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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83화 (282/424)

283화

제54장 파견(3)

한 청년이 대전 신원대학교 본관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김대휘.

신경외과 레지던트 1년 차였다.

대휘의 시선은 한참 동안 본관 건물에 머물러 있었다.

심경이 복잡했다.

후련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이 많은 감정을 어떻게 한 번에 느낄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벅. 벅. 벅.

대휘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20분 전 준후가 불청객을 내쫓듯 대휘를 내쫓았다.

오늘 하루만큼은 의국을 잊고 푹 쉬라고 했다.

준후의 태도가 워낙 완강했던 탓에 대휘는 제대로 저항할 수가 없었다.

순순히 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준후 선배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 많은 업무를 어떻게 혼자서 다 보겠다는 거야?

대휘는 아직도 준후의 파격적인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챙겨준 건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준후가 혼자서 폭탄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병동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에라 모르겠다, 하루를 젖혀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대휘는 본관을 등지고 출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딱 하루만이라도 푹 쉬고 싶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휴식이 간절했다.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략 3개월.

대휘는 매일 당직 근무를 섰다.

비인간적이라고 해서 사라진 100일 당직의 늪에 빠졌다.

의국 스태프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논리.

선배들은 이미 100일 당직을 서봤다는 논리.

바위처럼 단단한 그 두 가지 논리를 1년 차가 어떻게 거스른단 말인가.

쿵. 쿵. 쿵.

병원이 멀어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불안이 커졌다.

하지만 어쩌랴…….

이런 식으로 일하다가는 자신이 먼저 과로사할 것 같은데.

대휘가 병원의 굴레를 벗어나 가장 먼저 찾은 장소는 식당이었다.

선배들의 눈치를 보느라 못 먹었던, 자신의 소울 푸드인 뼈다귀 감자탕을 먹었다.

뼈다귀에 살점이 남아나지 않았다.

쫀쫀한 연골까지 죄다 뜯었다.

양념이 묻어 지저분한 손을 물티슈로 닦고, 국물에 밥을 말아 뚝배기를 깨끗하게 비웠다.

대휘는 올해 들어 가장 행복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어보면.

대휘는 뼈다귀 감자탕을 먹는 것이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근처 공원을 걸었다.

누구도 대휘를 찾지 않았다.

대휘는 자유로웠다.

지이이잉.

산책 도중 휴대폰이 울려서 번호를 확인하니 3년 차 혁재의 전화였다.

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전화가 쉬지 않고 떨어대는 걸 보면 자신이 병원을 빠져나온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쾌한 기억과 감정의 잔재들.

하지만 대휘는 고개를 휘휘 가로 저었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변경하고 계속 걸었다.

내일 맞아 죽더라도…….

당장 오늘은 쉬어야 했다.

준후가 쉬라고 해서 쉬었으니까, 준후가 현 상황을 잘 설명해 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대휘는 하천을 따라 유유자적하게 걷다가 우연히 눈에 띈 대중목욕탕에 들어갔다.

시간이 일러서인지 목욕탕은 한산했다.

손님이라고는 대휘와 목욕탕 지박령처럼 느긋해 보이는 노인 한 명뿐이었다.

김이 올라오는 뜨끈한 욕탕에 대휘는 몸을 담갔다.

전신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뭔가 어찌 돼도 좋았다.

* * *

같은 시각.

당직실에 있던 준후는 의국에 쌓였던 업무를 신들린 속도로 해치우는 중이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키보드를 워낙 빠르고 많이 두드리다 보니 키보드 소리가 중첩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키보드가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준후의 손가락에 잔상이 따라붙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최상승의 경공을 밟는 듯했다.

양수 호박 기술의 대성.

호월십이수의 7성.

손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무공들을 완벽하게 습득하면서 준후의 손놀림이 무르익었다.

속도와 섬세함을 동시에 갖췄다.

업무 도중 응급실과 병동에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별다른 걸림돌은 못 되었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준후는 허공섭물로 수화기를 당겨와 통화를 받고 쉽게 오더를 내렸다.

근무 첫날이라고 하늘이 적응할 시간을 주는 걸까.

통화한 케이스들은 준후가 직접 나서서 환자를 봐야 할 필요는 없는 케이스였다.

대휘와 약속한 대로 준후는 그동안 밀린 의국 업무, 마치 사파인들처럼 고약한 일들을 1시간 반에 없애 버렸다.

물론 준후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스승 재현의 논문을 암기해서 얻은 해박한 의학 지식들.

차트 입력에 분당 4,000타를 자랑하는 타자 속도.

여러 분야에 실무 경험 등등.

무늬만 레지던트인 준후였기에 의국 일이 아무리 밀려 있다고 해도 준후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하룻강아지가 어찌 호랑이와 겸상을 한단 말인가.

“흐아아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준후는 하품을 했다.

그러고 나서 가장 궁금했던 대전 신경외과 의국의 상태를 진찰해나갔다.

대체 대전 상황이 얼마나 안 좋기에 다들 험지라는 말을 달고 사는지 알고 싶었다.

의국의 교수진은 총 8명이었다.

뇌혈관, 뇌종양, 경추·요추파트, 정위신경, 소아신경외과 등등.

분야별로 한 명의 교수가 붙었다.

그 말인즉 해당 교수가 부재한다면 응급 환자를 수술할 사람이 없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레지던트 T.O는 한술 더 떴다.

중환자실을 포함해서 병동에 환자가 70명이거늘 근무 중인 레지던트는 준후를 포함해서 꼴랑 4명뿐이었다.

서울 본원이 6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심각하게 적은 수치였다.

여기서 또 웃긴 사실.

인원은 적은 주제에 대전에서 집도하는 수술 건수가 서울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분명 권역외상센터라는 특징 때문이겠지만, 업무량이 감당 못 할 정도라는 사실 또한 분명해 보였다.

지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준후가 근무하는 이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의국 상태를 전반적으로 진단하고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이제 보니 과장 시덕이 자신을 콕 찍어서 데려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최소한 준후 정도는 되어야 대전 파견을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으리라.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린 일은 다 끝냈고, 새로운 일은 들어오지 않았다.

모처럼 찾아온 여유시간에 당직실을 청소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먼지떨이로 냉장고와 책장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햇살을 받은 먼지들이 보석 입자처럼 고와 보였다. 내친김에 준후는 바닥도 쓸고 냉장고도 청소했다.

그런데 마무리로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려던 그때.

기분 나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물걸레 자루가 반으로 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준후에게 누워서 떡 먹기였다.

가뜩이나 일이 많아서 죽겠는데 꼴 같지도 않은 짓을 하고 계신다라…….

여긴 정말 총체적 난국이군.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당직실을 나왔다. 화장실에서 물걸레를 빨아 당직실로 돌아와 바닥을 물청소했다.

드르르륵.

바닥 청소를 완벽하게 끝내고 다시 의자에 앉았을 때, 당직실 문이 열렸다.

몸집이 다부지고 어깨가 네모난 청년이 당직실로 들어왔다.

준후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부러진 물걸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뭐야? 네가 새로 파견 온 레지던트냐?”

청년이 가자미처럼 가느다란 눈매로 준후를 응시했다.

“네. 서울에서 온 2년 차 서준후라고 합니다.”

“그래. 난 3년 차 혁재다. 오자마자 청소부터 했네?”

“네. 좀 많이 지저분하더라고요.”

“뭐, 나쁘지는 않은데…….”

혁재가 깔끔해진 당직실을 훑어보다가 팔짱을 꼈다.

“너 나한테 뭔가 실수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드니?”

“제가요? 실수를요? 잘 모르겠는데요?”

“선배가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후배가 편하게 앉아서 대답하는 거 보기 안 좋잖아. 안 그래?”

혁재의 멘트에 준후가 경악했다.

세상에 이런 꼰대가 또 있을까.

의학지식이라면 몰라도 혁재의 꼰대력 만큼은 준후조차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럼 선배도 앉으세요.”

“이 새끼 겁나 웃기네? 네가 일어서야지, 왜 내가 앉냐?”

혁재가 코웃음을 쳤고.

준후는 그런 혁재를 말로 들이받아 버렸다.

“힘든 사람이 쉬어야지. 왜 쉬고 있는 사람이 힘들어야 합니까? 논리가 이상한데요?”

“어쭈, 너 지금 개기냐?”

“선배 말이 이해가 안 가서 그럽니다. 대전 분원은 후배를 이딴 식으로 취급합니까?”

준후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깃들었다.

준후는 지구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였다.

혁재 따위에게 겁을 먹으래야 겁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하…… 맹랑한 새끼. 주제 파악 못 하네. 파견 나왔다고 못 건드릴 줄 알아?”

혁재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준후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혁재였다.

“후우. 첫날이라 봐주는 줄 알아라. 그건 그렇고 대휘 새끼 어디 갔냐? 미친 새끼가 계속 내 전화 쌩까던데.”

“대휘 탈주하려는 거, 제가 막았습니다.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하루 쉬라고 밖에 보냈고요.”

“응? 뭐라고? 다시 말해봐.”

준후의 대답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혁재는 혀를 찼다.

갓 파견을 나온 파릇파릇한 애송이가 제멋대로 후배를 쉬게 한다고?

이게 말이야? 방구야?

혁재가 보기에는 준후는 돌아이였다.

“대휘 오늘 병동에 없다고요.”

“야, 이 미친놈아. 의국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어? 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참고 그러는 거지.”

“…….”

“그리고 대휘 없으면 병동은 누가 관리하냐? 가뜩이나 차트랑 오더 밀려서 여기저기서 개 욕 처먹고 있는데.”

“밀린 일은 벌써 다 처리했어요. 저는 수술 스케줄이 없으니까 내일 오전까지 당직 서면 되고요.”

“염병하네. 밀린 일이 한두 개인 줄 알아? 그걸 벌써 끝냈다고?”

“꼬우면 확인해 보세요.”

준후의 얄미운 말투와 행동에 혁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머리에 물이 담긴 냄비를 올리면 냄비가 끓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혁재는 당장 손찌검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참을 인(忍)을 가슴에 새겼다.

누가 됐든 최소한 첫날은 까불어도 봐준다, 그것이 혁재의 너그러운 규칙 중 하나였다.

“나와봐.”

혁재는 준후 대신 의자에 앉았다.

입·퇴원 기록지.

퇴원 요약지.

경과 기록지.

수술 기록지 등등을 살폈다.

놀랍게도 병동과 중환자실에 있는 모든 환자의 모든 기록지가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오탈자는 없었고 약물 용법에 오류가 있거나, 금기사항을 어겼거나, 투여량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처치와 검사 오더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대휘였다면 오늘 자정까지 붙잡아야 간신히 처리됐을 양이 고작 정오 전에 끝나 버린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속도랄까.

준후의 업무 처리 속도는 소름 돋을 정도였다.

압도적이고, 차원이 달랐으며, 기적적이었다.

젠장! 이대로는 안 돼.

3년 차 체면이 있지, 모양 빠지게 물러설 수는 없어.

혁재는 어떻게 해서든 준후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두 눈을 뜨고 다시 차트를 살폈지만…….

괜히 눈만 건조하고 쓰라렸다.

준후의 일 처리에는 옥에 티조차 없었다.

‘개X끼. 일은 좀 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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