”
“…….”
“가만 놔둬도 잘 자라면 신경을 쓸 필요도, 애정을 줄 필요도 없거든요.”
현학적인 대답을 하며 시덕이 준후의 테이블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준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모락모락 일어난 커피 연기가 둘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잡담이 이어졌다.
오는 길은 어땠느냐, 대전에 와본 적은 있느냐, 서울 의국 분위기는 어떠냐 등등.
시덕이 형식적인 것을 물었다.
준후는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말하는 도중, 시덕이 준후와 말을 트기도 했다.
“과장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봐.”
시덕이 다리를 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왜 굳이 저를 콕 찍어서 대전으로 데리고 오셨습니까?”
“난초를 키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추상적인 말씀이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자네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수집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는 거야.”
시덕이 준후의 활약상을 읊었다.
각성 수술 어시스트.
모겐족 별명을 얻었던 수술 어시스트.
수부외과 수지 접합 수술 어시스트 등등.
시덕은 준후에 관한 것이라면 거의 모든 것을 꿰고 있었다. 마치 준후를 덕질하는 것처럼.
그 관심이 준후는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왜냐면…….
정작 준후는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준후는 뼈저리게 배웠다.
정파인 중에도 사파인처첨 악독하고 간사한 인간이 존재하고.
사파인 중에서도 정파인처럼 의리와 인간미를 갖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사(正邪)의 구분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과장이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데려왔는지.
자신을 키워주기 위해 데려왔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그에 맞는 대처를 할 수 있었다.
“혹시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준후가 저돌적으로 물었다.
레지던트답지 않은 터프함에 시덕이 껄껄껄 웃었다.
“성격 한 번 화끈하구만. 그 성격으로 쫌생이 같은 표 과장 밑에서 잘도 버텼어.”
“과장님이 솔직한 분 같아서 저도 솔직하게 여쭤봤을 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니야, 사람 잘 봤어. 나도 돌려 말하는 건 딱 질색이거든.”
시덕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의국 상태가 지금 개판이야.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군.”
“…….”
“2년 차 레지던트가 얼마 전에 도망쳤고. 병동 돌아가는 꼴이 아주 개판이지. 수술 스케줄도 뒤죽박죽으로 꼬였어.”
“…….”
“자네가 중간 관리자가 되어서 의국을 정상화해 줬으면 좋겠군. 과장이나 돼서 레지던트와 병동 일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건 추잡하니까 말이야.”
“대전이 작년까지도 문제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졌습니까?”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주변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근래 들어 대전 신경외과 의국 상태가 메롱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다.
“두말하면 입이 아프니까 준후 네가 직접 확인해 보렴.”
시덕이 씁쓸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시덕은 준후에게 무려 ‘수술권’을 약속했다.
환자가 응급상황인데 교수와 펠로우 및 상위 레지던트가 없을 경우.
준후의 판단에 따라 준후가 집도의가 되어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수술 좋아하니까 어디 마음껏 수술해보라고.”
“저야 감사하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라도 수술이 잘못되면 뒷감당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그럼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거지. 누굴 탓하겠나?”
시덕이 싱겁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원시원한 성격.
화끈하고 거침없는 판단.
시덕에게서 준후는 무림맹의 청룡단주 도연운을 떠올렸다.
만약 시덕이 정말 도연운 같은 인물이라면 준후는 시덕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믿어주신 만큼, 아니, 무조건 그 이상의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결연한 목소리로 준후가 대답했다.
* * *
과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준후는 복도로 나왔다.
업무는 얼마나 바쁘고 고된지 궁금했고.
의국이 왜 개판인지 궁금했고.
병동 환자들 상태는 또 어떤지 궁금했다.
대전에 처음 온 만큼 대전 의국에 관한 모든 것들이 준후에게는 수수께끼였다.
숙직실에서 짐을 풀고 의사 가운을 걸치고 준후는 곧장 당직실로 이동했다.
의국 스태프와 인사를 나누고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드르르륵.
준후가 당직실 앞에 섰는데 한 청년이 마침 당직실 문을 여는 중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준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일까.
청년이 준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오늘부터 대전에서 근무하게 된 2년 차 레지던트 서준후라고 합니다.”
“아…… 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1년 차 김대휘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대휘가 안절부절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급실 콜 왔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낌새가 수상해서 준후는 대휘를 몸을 빠르게 훑었다.
대휘는 의사 가운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정작 가운은 문 너머로 보이는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업무용 책상에는 대휘의 것으로 보이는 콜폰과 목걸이 명찰도 놓여 있었다.
“하하하. 사실 제가 화장실이 급해서요.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준후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려는 대휘의 손목을 붙들었다.
“저 화장실이 급한데요.”
“거짓말하지 말고 따라와요.”
준후는 박력 있게 대휘를 끌고 당직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휘에게 의자를 권하고 대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대휘의 얼굴은 삽시간에 흙빛이 되었다.
고개를 축 떨어뜨린 채 두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앞으로 계속 얼굴 볼 건데 말 편하게 해도 되죠?”
“네. 선배.”
“대휘야. 요새 많이 힘들지?”
“어디 힘든 사람이 저만 있겠어요? 교수님, 선배님들 다 힘들죠.”
“아니, 네가 힘들면 힘든 거야. 다른 사람이 힘들어서 숨넘어가기 직전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렇다고 해서 네 고생이 고생이 아닌 건 아니니까.”
“…….”
“오죽하면 네가 탈주를 다 생각했겠어. 안 그래?”
탈주라는 단어에 대휘는 화들짝 놀랐다.
독심술이라도 익혔단 말인가.
대휘는 준후의 지적대로 막 탈주하려던 참이었다.
병동에서 도망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참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오늘 처음 본 준후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신기하고 놀랍고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관찰했으니까.”
“뭘 관찰하셨는데요?”
준후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사용했다. 의사 가운과 탁자에 놓인 콜폰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첫째로, 가운이 미심쩍었다.
근무 중인 의사는 절대 의사 가운을 벗지 않았다.
둘째로, 레지던트의 필수품인 명찰과 콜폰이 책상에 놓여 있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이 두 가지는 레지던트가 항상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물건이었다.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을 다 버렸다면…… 병원을 떠나겠다는 소리밖에 더 돼?”
“…….”
“괜찮아.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난 널 위로해 주고 싶어서 그래. 오죽 힘들면 이랬겠니?”
준후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났다.
인턴보다 힘든 게 레지던트 1년 차였다.
그런데 전공이 신경외과다?
병원이 권역 외상센터로 지정되었다?
심지어 최근에 2년 차가 먼저 탈주해서 자리를 비웠다?
그로 인해 대휘가 받았을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는 말도 못 했을 것이다.
지금 대휘의 가슴은 잿더미일 게 분명했다.
“흐흐흐흑.”
대휘가 흐느껴 울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준후의 가슴은 더 쓰라려 왔다.
신경외과 전공을 택한 것이 무슨 죄라도 진 것이란 말인가.
왜 우리는 이렇게 늘 고통받아야 한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죄송해요. 선배.”
“네가 미안해할 거 없어.”
“아니에요. 제 마음이 잠깐 너무 나약해졌나 봐요.”
대휘가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사실 선배처럼 말해주신 분이 단 한 분도 없었거든요. 다들 1년 차는 원래 당연히 힘든 거라고 하셔서…….”
“당연한 건 없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있을 뿐이지.”
“저 업무 준비 다시 할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왕 가운 벗은 거 오늘 하루만큼은 푹 쉬고 와.”
“네? 안 돼요! 일이 얼마나 밀렸는데요.”
대휘가 기겁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차트 업무만 해도 산더미 같았다.
최소 반나절은 걸릴 지경이었다.
거기에 응급실 콜을 받아서 응급 환자 진료를 보고.
병동 콜을 받아 오더를 넣고.
병동과 중환자실 라운딩까지 돈다면 시간은 더더욱 모자랐다.
준후 혼자서 그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일단 해야 할 일을 리스트로 적어 봐.”
“네.”
대휘가 수첩에 내용을 적어서 준후에게 내밀었다.
준후가 수첩을 훑었다.
과연 대휘가 호들갑을 떤 이유가 있긴 했다.
깨알만 한 글씨가 수첩 한 장을 가득 채웠다.
업무량이 살인적이었다.
레지던트 T.O가 모자랐던 탓에 일이 며칠씩 쌓이고 밀렸던 것이다.
“오케이. 알았으니까 가 봐. 나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목욕탕에서 때도 좀 벗기고 그래.”
“안 돼요. 처음 오신 선배한테 어떻게 일을 다 떠넘겨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대휘가 안 나가겠다는 표정으로 버텼다.
이런 친구가 탈주를 계획했다면 대전 의국은 예상보다 훨씬 더 개판이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대휘야.”
“네. 선배.”
“여기에 적어준 업무 말이야.”
준후는 수첩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나 혼자서도 2시간이면 끝낸다.”
“이 많은 걸 고작 2시간 만에요? 에이, 말도 안 돼요!”
대휘가 강경하게 부정했지만 준후는 오히려 한술 더 떴다.
“그래. 솔직히 2시간은 힘들고…… 1시간 30분이면 끝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