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86화 (285/424)

286화

제55장 제압(1)

“뭐? 야간 당직을 너 혼자서만 서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파견 기간이 최소 6개월이야.”

치프가 어림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6개월 동안 당직을 선다면 최소 180일 동안 밤을 새운다는 뜻이 아닌가.

이는 몇 년 전에 사라진 악명 높은 100일 당직보다 최소 2배는 더 끔찍한 업무량이었다.

신경외과 스태프가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하지만 준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무림 출신인 준후는 경이로운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왜? 당직 선다고 생색은 생색대로 내고 밤에 쳐 자기만 하시려고?”

잠자코 있던 혁재가 팔짱을 낀 채 이죽거렸다.

“넌 제발 닥치고 있어 줄래?”

“와…… 이 새끼 진짜 돌아이 아니야? 아직도 나한테 반말을 해? 그것도 치프 앞에서? 치프, 준후 새끼 혼 좀 내주세요.”

“준후야. 낮에 혁재랑 싸운 건 아는데 공개적인 자리에서 반말은 좀 아닌 것 같지 않니?”

치프가 혁재의 손을 들었다.

레지던트 간의 위계 서열이 깨지는 걸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치프 부탁이라도 그건 안 되겠네요. 제 눈에는 혁재가 선배로 안 보여요. 선배면 선배답게 굴어야죠. 제 얼굴을 주먹을 날리는 사람을 존중해줘야 합니까?”

준후가 팩트 폭행으로 혁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혁재는 콧김을 씩씩 뿜으며 준후를 노려보았다.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폭탄처럼 터질 것 같은 혁재를 마주하고도 준후는 심드렁했다.

적어도 무력과 폭력에 관해서 만큼은 절대적인 자유를 얻은 준후였다.

“그럼 치프가 선택하실래요?”

“응? 뭐를?”

“제 반말을 넘어가며 아까 약속한 대로 파견하는 내내 제가 당직 설게요. 단.”

“단?”

“제게 존댓말을 강요한다면 전 야간 근무 아예 안 설 겁니다. 알아서 당직표 짜세요.”

“개자식아. 지금 치프 협박하냐?”

“넌 빠져 있어. 어떻게 하실래요, 치프?”

준후가 대답을 독촉하자 치프가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적거렸다.

길길이 날뛰는 혁재의 눈치를 한 번 보고, 깊은 숲속 샘처럼 고요한 준후의 눈치를 한 번 보았다.

“혁재야.”

“네. 치프.”

“그냥 네가 참아라.”

“네? 치프 진심이세요? 3년 동안 같이 수련한 저를 버리고 준후 새끼를 선택한다고요?”

충격을 받은 혁재의 목소리가 떨렸다.

입술도 바보처럼 벌어졌다.

“네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잖아. 그리고 당직 안 서면 너나나나 세상 편하기도 하고.”

“…….”

“겸사겸사 이번 기회에 성질 죽이는 연습도 하고.”

치프는 결국 준후의 요구에 무릎을 꿇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는 것처럼, 야간 당직 제외는 거부할 수 없는 큰 유혹이었다.

* * *

그 날 저녁 11시.

야간 당직자인 준후는 당직실 한구석에서 운기조식을 펼치고 있었다.

쓰으읍, 숨을 들이마셨다.

대기를 떠다니는 자연진기가 구불구불 혈맥 길을 타고 가다가 종착지인 단전에 쌓였다.

후우우, 숨이 나갔다.

몸 구석구석에 쌓여 있던 탁한 기운이 빠져나갔다.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준후는 구름 위에 누워서 하늘을 둥둥 떠돌아다니는 듯한 편안함을 만끽했다.

이는 다른 심법과 차별화된 청운심법만의 효과였다.

청운심법은 진기를 쌓는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신체와 정신을 정화해 주는 이점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무림에서보다 현대에서 더 쓸모가 많은 심법이었던 것이다.

운기조식을 30분쯤 하고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1년 차 대휘 없이 병동 일을 처리하면서 쌓였던 피로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대 여섯 시간 꿀잠을 잔 것처럼 심신이 상쾌했다.

책상에 앉기에 앞서.

준후는 작년 하반기부터 꾸준히 수련 중인 호월십이수를 펼쳤다.

나비의 우아한 비행을 닮은 발재간 속에 각종 권법과 장법과 수법이 종합 선물 세트로 펼쳐졌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손동작에 허공이 갈라지고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에 준후가 입고 있던 의사 가운이 나부꼈다. 앞머리도 좌우로 휘청거렸다.

호월십이수는 변화무쌍했다.

어느 때는 무공이 초승달처럼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어느 때는 무공이 보름달처럼 부드럽고 유연했다.

-제13초식 폐월수화(閉月羞花)

달과 꽃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는 이치를 담은 이 초식은…….

바닥에 늘어뜨렸던 손을 번개처럼 쳐들어 상대방의 턱을 올려치는 초식이었다.

기습에 특화된 무공이었다.

그런데 폐월수화를 펼치다가 준후는 별안간 동작을 중지했다.

마치 태엽이 다 풀린 꼭두각시처럼.

“……!”

준후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처럼 은은한 기운이 손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초식의 이치를 초식에 완벽하게 녹여 냈을 때만 볼 수 있는 태평광(太平光)이었다.

호월십이수를 대성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준후는 깨달았다.

그리고 호월십이수를 대성한다면 앞으로 외과 수술 도중.

손재주가 부족해서 수술을 그르칠 일은 없다는 것을.

보이지만 닿을 수는 없었던.

11-0 봉합사로 봉합하는 일도 가능할 것임을.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하자.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수련하는 거야.

시간은 결국 내 편이야.

달콤한 성취를 맛보는 가운데.

띠리리링.

당직실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준후는 허공섭물로 수화기를 당겨왔다. 요즘 혼자 있을 때는 무공을 편하게 사용하는 준후였다.

“네. 신경외과입니다.”

-선생님. 여기 스테이션인데요. 혹시 선생님 라인 잘 잡으세요?

응급실 콜이 아닌 병동 콜이었다.

얕은 잠에 들었던 노인 환자가 실수로 수액줄을 뽑았고.

간호사들이 다시 정맥 라인을 잡으려는데 도무지 혈관을 못 찾겠다는 것이다.

“지금 갈게요.”

준후는 허공섭물로 수화기를 원위치시키고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밤 10시부터 취침이라 병동은 고요했다.

텅 빈 복도가 을씨년스러웠다.

병실들은 캄캄했으며 천장에서 달빛처럼 희뿌연 수면등의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준후가 도착한 곳은 505호실이었다.

먼저 와 있던 간호사 두 명이 창가 쪽 침상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화 중이었다.

“야. 당직 선생님은 왜 부르고 난리야? 번거롭게.”

안경을 낀 간호사가 옆에 있는 단발머리 간호사에게 핀잔을 주었다.

안경 낀 간호사의 이름이 현아.

단발머리 간호사의 이름이 유나였다.

나이트 근무자와 잠깐 대화한 적이 있어서 준후는 두 사람을 금방 알아보았다.

“혹시 라인을 잘 잡으실 수도 있잖아요.”

“의사가 라인을 잘 잡아봐야 얼마나 잘 잡겠니? 혹시 1년 차면 모를까. 2년 차면 라인 잡는 거 손 뗀 지 오래일 텐데.”

“서 선생님. 일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잘 생겨서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겠지. 오늘 근무 시작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귀가 밝았으므로 준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하지만 못 들은 척하고 인기척을 냈다.

“선생님. 오셨어요?”

유나가 준후를 반겼다.

반면 현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윤명숙 환자분인데요. 혈관이 워낙 가늘고 잘 터져서요. 라인을 잡으려고 세 번 정도 시도를 했는데 번번이 실패해서.”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준후는 환자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환자는 스태프들을 외면한 채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환자의 이마엔 주름이 졌고 입술은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단지 말을 안 하고 있을 뿐.

간호사들이 정맥 라인 잡기에 실패하자 짜증 난 모습이었다.

환자의 마음을 준후는 충분히 이해했다.

주삿바늘로 정맥을 연신 쑤셔대면 아프기도 하고, 실험체가 된 것처럼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스태프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선생님. 이 환자분, 내일 수술이라 18G 써야 해요.”

“알아요. 오더 낸 사람이 저인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근데…… 주삿바늘을 22G로 바꾸는 건 어떨까요? 저도 라인을 잘 잡는 편인데 이 환자에게 18G는 무리예요.”

현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주삿바늘의 게이지는 숫자가 클수록 얇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주삿바늘이 얇을수록 정맥 라인을 잡기 쉬웠다.

그런데도 굵은 바늘이 필요한 이유.

그것은 응급상황일 경우, 굵은 바늘이 환자의 체내에 더 많은 약물을 또는 혈액을 투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18G 써야 해요. 내일 수술이 뇌종양 수술이에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래도…….”

“제가 성공하면 되잖아요?”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텐데요?”

“원래 저는 어려운 일, 전문입니다.”

정맥 라인을 잡기에 앞서서, 준후는 환자의 왼팔을 살폈다.

그나마 굵고 선명한 혈관들은 간호사들이 이미 사용했다.

손등이나 팔꿈치가 접히는 부분 같은 장소 말이다.

준후는 환자의 오른팔로 시선을 옮겼다. 오른팔의 혈관은 왼팔의 혈관보다 더 볼품이 없었다.

혈관이 아예 튀어나와 있지를 않았다.

모니터처럼 평면이었다.

“환자분, 혹시 왼손잡이신가요?”

“네. 그건 왜요?”

“그럼 오른팔에 주삿바늘을 연결해드리려고요.”

“저희도 오른팔에 놓을 수 있으면 놨죠. 환자분 왼손잡이신데 불편하게 왼팔에 놓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요.”

“현아 쌤. 좀 조용히 해주실래요? 다른 환자분들 깨겠습니다.”

준후의 지적에 현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럼 어디 네가 얼마나 잘하나 구경이나 해보자’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아는 아직도 본인이 준후보다 라인을 잘 잡는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준후는 환자의 오른팔에 토니켓(고무줄)을 묶었다.

울혈이 되면서 혈관이 튀어나올 법도 했건만 환자의 팔은 여전히 평면이었다.

혈관에서 입체감을 느낄 수 없었다. 정맥은 그저 파란 선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서.

준후는 손가락으로 환자의 혈관들을 더듬었다.

촉지를 해도 혈관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준후는 내공을 사용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간 내공이 환자의 혈맥과 혈관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혈관의 넓이와 깊이 등의 정보가 내공을 통해 준후의 손끝으로 전해졌다.

‘좋아. 여기면 되겠네.’

준후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자리는 팔꿈치 관절에서 2센티미터 아래에 있는 자리였다.

혈맥으로는 공최혈이 존재하고 정맥으로는 주정피정맥이 지나가는 위치였다.

오직 이 위치만이 18G를 소화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 황금 스폿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 또한 준후뿐이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알콜솜으로 혈관을 소독한 후 준후는 손에 18G 카테터를 들었다.

혈관이 움직이지 않도록 왼손으로 혈관 하단부를 단단하게 고정하고.

준후는 환자의 정맥에 30도 각도로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바늘이 피부를 꿰뚫었다.

그 미세한 촉감이 손에 전달되었다.

지금의 준후는 주삿바늘 그 자체가 되어 환자의 혈관에 침투하는 중이었다.

툭!

바늘이 정맥의 표피를 통과하면서 빨랫줄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준후는 주삿바늘의 각도를 더 낮췄다.

느리지만 섬세한 동작으로 혈관에 카테터를 밀어 넣었다.

회색 주사침이 환자의 피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이윽고 카테터 주둥이 쪽으로 검붉은 피가 몰려들었다.

“…….”

“…….”

순간 고요해지는 침상.

단 한 번의 시도로 왼팔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오른팔 정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환자는 물론이요.

현아와 유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준후는 유도침을 제거하고 수액줄을 연결했다.

뚝. 뚝. 뚝.

점적통에서 하트만 용액이 시원시원하게 떨어져 내렸다.

“어때요? 참 쉽죠?”

0