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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84화 (283/424)

284화

제54장 파견(4)

준후와 혁재가 한창 기 싸움을 벌이는 중 당직실 전화기가 울렸다.

준후가 전화를 받았다.

“네.”

-…….

“차트 확인하고 바로 내려갈게요.”

준후가 통화를 끊고 책상 앞에 앉아 마우스를 움직였다. 모양을 보니 응급실 콜이 온 듯했다.

“무슨 환자냐?”

혁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T.A(교통사고) 환자입니다. 두개골 골절에 지주막하 출혈이 있다는데 응급 기록지랑 브레인 CT 확인하고 내려가게요.”

“그래?”

혁재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모니터에 떠오른 환자의 정보를 꼼꼼하게 훑었다.

등골이 서늘한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응급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나도 같이 내려가자.”

“한 명은 당직실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혹시 제가 못 미더운 건가요?”

“못 미덥다기보다는…….”

혁재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서울에서 날고 긴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실력 좀 확인해 보고 싶어서. 당직 대기는 인턴한테 잠깐 짬 시키면 그만이야.”

“좋을 대로 하시죠.”

준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준후의 기생오라비 같은 외모.

띠꺼운 말투.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혁재는 영 거슬렸다.

그래서 혁재는 이 기회에 준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계획이었다.

네가 아무리 잘 나 봤자지.

나만큼 신경외과 외상 환자를 많이 진료하고 치료해 봤겠어?

……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차트 다 봤으면 가자고.”

준후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혁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이거 순 악질이잖아?

조만간 건수를 잡아서 손을 봐야겠네.

응급실로 내려가는 동안 준후는 혁재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혁재는 후배를 몸종처럼 무시하고 후배를 제멋대로 휘두르는 게 익숙한 인간말종이었다.

강압적인 말투와 행동.

무엇보다 반으로 쪼개진 물걸레 자루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혁재 같은 인간일수록 의외로 윗사람에게 평가는 좋은 편이었다.

왜냐면…….

후배를 쥐어짜서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는 혁재 같은 부류를 혐오했다. 아랫사람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행동은 사파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두 사람이 곧 응급실에 도착했다.

응급 수술이 필요한 환자로 분류되는 A-10구역 중 벽과 가까운 침상 앞에 섰다.

환자의 이름은 양재웅.

나이는 32세.

갑자기 인도를 덮친 자동차에 충돌을 당했다고 했다.

차량의 속도가 빠르지 않아 다른 부위는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 넘어질 때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다고 했다.

환자는 침상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팔에 연결된, 수액이 떨어지고 있는 점적통을 응시하고 있었다.

속된 말로 얼빠진 표정이었다.

환자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어머니로 보이는 보호자는 그런 환자의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경외과의 서준후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환자는 곧잘 인사를 했다.

멍했던 눈빛에 금방 생기가 돌았다.

보호자도 뒤늦게 준후를 발견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지금 어떤 점이 가장 불편하신가요?”

“머리가 윙윙 울려요. 속도 메스껍고요.”

“손가락은 어떻게 보이시나요?”

준후가 검지를 펴서 환자에게 내밀었다.

“그냥 손가락을 피신 거 아닌가요?”

“손가락이 두 개로 보인다든가, 손가락에 잔상이 보인다든가, 손가락이 흔들려 보이지는 않나요?”

“아뇨. 문제없어요.”

준후는 차분하게 환자를 문진했다.

머리에 관련된 기왕력이 없고.

머리에 관련된 가족력이 없고.

다른 병력이나 수술 기록도, 환자는 없었다.

딸칵!

펜 라이트를 켜서 환자의 동공을 비추었다. 좌우 동공의 크기, 형태 변화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GCS(의식사정) 스코어 또한 15점 만점에 15점이었다.

당한 사고에 비해 상태가 꽤 멀쩡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긴장이 풀리려는 순간.

환자의 귀에서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마치 약수터의 약수물이 떨어지듯이.

뚝. 뚝. 뚝.

“어? 이게 뭐지?”

“잠깐만요! 손대지 마세요.”

준후가 급하게 환자를 말렸다.

거즈 통에서 꺼낸 거즈로 환자의 귀 아래를 받쳤다.

거즈가 금세 축축하게 젖었다.

뇌척수액은 대략 1분 정도 흐르다가 멈췄다.

하지만 돌발 상황이 터지면서 침상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특히 환자를 지켜보고 있던 혁재가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서…… 선생님! 우리 재웅이 왜 이런 거죠? 왜 귀에서 물이…….”

보호자가 다리를 동동 구르며 물었다.

아들의 귀에서 별안간 물 같은 것이 흘러내리니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환자의 눈도 어느새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졌다.

“뇌척수액 루(Cerebrospinal Fluid Leak)라는 증상인데요. 외상으로 뇌실이 붓고 그로 인해 뇌척수액이 머리를 빠져나가지 못하다가…….”

“…….”

“귀나 코로 빠져나가는 증상입니다.”

준후는 엄숙한 표정으로 환자에게 금기사항을 전달했다.

기침 금지와 코 풀기 금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둘 다 머리에 압력을 높이는 행동이었다.

준후는 환자의 머리 각도가 30도로 유지되도록 돕기도 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 있던 물이 귀로 빠져나왔다는 거죠? 그럼 엄청 심각한 병 아닌가요?”

보호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아드님 같은 경우는 충분히 자연적으로 치료될 수 있어요.”

“그래요? 그럼 수술은 필요 없나요?”

“네. 현재로써는요.”

준후가 보호자를 안심시켰다.

환자에게 뇌척수액 루가 발생했다고 해서 준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활동할 당시 눈앞에서 동료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목이 나뒹굴고, 복부에서 내장이 튀어나오는 끔찍한 광경을 수도 없이 목격했던 탓이었다.

그때 단련한 부동심은 준후가 외과의로 수련하는 데 보이지 않는 토양이 되었다.

“머리 좀 확인하겠습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준후는 드레싱 카트에 놓여 있던 붕대 가위를 손에 쥐었다.

사각. 사각. 사각.

환자 머리를 칭칭 동여매고 있던 붕대를 잘라냈다.

그러면서 준후는 환자의 뒤통수에 슬며시 손을 댔다.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펼친 것이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손바닥으로, 손바닥에서 두개골로 전해졌다.

내공을 내가기공으로 전환하면서 내공이 두개골을 스르륵 통과해서 뇌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치 조영제를 투여한 것처럼.

환자의 뇌로 급속도로 확산하는 내공을 통해.

준후는 환자의 뇌를 매만지고, 훑고, 더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시행하고 결과를 확인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초에 불과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내공 뇌혈관 조영술은 사기였다.

“측두부에 찰과상이 있기는 한데 꿰맬 필요는 없겠네요. 약물 치료로 충분하겠어요.”

준후가 환자와 보호자를 안심시키며, 환자의 뒤통수에 대고 있던 손바닥을 떼며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진료에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만. 서준후, 나 좀 보자.”

혁재가 준후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었다.

왼손 엄지로는 본인의 등 뒤를 가리켰다.

침상과 꽤 떨어진 장소에서 준후는 혁재를 마주했다. 팔짱을 낀 혁재의 태도가 심히 불량했다.

“너 제정신이니? 저 환자를 약물치료로 퉁치겠다고?”

“네. 만니톨(이뇨제)이랑 nimodipine(칼슘통로 차단제)만 써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어요.”

“저 환자 두개골 골절에, 지주막하 출혈에, 뇌척수액 루까지 겹쳤어. 약물치료로는 어림도 없다고!”

“…….”

“그리고 말이다. 애초에 수술이 필요한 게 아니면 응급의학과에서 왜 우리한테 노티를 했겠냐? 신경과에 노티를 했지.”

혁재가 따지듯이 물었다.

신경과는 내과 계통이고 신경외과는 외과 계통이었다.

심장 질환으로 비유하자면.

심장(순환기)내과가 내과 계통이고 흉부외과가 외과 계통인 것처럼.

“응급의학의가 머리 진료를 보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수술이 필요하다가 착각했을 수도 있죠.”

“착각은 개뿔.”

혁재가 빈정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수술 스케줄 잡아. 지주막하 출혈 때문에 곧 혈종이 생길 거고. 혈종 생기면 뇌압이 치솟을 테니까.”

“아뇨. 전 못하겠습니다.”

“뭐…… 뭐라고?”

“수술이 필요 없는 환자한테 왜 수술을 합니까?”

준후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의학지식이 혁재에게 밀린다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인 재현.

그의 수련 노트를 통째로 달달 외운 사람이 준후였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혁재가 준후 앞에서 의학 지식을 논하는 일은 무림맹주 앞에서 초짜가 자기 무공을 자랑하는 것처럼 꼴불견이었다.

“이 새끼 보소? 선배가 하라면 하는 거지, 뭘 그렇게 토를 달아?”

“…….”

“네가 나보다 외상 환자 진료 많이 봤어? 아니면…… 혹시 수술은 자신 없냐?”

혁재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선배야말로 개소리하지 마시고요. 멀쩡한 환자 머리 열어서 고생하게 만들지 마세요.”

“방금 개소리라고 했냐?”

“틀린 말 했습니까? 의사가 환자 잡는 소리 하면 그게 개소리인데요?”

수술이 필요 없는 이유를 준후는 다시 한번 조목조목 언급했다.

첫째 이유는 두피 열상이 없는 선상 두개골 골절이었다.

이는 환자의 머리에 가해진 충격이 걱정했던 것보다 크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둘째 이유는 의외로 지주막하 출혈이었다. CT로 확인 결과 출혈량이 많지 않았다.

이는 뇌동맥류가 파열한 것이 아니라 외상으로 미세 혈관이 터졌다는 증거였다.

또한 출혈량은 50CC 정도였는데.

이만하면 혈종이 생기더라도 뇌척수액에 자연스레 흡수될 수 있었다.

“두개골 골절, 지주막하 출혈, 뇌척수액 루. 세 가지를 다 묶어 놓으면 환자 상태가 무척 나빠 보일 수도 있겠죠.”

“…….”

“하지만 꼼꼼히 따져보자고요. 그 세 가지가 과연 우리가 걱정할 만큼 심각한지요.”

“…….”

“환자 의식 명료한 거 보셨죠? 동공 반사에 별 이상 없던 거 기억하죠?”

준후는 데이터에 근거한 주장으로 혁재를 두들겨 팼다.

세 치 혀로 권법, 장법, 각법, 수법을 펼쳤던 것이다.

혁재는 어느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니, 그보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반박은 단 한마디조차 못했다.

이이이익.

저 짜증 나는 새끼가!

혁재는 속으로 분을 삭이는 중이었다.

준후의 저 현란한 주둥이를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 어쨌든!”

혁재의 언성이 높아졌다.

“어쨌든 뭐요?”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저 환자는 수술이 필요해. 그동안 외상 환자를 본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참나 요즘 외과의는 감으로 수술합니까? 선배 의사가 아니라 무당이었어요?”

“X만 한 새끼가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고 말이야. 너처럼 건방진 놈은 혼쭐이 나야 해.”

노기를 이기지 못한 혁재가 준후에게 주먹질을 했다.

후우우웅.

하지만 준후는 손바닥을 펼쳐 혁재의 주먹을 간단히 막아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방어였다.

그렇게 경악한 혁재의 귓가로 더욱 충격적인 준후의 발언이 이어졌다.

“야, 너 지금 이 순간부터 나한테 선배 대접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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