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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85화 (284/424)

285화

제54장 파견(5)

휙!

준후는 붙들고 있던 혁재의 주먹을 내팽개쳤다.

간단하지만 힘이 담긴 동작.

혁재가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혁재를 초반부터 따끔하게 혼내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준후는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일단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준후는 그저 무력만으로 혁재를 제압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안 풀린다고.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든다고.

냅다 주먹다짐부터 한다면 혁재와 자신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서준후, 너 이 자식. 선배한테 반말한 것도 모자라 손찌검까지 해? 미쳤어?”

말과 달리 혁재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없이 누그러져 있었다.

본인의 주먹을 손쉽게 막아낸 준후에게 겁먹은 모습이었다.

“입을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손찌검은 당신이 먼저 했잖아. 생사람 잡지 말라고.”

“어쨌거나 나대지 말고 내 말 들어. 저 환자는 당장 수술해야 해.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언제 상태가 악화될지 몰라.”

혁재가 검지로 환자가 누운 침상을 가리켰다.

준후와 혁재가 팽팽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난입했다.

포마드 스타일로 앞머리를 훤하게 드러낸, 지적인 이미지의 의사가 준후와 혁재 사이에 껴들었다.

명찰에 적힌 이름이 박준오였다.

“이거…… 내가 껴들 일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한 마디는 괜찮겠지? 신경외과로 노티한 사람이 나니까.”

“괜찮아. 얼마든지 껴들어도. 차석이 말씀하시면 겸손하게 들어야지.”

혁재가 준오의 참전을 반겼다.

두 사람은 의대 동기로 서로 적당히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준후라고 했지?”

“네.”

“저 환자 수술하는 게 맞지 않겠어?”

“수술까지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약물치료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어서요.”

“나도 알아. 하도 시끄러워서 너희 둘 이야기 다 들렸으니까.”

준오가 부드럽게 웃었고.

혁재는 가슴을 내민 채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자신의 편이 생기자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그러면 수술이 필요한 근거를 대주시겠습니까?”

“근본을 따지면 혁재랑 비슷해. 두개골 골절, 뇌척수액 루, 지주막하 출혈.”

“…….”

“이 세 가지 증상이 동시에 터졌는데 약물만으로 통제가 가능하겠니?”

“…….”

“내 기억엔 예전에 비슷한 환자를 수술했던 걸로 아는데?”

“해당 케이스 정확히 기억하십니까?”

“그게…… 기억까지는 못하지. 응급의학과에서 하루에 보는 환자만 100명이 넘어가는데.”

“이번 케이스가 예전 케이스와 비슷하다는 감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준후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설명에 나섰다.

예전 환자의 두개골 골절은 어떤 형태였는지, 지주막하 출혈의 출혈랑과 뇌척수액 루의 유출량은 어땠는지 등등.

하나의 케이스를 다른 케이스에 대입하려면 정확한 자료가 있어야 했다.

환자가 두통을 호소한다고 해서 무조건 뇌출혈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약물로 치료하다가 환자가 악화되면 그때 수술을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

“GCS 스코어가 만점일 정도로 의식이 뚜렷한 환자에게 왜 수술부터 권해야 하죠?”

준후가 또박또박 반박을 했다.

그러자 혁재의 지원군으로 나섰던 준오도 할 말을 잃었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손가락으로 볼만 긁적거렸다.

혁재가 까마득한 후배에게 털리고 있길래 기를 세워주려고 참전했건만…….

준오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준후의 의학 지식은 난공불락이었다.

준오조차 준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준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설득하러 왔다가…….

반대로 설득을 당해 버린 것이다.

“하긴 수술하기에는…… 환자 의식이 너무 또렷하긴 하네. 뇌종양 수술도 아니고 의식이 저렇게 좋은 환자에게 수술하는 경우는 잘 없지.”

준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야. 박준오! 너 지금 서준후 새끼한테 붙었냐? 장난해?”

“아니…… 이 친구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에이, X발! 지랄 맞은 입싸움, 지겨워 죽겠네. 무조건 수술해.”

혁재는 환자가 누운 침상 쪽으로 이동했다.

쿵쿵쿵 요란한 발소리를 내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콧김을 씩씩 뿜어대는 통에 그 모습이 꼭 기관차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혁재의 앞을 준후가 가로막았다.

“어딜 가니?”

“방금 말했잖아. 환자한테 수술이 필요하다고 설득해서 수술 진행할 거라고. 내가 다 책임지면 될 거 아니야!”

혁재가 큰소리를 쳤다.

“책임이라고?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마. 수술이 잘못되면 넌 고작 징계 정도나 받겠지만 환자는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준후는 한결같이 혁재에게 반말을 했다.

“그걸 책임이라고 할 수 있어? 등가 교환이 안 되잖아.”

“딱 셋만 샌다. 이번에는 나도 안 참아. 하나…… 둘…….”

“꼴깝 떨지 말고 교수님께 전화해 보자.”

준후가 제3의 길을 내놓았다.

이 이상 ‘내가 맞고 네가 틀리네.’를 반복하는 건 시간 낭비고 에너지 낭비였다.

레지던트에게는 교수가 판사였다.

“교수님께?”

“그래. 누구 말이 맞는지 교수님께 여쭤보면 되잖아. 내 말은 못 믿는다 쳐도 설마 교수님 말까지 못 믿는 건 아니겠지?”

“X발, 그거 좋은 생각이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교수님이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면 너도 인정해라?”

“당연하지.”

“야. 근데 너 열 받게 계속 반말할래?”

혁재가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준후를 노려보았다.

후배가 반말하면서 맞먹으려고 하니 스트레스와 짜증이 정수리까지 치솟았다.

한편 준후는 그런 혁재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운에 넣어둔 콜폰을 꺼냈다.

교수에게 전화를 걸면서 남은 왼손을 혁재에게 뻗었다. 엄지가 아닌 중지를 꼿꼿하게 세워 올렸다.

* * *

수술실이 있는 3층 휴게실.

혁재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캔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단 한 모금에 캔이 텅 비었다.

와그작!

혁재의 손아귀 안에서 캔이 무자비하게 찌그러졌다.

“뭐 때문에 그렇게 열이 받았어?”

막 휴게실로 들어온 서동원이 혁재의 맡은 편에 앉았다.

서동원은 신경외과에서 단 한 명뿐인 4년 차이자 치프였다.

눈이 동그랗고 입가에 항상 미소가 걸려 있어서 동원의 별명은 나무늘보였다.

실제 성격도 나무늘보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자기 일에만 충실할 뿐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서준후라고 서울에서 파견 나온 새끼 있잖아요. 그 새끼, 치프 보셨어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

“완전 생돌아이예요. 저한테 다짜고짜 반말하고 주먹질까지 했다니까요?”

혁재가 준후를 험담하자 동원의 입가에 알 듯 말 듯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응급실 동기한테 들은 게 있는데 사실을 왜곡하면 안 되지. 요즘은 소설도 그렇게 안 써.”

“……다 들으셨어요?”

“그래. 너랑 준후랑 붙은 거 알 사람은 벌써 다 알더라.”

“소문이 어떤 식으로 돌고 있어요?”

혁재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준후가 너한테 반말한 건 심했다고 보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대부분은 널 더 나쁘게 봐. 욕하고 주먹질을 먼저 한 건 너니까.”

“…….”

“혁재야.”

“네. 치프.”

“그놈의 성질머리 좀 죽이면 안 되겠냐?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겠다.”

동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주름진 이마에 손을 얹었다.

사실 동원은 혁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소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긴 하지만 혁재가 후배들을 곧잘 휘어잡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동원이 따로 후배들을 챙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웬걸?

혁재는 점점 폭군이 되어갔다.

지금으로부터 1개월 전.

막 2년 차가 된 레지던트가 야밤에 탈주한 일에 지분을, 혁재가 4할 정도 가지고 있었다.

“죄송해요. 앞으로는 자제할게요.”

“나 남 교수님 수술 어시스트 하고 온 거 알지?”

“아. 네.”

남 교수가 화제로 떠오르자 혁재가 푹 고개를 숙였다.

목이 안 보일 정도였다.

“남 교수님이 너 교육 좀 시키라고 하더라. 3년 차나 됐는데 수술 환자랑 비수술 환자도 가릴 줄 모른다고.”

“저희가 외과니까 웬만하면 수술로 해결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휴, 답답아. 그런 변명은 1년 차 때나 하는 거고.”

동원이 답답하다는 듯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두들겼고.

혁재는 슬그머니 동원의 눈빛을 피했다.

응급실에서 펼쳐졌던 준후와의 건곤일척에서, 혁재는 대패하고 말았다.

기억을 거슬러 돌아간 응급실.

준후가 환자 상태를 노티하고 휴대폰을 혁재에게 내밀었다.

혁재가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혁재야.

뇌혈관 파트 전공인 남 교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혁재를 불렀다.

그 순간, 혁재는 일이 된통 꼬였음을 직감했다.

“네. 교수님.”

-외과의라고 무조건 수술하는 거 아니다. 수술도 환자 상태를 봐 가면서 해야지.

“그게…… 골절에, 출혈에, 뇌척수액이 한 번에…….”

-아니, 그러니까 말이다.

남 교수가 짜증을 내며 혁재의 말을 잘라먹었다.

-질환만 보지 말고 환자 상태를 같이 봐야지. GCS 스코어가 만점인데 수술을 고집하는 신경외과의가 세상에 어디에 또 있니?

“환자 상태가…… 악화될까 봐…… 그랬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너처럼 진료하다간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까지 다 태운다. 앞으로 조심해.

“죄송합니다, 교수님.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남 교수가 준후의 손을 들어주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많은 응급실 스태프 앞에서 혁재는 준후에게 판정패를 당했다.

쪽팔려도 이렇게 쪽팔린 일이 있을까.

혁재에겐 오늘은 잊을 수 없는 대굴욕의 날이었다.

당분간은 다리를 뻗고 자지도 못할 것 같았다.

뿌드드득.

혁재는 몇 시간 전 치욕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너 때문에 나도 남 교수님한테 한 소리 들었다. 치프가 돼서 애들 교육도 못 하고 관리도 못 한다고.”

“죄송합니다.”

“앞으로 죄송할 짓은 하지 말자. 알았지?”

“네.”

“근데 대휘는 뭐하길래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냐?”

동원이 이해가 안 간다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혁재는 모처럼 잡은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준후 새끼가 바깥에서 하루 푹 쉬라고 했대요. 치프 허락도 없이?”

“엥? 진짜야?”

“네. 이건 거짓말 하나 없는 100퍼센트 사실이에요. 준후나 대휘한테 물어보면 바로 답 나올 겁니다.”

혁재가 전한 정보에 동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준후, 이 친구 문제가 많네.”

* * *

그 날 저녁, 당직실.

서울에서 파견을 나온 준후를 위해 환영식이 열렸다.

환영식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인원이 고작 셋밖에 되지 않아서였다.

1년 차 대휘는 준후가 임시 휴가(?)를 보냈고.

기존에 있던 2년 차는 탈주했다.

그래서 병동에 있는 레지던트는 준후, 동원, 혁재뿐이었다.

배달시킨 피자를 가운데 두고 세 사람 간의 대화가 이어졌다.

준후와 혁재는 이미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갈라졌으므로 대부분의 대화는 동원과 준후, 동원과 혁재의 조합으로만 이어졌다.

“듣기로는 준후 네가 대휘한테 멋대로 휴가를 줬다며?”

동원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네. 맞습니다. 대휘가 가운을 벗고 있길래 추궁하니까, 도망칠 생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

“그래서 이야기 잘 들어주고 오늘 하루 푹 쉬라고 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데…… 대휘 상태가 워낙 안 좋아 보여서.”

준후의 변명을 들으며 혁재가 방긋 웃었다.

치프에게 추궁당하는 모습이 쌤통이라는 표정이었다.

“너도 와 봐서 알겠지만 우리 의국은 T.O가 절대적으로 모자라. 한 명이라도 빠지면 업무에 구멍이 난다고.”

“…….”

“네가 대휘를 멋대로 쉬게 하면 일이 얼마나 더 쌓일지는 생각해 봤어?”

“그래도 업무에 차질은 없었습니다. 밀린 차트도 다 작성했고요.”

“웃기지 마. 그건 오늘 갓 파견 나온 내가 끝낼 양이 아니야.”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세요.”

“하라면 안 할 줄 알고?”

치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컴퓨터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10분이 지난 후.

자리로 돌아온 치프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와! 진짜 다 끝내놨네. 심지어 수술 기록까지 작성해서?”

“제가 일은 빨리, 그리고 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대휘를 쉬게 했던 거고요.”

“쩝. 그럼 됐어. 의국 일만 안 밀리면 난 딱히 너희들한테 간섭할 생각 없으니까.”

“치프. 정말 이렇게 끝낼 거예요? 준후 기강 안 잡으실 거예요?”

치프마저 준후의 편을 들자 혁재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 일을 다 했는데 무슨 꼬투리를 잡아?”

“그래도 치프 허락 없이 대휘를 쉬게 했잖아요.”

“그딴 건 상관없어.”

심드렁한 치프와 당황한 혁재를 지켜보며 준후는 씨익 웃었다.

준후는 알고 있었다.

최상의 업무 능력이 곧 최상의 정치질이라는 것을.

이쯤 해서 준후는 자신의 지위에 쐐기를 박기로 마음먹었다.

“치프.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뭔데?”

“파견 나온 동안, 야간 당직. 무조건 제가 서겠습니다.”

준후의 발언이 다시 한번 거대한 파문을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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